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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加坡 통신④ 우연히 만난 케이팝 팬에게 느낀 감동

한류는 오랜 아시아 교류의 산물...우월감 아닌 상호보완성에 주목

 

1. 비행기에서 만난 샨족 케이팝 팬


얼마 전 싱가포르발 미얀마행 비행기를 탔다가 마주친 일이다. 별 의도없이 여권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는데 옆자리 십대 후반의 여대생이 내 여권을 보고 눈이 반짝반짝해지며, "한국분이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옆좌석 낯선 이에게 먼저 인사를 받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좋은 일이다. 게다가 국적과 관련된 인사는 더욱 반갑다. 1시간 이상 무표정으로 이어폰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저, 지금 케이팝 듣고 있었어요. 엑소와 마마무 좋아하는 케이팝(K-POP) 팬이에요"라고 마음을 연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공부 중인데 이제까지 제대로 한국 사람을 만나본 적은 없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덕분에 남은 비행기 시간 동안, 그녀가 궁금해 했던 케이팝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같은 사례는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꽤나 흔한 현상이 됐다. "한국"이라는 국적이 많은 이들에게 "쿨하고 멋지다"는 이미지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대략 2010년 무렵 부터인데 아시아에 장기 거주한 분들은 꽤나 체감을 한 현상일 것이다.

 

싱가포르 역시도 한류와 케이팝 덕질의 나라이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이 한국 가요를 듣는 게 무척 자연스럽다. 케이팝 공연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가 됐다. 단순히 흥미나 유행이 아니라 가장 아시아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문화 상품으로 소비되고 선택받는다는 점이 더욱 자랑스럽다.

 

비행기에서 만난 이 샨족 출신의 미얀마 여학생과 대화하면서 스스로 가장 뿌듯했던 대목은 그녀가 지난 15년간의 케이팝의 역사와 계보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과거 2세대 케이팝 스타인 투애니원, 소녀시대, 빅뱅, 2PM 등을 넘어 최근 인기를 끄는 3세대 BTS 블랙핑크 트와이스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케이팝 아이돌의 특징과 소속사 스토리, 심지어 한국에서의 여러 정치적 사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 것이다. 

 

그 순간 나의 기억은 1990년대 나의 대학시절 하숙방으로 이동을 했다. 당시 필자는 대중문화비평을 해본답시고 강헌 선생의 리뷰와 민음사의 몇몇 계간지 등을 읽었는데, 어떻게든 현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1968년 정신, 우드스톡, 비틀즈 및 현대 서양 대중음악의 계보 등을 의무적으로 공부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서구의 현대사를 록과 팝과 교차시키며 책으로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2000년대에 태어난 10억 명에 육박하는 아시아 젊은이들이 케이팝에 대한 스토리를 접하고, 한류와 관련된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한 담론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는데, 어찌 내 가슴이 살짝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필자가 우드스톡을 책으로 읽을 때의 경험을 엇비슷하게라도 체험했으면 하는 바람이 피어났다. 물론 그 정치경제적 맥락은 일부 다르다고해도 말이다.

 

2. 케이팝, 학계에서도 주목하는 "아시아적 현상"


벌써 10년 가까이 된 현상이지만, 케이팝은 미디어의 관심을 뛰어넘어 아주 흥미로운 학문적 분석의 대상이 됐다. 특히 문화사회학, 인류학, 미디어 관련 전공 연구자들이 한국의 대중문화 확산을 소재로 다양한 연구 쓰고 있다. 2018년부터 필자도 케이팝 관련 논문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학문 분야의 학생들이 주어진 열악한 환경에서도 케이팝을 소재로 논문을 써낸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아시아를 주제로 삼는 연구자들에게 케이팝은 꼭 통과해야 할 주제가 되었다.

 

지역학 무대에서도 케이팝은 급부상한 화두다. 최근 지역학의 트렌드는 탈국가/ 난민/ 여성/ 크로스보더/ 탈서구 등 국경을 넘나드는 포스트모던적 현상이다. 이 케이팝은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뚜렷한 문화현상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와 사우디의 무슬림 여성들이 미국의 아티스트가 아닌 한국의 가수들에게 열광하는 모습 그 자체로 학계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21세기적 현상"이라고 느낀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아시아의 생산력이 서구를 따라잡기 시작했고, 혁신의 수준 역시도 세계 수준에 이르게 되면서 그 대표주자인 한국의 거의 모든 생활 양식에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무척이나 상식적인 얘기다. 그런데 필자는 지난 3년의 동남아를 새롭게 경험하는 과정에서 다른 맥락의 느낀 점이 있다.

