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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의 눈8] 너무나 닮은 한-일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비밀

김정기 교수가 쓴 일본이야기, 일본 목조와 한국 금동 ‘오누이 같은’ 닮았네

이전 이야기에서 경관이 뛰어난, 쓰시마 상현 아소만의 조선식 산성을 한 대목으로 삼았지만 그 아소만 고후나코시(小船越)란 곳에 유서깊은 절 바이린사(梅林寺, 이하 ‘매림사’)가 들어서 있다. 그런데 이 절이 일본 불교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 이번 이야기는 쓰시마가 일본으로의 불교 전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점은 이전 이야기에서 한반도, 특히 신라에서 발원하는 무교가 쓰시마를 통해 일본에 들어갔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상기하면 쓰시마는 일본인의 주식인 쌀의 원조 적미를 전하는 몫을 한데 이어 그들의 정신적 양식으로서 신앙의 토대가 된 무교를 전도하는 무대가 되었다. 우선 <지도의 수첩-이키·쓰시마>라는 책에 매림사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매림사는 백제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는 도중, 쓰시마의 고후나코시에 불상과 경전을 일시 안치했던 그 터에 세운 절[寺]이라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경내에는 나무로 둘러싸여 차분한 분위기가 감돈다(金達寿, 1986, 234 재인용).

 

재일작가 김달수는 “한국에서 불교 등 문화가 전해지는 경우 쓰시마가 그 중계지의 하나가 된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다”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쓰시마에 이른 곳마다 불상이 있다”면서.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미네초-키사카(峰町木坂)의 와다츠미신사(海神神社)에 있는 신라불과 이즈하라초-구네하마(嚴原町久根濱)의 대흥사(大興寺), 가시네(樫根)의 법청사(法晴寺)에 있는 고려불 등이다”...“불상을 최근 들어 속속 발견되고 있다” 고.

 

그는 이어 구노 다케시(久野健) 씨의 <도래불의 여행> 중 「쓰시마의 조선불」 편을 인용해 불상 전체 수는 100체 이상이 있으며, 최근 들어서서도 상현 엔메이사(圓明寺)에는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는 최고(最古)의 금동보살입상 등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근세 이후 알려진 새로운 사실로서 이즈하라 초-의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에는 현재 한국에도 없는 고려 초기의 <대반야경> 초조본 500권이 보존되어 있다고.

 

이렇듯 쓰시마 곳곳에는 불상 등 불구와 경전이 안치되어 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아래 불상, 경전 등이 위기를 맞자 뜻있는 스님들이 후세를 위해 우선 이것을 쓰시마에 ‘긴급피난’이 시킨 것이란 설도 있다. 어쨌든 여러 정황으로 보아 불교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데에 쓰시마가 중간 기착지, 또는 그 이상의 몫을 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불교가 일본열도로 언제 건너갔는가? 백제에서 불교가 일본열도로 공식적으로 전해진 해로서는 종래 538년 설과 552년 설이 갈리고 있는데, 이와는 달리 교토대학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548년 설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설을 취하든 한 해만에 한해서 불교가 일본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여러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공전 해라는 552년 이전에도 북 규슈에 불교가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후쿠오카 현의 레이센지(霊仙寺, 이하 ‘영산사’), 오이타 현의 만게츠지(満月寺, 이하 ‘만월사’)의 개찰 전승은 야마토 조정에 불교가 전해지기 이전이라고 말하고 있다(上田正昭, 1989, 154~155). 나라 현 옛 왜 조정의 도읍인 야마토로 전해진 백제 불교가 북 규슈나 세토 내해(瀨戶內海)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날아갔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이상 일본에 공전된 불교는 한반도에서 쓰시마에 기착해 그로부터 번진 불교가 아니겠는가.

