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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이야기19]조선반도서 대량 도래해 선주민 정복

일본인은 누구인가2. 일본민족론: 조몬 인(繩文人)·야요이 인(弥生人)

 

우리는 고분시대 4~5세기 즈음 일본 열도의 주민을 ‘일본인’이라고 불렀지만 6세기까지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은 없었다. 따라서 이는 편의상 부른 이름에 지나지 않고 야마토 왕조의 국호는 ‘왜국’이었으니 ‘왜인’이라 해야 마땅하다. 이 ‘왜인’을 교체해 들어선 것이 퉁구스 계=조선계 정복민족이었다면 그 윗대 조몬 인(繩文人)·야요이 인(弥生人)은 누구인가?

 

조몬 시대란 기원 전 1만년에서 전 4세기 즈음까지 아득한 옛날이며, 야요이 시대란 기원 전 4세기에서 후 3세기까지 이어진 시기이다. 특히 야요이 시대는 한반도에서 논농사와 함께 금속기가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일본문명의 발상 기로, 도래 문물이 상륙한 북 규슈는 야요이 문명의 발상지로 일컬어진다.

 

대체로 새끼줄 문양의 토기를 만들었다는 조몬 인(繩文人)은 남방계 인으로 알려진 반면 야요이 인은 볼록한 둥근 항아리를 만든 북방 계인으로 일컬어진다. 그 항아리는 1984년 도쿄대학 구내인 혼고(本鄕) 야요이 쵸-(弥生町)의 무코-카오카 패총(向ヶ岡貝塚)에서 발견되었다 해서 ‘야요이식 토기’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먼저 조몬 인에 주목해 보자. 일본의 역사민속박물관 교수 고야마 슈조(小山修三)의 저술 <조몬시대>에 의하면 “8000년간이나 계속된 조문시대의 총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 25만~26만에 지나지 않았기에 어떤 관심도 갖게 되지 못하였다”고.

 

그것은 조몬 시대가 끝난 뒤 1000년 뒤 나라 시대 총인구가 일거에 500만~600만명이 되었다는 배경에서 이었다. 그렇다면 8000년의 8분의 1에 지나지 않은 1000년도 못되는 사이에 일본열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또는 재래의 조몬 인과 야요이·고분시대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야요이 인이 정복한 조몬 인-조선반도서 대량 도래해 일본 선주민 정복

 

고야마는 ‘조문 시대의 인구’를 우선 야마우치 키요오(山內淸男)가 낸 15만명 설이나 세리자와 쵸스케(芹沢長介)가 낸 12만명 설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분석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최신 방법을 구사해 정리했다는 고야마의 분석에 의하면 조몬 시대 총인구는 중기의 26만1300명이 가장 많고, 후기의 16만 300명에서 만기의 7만 5800명으로 줄어들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야요이 시대에 이르면 59만 4900명으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기후(岐阜)대학의 다나베 유이치(田名部雄一) 교수는 <개[犬]에서 찾는 고대일본인의 수수께끼>(犬から探る古代日本人の謎)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몬 시대 말기에 20만도 못되던 인구가 야요이 시대가 되면 60만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쌀·보리[イネ·ムギ] 등 농경문화, 소·말[ウシ·ウマ], 닭 등 가축문화, 청동기, 철기제조기술을 갖는 민족이 조선반도에서 대량 도래해 일본의 선주민인 조몬 인을 정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金達寿, 日本の中の朝鮮文化 시리즈 10, 5~6 재인용).

 

‘개에서 찾는 고대일본인의 수수께끼’라는 연구는 “개[犬(이누)]는 사람[人(히토)]와 함께 행동 한다”는 점에 착안해 “현재 일본 개라고 일컬어지는 이누(犬)는 예부터 일복국토 정착해 살았던 조몬 인에 길러진 이누(犬)에 야요이 시대 건너온 조선반도의 이누(犬)가 교잡(交雑)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이어 다나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개[犬]는 사람[人]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옛날 일본에서 사람역사의 유전학적 연구에서 얻은 결론과 같이 일본국토에서 예부터 조몬 인이라고 불러진 사람이 정착하게 되고, 뒤이어 야요이 시대에 조선반도에서 새로운 사람 집단이 도래해 조몬 인을 정복했던 역사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적어도 야요이 시대에 조선반도에서 새로운 개 이외 현재 일본에 있는 가축 거의 모두가 들어 온 것은 제5장 도입의 역사에서 논하고 있기에 이 시대를 경계로 해 일본에 조선반도에서 이들 가축에 동반한 사람 집단이 도래했다는 것은 틀림없다(金達寿, 위 책 15~16).