 

3. 한국이 잘나서? 아니! 아시아적 현상


2010년 무렵에 한류가 동남아에 본격 전파될 무렵, 아주 많은 현지인들로부터 K-POP과 K-드라마에 대한 칭찬을 접했다. 당시 필자의 첫 느낌은 일종의 민족적 자부심이었다. 케이팝이 아시아 시장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시장의 확대, 나아가 한국 문화의 전파는 물론이고 한국이 드디어 문화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는 명백한 증거로 느껴졌다.

 

그런데 밖에서 한류를 다시 살펴보니 이런 생각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지를 깨달은 것이다.  한국은 19세기 후반 개항 이전까지 중국 이외의 서구 문명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 폐쇄된 사회였다. 20세기 들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반강제적으로 빠른 근대화를 거쳤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한국 밖 아시아의 세계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오랜 역사를 가졌는지 간과하기 쉽다.

 

반면 동남아시아 지역은 16세기부터 서구와 대등한 관계에서 교역을 시작했고, 18세기부터는 굴욕적인 제국주의 경험을 거치며 우리보다 보다 깊고 폭넓은 세계화를 거쳤다. 동남아가 케이팝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 이유도 "좋은 것"을 아무런 편견없이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적인 지정학적인 요인도 한몫했던 것이다. 만일 동남아시아의 열광적인 지지가 없이 한류가 본격적인 세계화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을까?

 

동시에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한류는 아시아 지역에서 아주 오랜시간 지속된 교류와 교차의 결과물일 수 있다. 한국인의 시선 바깥에서 케이팝을 바라보게 되면, 가까이는 일본 대중문화로부터 큰 틀을 차용하고, 1980~1990년대 홍콩문화로부터 특유의 정서와 노하우를 받아들인 특징이 분명히 드러난다. 게다가 1960년대 이후 지속된 아시아의 각종 분쟁과 냉전체제 역시 아이러니하게 한국의 빠른 세계화에 보탬이 된게 사실이다.

 

한류는 굉장히 오랜 시간 아시아라는 바탕 위에서 숙성이 됐던 것이다. 게다가 아시아 10대 20대 청춘들의 열광적 지지도 케이팝 성장에 큰 힘이 됐다. 현재도 수많은 아시아 젊은 인재들이 케이팝 월드에 속속 참여하지 않았던가? 태국 출신 블랙핑크 멤버 '리사'처럼 말이다.

 

케이팝의 급성장과 국제화는 한국문화의 우월함의 상징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1990년대 초반 홍콩문화에 열광했듯이, 자연스럽게 '한국의 순서와 시간'가 찾아왔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 순서를 위해서 아주 많은 아시아의 희생과 배려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다. 문화는 이런 게 아닐까? 우리가 개방과 혁신을 지속한다면 케이팝의 미래는 분명 희망적일 테지만 그 미래가 영원히 보장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친구와 동료가 없이 어찌 홀로 그 문화가 빛을 발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 시선을 아시아로 넓혀보니 필자의 심정은 "아시아에서 한국보다 더 개방적이고 혁신적이고 보다 민주적인 사회가 빨리 출현해 케이팝의 지위를 빨리 앗아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조차 들 정도다. 물론 한국은 현재 전세계적인 문화 전쟁에서 분명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한류는 분명 우리의 자랑임과 동시에 아시아의 자랑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가 홀로 이룩한 성취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여기서 살포시 공유해 본다. 

 

PS:  
2019년 1월, 싱가포르에서 엄청난 웃돈을 주고 BTS 콘서트를 관람할 수 있었다. 필자가 싱가포르에서 했던 가장 큰 사치 중의 하나였다. 너무 멀어서 멤버들의 얼굴형태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 열광적인 분위기를 느낀 것만으로 엄청난 영광이었다.

 

 

정호재는?

기자 출신으로 현재 싱가포르와 미얀마에서 아시아학을 공부하며 현지 시장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태국의 탁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캄보디아의 삼랑시 등 동남아의 대표 정치인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관련 책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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