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
[서정인의 아세안ABC 41] 한국-ASEAN, ‘초크포인트’를 장악하라
미-중 경쟁의 핵심은 관세가 아니라 ‘초크포인트’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있다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 2026년 5·6월호에 에드워드 피시먼(Edward Fishman) 미국외교협회(CFR) 지경학센터 선임연구원이 "How to Fight an Economic War: A Field Manual for a Ruptured World"라는 글을 실었다. 피시먼은 "Chokepoints: American Power in the Age of Economic Warfare"의 저자이기도 하다. 제목 그대로 그의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세계는 자유무역과 상호의존을 통해 함께 번영하는 시대에서 경제적 상호의존 자체가 무기가 되는 ‘경제전쟁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초크포인트(chokepoint)다. ■ ‘전략적 무기’ 초크포인트란 무엇인가...높은 시장점유율-대체제 부재-무기화 모든 경제적 의존이 초크포인트는 아니다. 피시먼은 진정한 초크포인트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특정 국가 또는 긴밀한 동맹국들이 압도적으로 높은 시장점유율을 가져야 한다. 둘째, 단기간에 대체재를 찾기 어려워야 한다. 셋째, 이를 무기화했을 때 상대방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주면서 자신이 입는 피해는 상대적으로 작아야 한다. 즉 ‘비대칭적 피해’를 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조건을 충족해야 단순한 경쟁우위가 아니라 경제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략적 무기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달러와 첨단 반도체 기술, 중국의 희토류다. 달러는 세계 외환거래의 약 90%에 관여한다. 미국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시장의 85% 이상을 차지한다. 반면 중국은 세계 희토류 정제의 약 90%를 담당한다. 특히 희토류의 비대칭성은 놀랍다. 중국의 2024년 희토류 및 자석 수출액은 약 34억 달러에 불과하지만 미국지질조사국 연구에 따르면 네오디뮴 공급이 30%만 감소해도 미국 GDP가 2.2%, 6천억 달러 이상 감소할 수 있다.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감수하고 수천억 달러의 피해를 상대방에게 줄 수 있다면 강력한 경제무기가 된다. 피시먼은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국가는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을 무기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존(dependence)을 무기화한다. ■ 트럼프 관세는 왜 생각보다 강력한 무기가 아닌가...중국-브라질 사상최대 수출 역설 이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관세의 한계도 드러난다. 미국은 세계 최대 수입시장이지만 세계 전체 수입의 약 13%를 차지한다. 미국 시장이 크기는 하지만 세계시장을 독점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의 높은 관세로 대미 수출이 감소한 중국과 브라질은 다른 시장으로 수출을 돌려 전체 수출에서는 오히려 사상 최대 기록을 세웠다. 캐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캐나다 수출의 75% 이상이 미국으로 향하기 때문에 외형상 미국이 압도적 우위를 갖는다. 그러나 미국이 캐나다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 미국 자동차 산업과 정유산업, 전력망까지 피해를 입는다. 피시먼이 인용한 추정에 따르면 캐나다산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할 경우 미국 가구당 약 700달러의 비용이 발생한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만 자신도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면 완벽한 초크포인트라고 보기 어렵다. ■ 호르무즈가 보여준 새로운 경제전쟁...대표적인 지리적 초크포인트 피시먼은 최근 이란전쟁에서 나타난 호르무즈해협 사태를 중요한 사례로 든다. 호르무즈해협은 세계 석유와 LNG의 약 20%가 통과하는 대표적인 지리적 초크포인트다. 과거에는 이란 역시 원유 수출을 위해 해협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봉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그러나 이란은 해협 전체를 물리적으로 봉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값싼 드론과 미사일로 일부 선박을 공격하는 것만으로 보험료와 운송 위험을 크게 높여 민간 선사들이 운항을 기피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초크포인트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경제전쟁은 반드시 정부가 수출을 금지하거나 금융거래를 차단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민간기업의 위험 계산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 수 있다. 한국과 ASEAN 같은 무역국가에는 특히 중요한 대목이다. ■ 미국도 이제 경제전쟁이 두렵다...희토류 무기화 '초크포인트' 주목 흥미로운 것은 미국 역시 더 이상 경제전쟁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달러, 금융망, 반도체 기술을 이용해 제재와 수출통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중국도 희토류와 배터리, 청정에너지 공급망을 무기화하기 시작했다. 2025년 중국이 희토류 수출통제를 강화하자 미국 자동차와 방위산업 공급망이 흔들렸다. 포드는 희토류 자석 부족으로 일부 공장의 가동을 중단했고, 방산업체들도 대체 공급원을 찾아야 했다. 경제전쟁은 이제 미국이 일방적으로 제재하고 상대국이 견디는 구조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 모두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동시에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호 취약성(mutual vulnerability)’의 시대가 된 것이다. 따라서 경제안보의 핵심은 모든 것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자급자족이 아니다. 피시먼은 중국 공급망을 100% 대체하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비싸고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필요한 것은 ‘just enough’, 즉 독점을 깨뜨릴 수 있을 정도의 대체 공급망이다. 희토류를 예로 들면 중국산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제2, 제3의 공급망만 확보해도 중국의 초크포인트는 크게 약화된다. ■ 경제전쟁의 또 다른 역설, 무기를 쓰면 무기가 약해진다 피시먼의 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 가운데 하나는 경제무기의 역설이다. 초크포인트는 사용할수록 약해진다. 