 

위에서 “야요이 시대에 조선 반도에서 새로운 사람 집단이 도래해 조몬 인을 정복했던 역사가 있었음에 틀림 없다”라는 서술은 고분 시대 기만민족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 왜인을 정복했던 시기에 훨씬 거슬러 올라 간 야요이 시대 벌써 조선 반도에서 도래한 야요 인이 조몬 인을 정복했던 이야기를 말해준다. 그것은 하니하라 가즈로(埴原和郞)가 <일본인의 탄생>에서 도달한 결론에서도 같다.

 

대륙 계 사람들의 도래는 이미 조몬 시대말기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되지만 야요이 인들이 도래한 것은 아시는 대로이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에 의하면 도래의 파도는 7세기 후반에 이를 때 까지 몇 차례 커다란 물결로 일본에 다가왔다고 한다.

 

야마토 정권의 기반이 생긴 것은 5세기 즈음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적어도 이 시기 이후의 도래자는 대륙에서 직접 기내(畿內) 지방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토착인[조몬 인의 자손]과 깊게 혼혈이 행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야마토 정권 성립 이전의 대왕가도 도래 계 집단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생각된다.

 

야마토 정권 성립 이후는 우선 서 일본에, 그리고 뒤에 동 일본에 정토군(征討軍)이 보내졌다. 이 경우 정토의 대상이 된 것은 토착 계의 집단이었을 것이다. 도래인과 토착인은 문화나 생활양식도 다르고 정치 감각도 전혀 달랐기 때문에 야마토 정권에 의해 ‘순종치 않는 놈들(まつろわぬものども)’이라는 딱지 붙고 말았던 것이다(金達寿, 위 책 16~17).

 

■ 키가 코고 얼굴이 긴 야요이 인-현대 남조선인에 아주 닮은 특색

 

위에서 말한 한반도에서 야요이 인의 조몬 인 정복 이야기는 야요이 인의 인골 연구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오랫동안 규슈대학에서 인류학을 연구해온 카나세키 다케오(金関丈夫) 교수는 전후 사가 현 미츠나가타(三永田)나 야마구치 현 도이가하마(土井ヶ浜) 유적의 야요이 인의 인골을 연구한 결과 이들 인골이 쓰시마 일부나 현대 남조선인에 아주 닮은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키가 크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이노우에 미츠사다 교수는 “이는 이 시기 서 일본에 대륙에서 사람들이 도래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井上光貞, 1973, 174)라고.

 

특히 주목을 끈 것은 1986년 1월 6일치 <니시니혼신문>(西日本新聞)을 보면 “나국 사람도 장신, 얼굴이 길다/나가이(永井) 규슈대학 교수, 가네노구마(金隈) 유적의 인골분석/‘야요이 인 도래설’ 뒷받침/북 규슈·야마구치형(山口型)/공백지대를 메우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의 가네노구마 집단의 옹관묘 유적에서 나온 야요이 시대 인골은 「그 전의 조몬 시대 인이나 같은 시기의 남 규슈의 야요이 인에 비해 두드러지게 키가 크고 얼굴이 길다」는 것이 규슈대학의 나가이 마사부미(永井昌文) 교수[해부학] 등의 조사로 밝혀져 나가이 교수 등은 그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특징을 가진 인골은 이미 사가현 간자키군(神崎郡)의 미쓰(三津)나 야마구치현 도이가하마 등 야요이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야요이 문화의 중심지인 나국에서 이 정도로 많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이 발견은 야요이 기에 조선반도에서 북 규슈·야마구치에 대량의 도래 자가 있었다고 하는 ‘야요이 인 도래설’을 뒷받침하며 또 그 뒤 긴키(近畿) 등지로 퍼져갔다는 ‘일본인기원론’에도 일석(一石)을 던질 것 같다(김달수, 1993, 301).

 

 

구비치는 4단계의 도래 인의 물결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굽이굽이 흘러들어간 도래 인들은 야요이 시대 북 규슈에 상륙해 거주하고 이어 산요(山陽)를 거쳐 긴키(近畿) 지방에 이르렀다.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가 제시한 4단계의 도래인의 물결[波] 중 제1단계에 해당한다.

 

그 뒤 야마토 정권 수립에 이른 5세기 전후에 제2단계의 도래 파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서 일본에서 고분이 만들어진 시기에 해당한다. 다시 그 일부 하야토(隼人: 고대 남 규슈에 살았던 소수 부족)는 벌써 이 시기에 야마토 정권 지배 아래 들어갔다고 생각되기에 도래 파는 남 규슈에 이르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인은 누구인가에 대해 위에서 열거한 고고학적 연구, 인구학적 추세, 인골분석 결과는 해답을 주고도 남음이 있지 아니 한가. 그래도 한반도와의 인연을 한사코 거부하는 ‘전문가’가 적잖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참고문헌

金達寿. <古代朝鮮と日本文化: 神々のふるさと>, 株式會社講談社, 1986

-- . <日本の中の朝鮮文化> 시리즈 10, 株式會社講談社, 1993

-- . <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혼>, 동아일보사, 1993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jkkim63@hotmail.com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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