 

 

■ 열도를 뒤덮은 불교신앙-성덕태자로부터 받은 일본 국보 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그 뒤 불교는 열도를 뒤덮은 신앙이 되고 만다. 위로는 천황가로부터 밑에 민중에 이르기까지 열도는 불교 열풍에 휩싸인다. 불교문화, 불교예술이 열도에서 꽃을 피운다. 흔히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까지 특히 일본미술사의 시대 구분에서 하쿠호-(白鳳, 이하 ‘백봉’)시대가 중요한데, 이는 나라시대(710~784)에 꽃핀 불교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글쓴이는 그 중에서도 으뜸이라면 교토의 코-류지(広隆寺, 이하 ‘광륭사’)에 안치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을 들고자 한다. 교토시 우즈마사(泰秦)에 있는 이 절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되어 있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덕분에 유명한 절이 되었다. 관광 수입도 짭짤하다고.

 

이 반가사유상은 603년 하타노 카와가츠(秦河勝)라는 신라 도래인이 성덕태자로부터 받은 불상이라 전해진다. 그가 불상을 위해 지은 절이 하치오카사(蜂岡寺広), 즉 광륭사의 전신이다.

 

이 불상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78호]와 똑 닮았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일본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나는 이제까지 철학자로서 인간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표징(表徵)으로서 여러 모델을 접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들의 조상(彫像)도 보았고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뛰어난 조상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직 초극(超克)되지 않은 지상적·인간적인 잔재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지와 미의 이상을 표현한 고대 그리스 신들의 조상에도 지상적인 오점과 인간적인 감정이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로마시대의 종교적인 조상에도 인간존재의 진정으로 정화된 기쁨이라는 것이 완전히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광륭사의 미륵상에는 실로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시간적인 것, 속박을 초월해서 도달한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까지 몇 십 년 동안의 철학자로서의 생애 중에서 이만큼 인간실존의 진정으로 평화스런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지닌 마음의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진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쓰시마를 거쳐 규슈에 상륙한 뒤 차츰 서정(西征)을 거듭해 도읍을 나라에 두고 ‘나라’를 세운 것이 8세기 초반이다. 6세기 킨메이(欽明) 조 때 한반도의 백제에서 불교가 전해진 뒤 약 200년이 지나서였다. 특히 741년 쇼-무(聖武) 천황[재위 724~749]은 칙원(勅願) 내려 유명한 루샤나(盧舍那) 대불을 동대사(東大寺)에 세우고 총코쿠분사(總国分寺)로 하여 전국에 코쿠분사와 코쿠분니사를 짓도록 했다. 전국의 80여 지방 국마다 절을 짓게 했으니 얼마나 많은 절이 지어졌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쇼-무가 재위한 730년대 일본 불교는 전성기를 맞았다. 백제에서 불교가 전래한 지 200년이 흐른 뒤, 그 불교가 이미 법흥사를 비롯해 사천왕사(四天王寺), 법륭사, 약사사와 같은 대사원이 속속 들어서 흥륭을 맞은 것이다. 게다가 이름난 호족들이 우지테라(氏寺, 씨족 조상의 위패를 모신 절)를 세워 그 세를 과시했다. 예컨대 당대 권력자 소가(蘇我) 씨는 법흥사를 세웠으며, 소가씨를 물리친 후자와라(藤原)씨는 흥복사를 세웠다.

 

그런데 전성기를 맞은 일본불교는 한반도 계, 즉 신라계, 백제계, 고구려계의 불교의 씨앗이 쓰시마를 통해 건너가 일본 땅에 열매를 맺은 것을 놓칠 수 없다. 특히 백봉시대에는 신라불교의 영향은 막강한 것이었다. 다무라 엔조(田村圓澄) 씨는 “반가사유상과 성덕태자신앙”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백봉시대의 일본불교는 신라불교 계의 동향에 민감했으며, 그리고 재빠른 반응을 나타냈다. 신라경전의 수용, 특히 ‘대반야경’이나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勝王経)’의 중용 경향은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법상종도 신라에서 전해진 것인데, 그밖에 사원 건축이나 불상조각 양식도 신라에서 옮겨온 것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른바 백봉미술의 원류를 초기 당나라에 구하는, 이때까지의 견해에 대해 나는 오히려 신라와의 관계를 중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백봉시대 일본과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보면 702년[大宝2]에 한번만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한데 지나지 않는다. 야마토 조정은 신라와의 수호(修好)에는 적극적인 반면 당나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이 사실은 당나라보다 신라가 백봉문화 형성에 깊게 관련된 것을 추정시키는 근거로 될 것이다(金達寿, (日本古代史と朝鮮, 171, 재인용).