미국이 달러 금융망을 반복적으로 제재 수단으로 사용하면 다른 국가들은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 한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미국이 금융제재를 실시하자 중국은 미국이 언젠가 자신에게도 같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은 이후 위안화 국제결제시스템 CIPS, 디지털 위안화(e-CNY), 중앙은행 간 디지털 결제망 mBridge 등을 발전시켰다. 아직 달러를 대체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목적도 당장 달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금융 보험망을 만드는 것이다. 유럽도 비슷하다. 디지털 유로와 ‘소버린 클라우드’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미국의 금융과 기술 인프라가 언젠가 무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경제적 강압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자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 한국에 주는 경고....핵심은 자급자족이 아니라 복원력 피시먼의 분석을 한국에 적용하면 상당히 불편한 현실이 드러난다. 한국은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이지만 동시에 여러 초크포인트에 노출된 국가다.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핵심광물과 희토류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으며, 첨단 반도체 장비와 설계 생태계에서는 미국 및 미국 동맹국 기술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미·중 경제전쟁이 격화되면 한국은 어느 한쪽의 압박만 받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각각 장악한 서로 다른 초크포인트 사이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대응은 모든 것을 국산화하는 ‘경제안보 만능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선 우리의 취약성을 정확히 지도화해야 한다. 희토류·핵심광물·에너지·반도체 장비·배터리 소재·의약품·클라우드 등에서 특정 국가가 세 가지 초크포인트 조건을 충족하는지 냉정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다음 필요한 수준만큼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비축과 대체 생산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핵심은 자급자족이 아니라 복원력(resilience)이다. ■ 미국-중국 경제전쟁, ASEAN에는 위기이자 기회 ASEAN도 경제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중국은 ASEAN 최대 교역 파트너이고 미국은 중요한 수출시장과 투자·기술 파트너다. 따라서 ASEAN 국가들이 미·중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선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공급망 다변화는 ASEAN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기업들이 ‘China+1’을 추진하면서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이 새로운 생산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니켈, 베트남의 제조업 기반,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후공정, 태국의 자동차·전기차 산업 등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ASEAN도 안심할 수 없다. 중국의 중간재와 자본재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유지된다면 생산공장이 중국에서 ASEAN으로 이동해도 실질적인 공급망 의존은 그대로 남을 수 있다. 미국 또는 중국이 원산지 규정과 수출통제를 강화하면 ASEAN이 양국 경제전쟁의 우회로라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ASEAN 역시 단순한 ‘China+1 생산기지’를 넘어 공급망 자체의 독립성과 복원력을 높여야 한다. ■ 한·ASEAN 경제안보 협력이 필요한 이유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과 ASEAN의 이해관계가 만난다. 한국은 기술과 제조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자원과 시장 다변화가 필요하다. ASEAN은 핵심광물과 성장하는 시장을 가지고 있지만 기술과 자본, 첨단 제조역량이 필요하다. 양측은 핵심광물 공동개발과 정제·가공, 배터리 공급망, 반도체 생태계, 에너지 안보, 전력망, 의약품, 식량안보 등에서 공동의 ‘경제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 특히 핵심광물은 단순히 광산을 확보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채굴→정제→소재→부품→재활용까지 이어지는 공급망을 한국과 ASEAN이 함께 구축해야 한다. 에너지에서도 LNG 공동구매와 비축, ASEAN Power Grid와 재생에너지, 원전 등 다양한 협력이 가능하다. 식량과 비료 역시 경제안보의 초크포인트라는 관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 세계화의 종말이 아니라 ‘관리된 상호의존’의 시대 피시먼은 세계경제가 완전히 탈세계화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은 1930년대처럼 각국이 제각각 장벽을 쌓는 ‘무질서한 분절(chaotic fragmentation)’이다. 그 대안으로 그는 동맹과 우호국들이 공급망과 산업정책을 조율하는 ‘조정된 분절(coordinated fragmentation)’을 제시한다. 그러나 한국과 ASEAN의 입장에서 여기에는 한 가지 고민이 추가된다. 미국 중심 블록과 중국 중심 블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경제안보의 유일한 해답일까. 오히려 중견국과 ASEAN에는 어느 한 강대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피하면서 여러 공급망을 연결하는 전략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경제전쟁 시대의 핵심 질문은 더 이상 “누구와 더 많이 교역하는가”가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을 누가 통제하고 있으며, 그것이 끊겼을 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다. 피시먼의 ‘초크포인트’론이 한국과 ASEAN에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도 여기에 있다. 미·중 경제전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모든 의존을 끊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국가도 우리의 생존을 좌우할 정도의 초크포인트를 갖지 못하도록 의존을 분산하는 것, 그리고 위기가 닥쳤을 때 대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급망과 비축, 생산능력을 평시에 준비하는 것이다. 세계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 효율성을 위해 만들어졌던 상호의존의 시대에서, 이제 세계는 복원력을 위해 상호의존을 관리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