 

그렇다고 그 당시 일본불교가 한반도 계에 유래한 것이라고 해서 ‘한국불교’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왜 땅에서 꽃피고 열매를 맺은 일본불교인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든 목조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닮았다 해서 한국국보라고 할 수 없듯이.

 

■ 당나라 승 칸진의 도일-한국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오누이’?

 

그러나 일본불교는 그 이후 한국불교의 틀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753년, 왜 왕조의 연대기로 말하면 덴뵤-쇼호-(天平勝宝 5년) 당나라 승 칸진(鑑眞)이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칸진은 다섯 번이나 왜 땅으로 가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끝에 여섯 번 째 겨우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여섯 번째도 실패할 것이었으나 전남 완도에 진을 친 장보고 선단이 칸진을 구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왜 왕조가 칸진을 초청한 배경은 무엇인가. 칸진이 일본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형편을 본다면 고구려 계, 백제 계, 또는 신라 계 호족의 불교가 대세를 가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672년 진신의 란(任申の乱)으로 텐무(天武) 조가 들어서자 당나라보다 신라와 교류가 활발해지고 일본불교는 신라 계의 호국불교로 변모해 일본불교 계는 신라 일변도로 되고 말았다. 그러나 686년 텐무가 죽자 황후로서 임금의 자리를 이어 받은 지토-(持統) 조는 또 하나의 정변을 도모하여 백제 계가 득세하게 된다.

 

그리하여 8세기 들어서자 고대 일본 국가는 통일을 기하기 위해 자기절대화를 의식해 <고사기> <일본서기>가 편찬되고 이미 망해버린 고구려나 백제를 속국시하고 신라를 번국시(蕃国視)하게 된다. 당나라에서 칸진을 초빙한 것은 실로 이런 자기절대화의 과정의 일환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 소설가이자 문명비판가인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는 “코마신사의 피리(高麗神社の笛)”라는 글에서 그 형편을 다음과 같이 일러둔다.

 

무슨 계 무슨 계의 국내의 정쟁이 각자의 조족(祖族)이나 그 문화에 의한 한 국내 통일은 바랄 수 없다. 그것을 통일하는 최단거리는 그 어느 계통의 씨족대해서도 문화적으로 모태를 이루는 최대강국의 대 문화에 의지하는 것보다 더 낳은 길은 없다(金達寿, 1985, 재인용).

 

 

그가 말한 ‘최대강국의 대 문화’란 당시 당나라의 불교문화에 다름 아니었다. 칸진이 일본에 온 까닭은 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칸진은 일본에 와 나라에 율종(律宗)인 당초제사(唐招提寺)를 여는 등 일본불교의 흥륭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렇다고 쓰시마를 중간 거점으로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국불교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성과로 태어난 일본불교의 역사와 그 과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광륭사의 일본국보 1호 목조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 그리고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 두 오누이 미륵보살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서로 속삭이고 있잖은가. 미즈사화 스미오(水沢澄夫)라는 학자는 저서 <광륭사>에서 한반도 계 씨족과 불교 유적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불교관계에서 말하자면 아야(漢)가 백제 계인 데 반해 하타(秦) 씨는 신라 계였다. 그것은 아스카사(飛鳥寺)의 대불, 호류-사의 금당본존을 비롯해 호린사(法輪寺)의 목조 허공보살입상(虛空菩薩立像) 등 여러 불상이 백제 양식을 띠고 있는데 반해 광륜사의 미륵사유상이 신라 양식인 것만 봐도 하타 씨가 신라 계였음을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김달수, 1993, 69 재인용).

 

참고문헌

金達寿, <日本古代史と朝鮮>, 講談社, 1985

-- <古代朝鮮と日本文化: 神々のふるさと>, 1986

김달수, <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혼>, 동아일보사, 1993

坂口安吾, <安吾新日本地理>, 河出書房新社, 1988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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