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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아세안ABC 23] 호르무즈, 남중국해, 그리고 말라카

국제항로 자유로운 이용이라는 원칙, 항행의 자유는 흔들리고 있는가

 

 

최근 호르무즈 해협에서 벌어지는 봉쇄와 ‘역봉쇄’ 상황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질서의 근간인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 원칙을 다시 흔들고 있다.

 

이란이 통행료를 내는 선박만 통과시키겠다고 하고, 미국이 이를 군사·경제적으로 압박하는 구도는 명분을 떠나 결과적으로 동일하다. 국제항로의 자유로운 이용이라는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과 이란 모두 유엔해양법협약을 비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원칙인 항행의 자유만큼은 사실상 국제관습법으로 존중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그 최소한의 합의마저 흔들리고 있다.

 

■ 남중국해: 이미 진행된 ‘조용한 굳히기’

 

문제는 이 흐름이 남중국해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그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4.15 로이터는 위성분석업체인 '반토르'를 인용해 중국이 필리핀과 해상영유권 분쟁 중인 '스카보로 솔(Scaboroug Shoal)' 암초에 선박을 배치하고 부유식 장벽을 설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이른바 ‘9단선(U자형 9개 점을 이은 선)’을 통해 남중국해의 약 90%에 대해 역사적 권리를 권원으로 사실상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2012년 시진핑 체제 출범과 함께 이 문제는 핵심 이익(core interest)으로 격상되었고, 이후 7개 주요 암초를 매립해 인공섬을 조성하고 일부에는 활주로까지 설치했다.

 

중국의 이러한 영유권을 주장에 대해 필리핀이 제소한 상설중재재판소(PCA)는 2016년 7월 역사적 근원 및 섬의 법적 지위를 부정하면서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필리핀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은 이 판결을 지지하지만 여타 나라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며 공개적 지지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이 판결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필리핀이 주장하는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순시선 등을 파견하며 갈등을 이어왔고, 이 과정에서 물대포를 쏘는 등 위력도 행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2015년 이후 미국은 항행의 자유 작전(FONOPs)으로 대응해 왔다. 여기에 일부 미국의 동맹국들은 참여해왔지만 한국은 불참하고 있다. 우리 해군 파견 여력도 있겠지만 중국 입장 고려도 있다.우리는 항행의 자유 작전 참여외에는 남중국해 분쟁시마다 우려 표명, 평화적 해결 및 항행의 자유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트럼프 1기(2017–2020): 연평균 약 5~9회, 총 약 20회 내외 실시

 

•트럼프 2기(2025) 2회 수준(추정)

 

즉, ‘존재로서의 억지’가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다.

 

이 공백 속에서 중국은 군사화 단계를 넘어 사실상 현상 유지의 기정사실화 단계로 진입한 모습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및 인도네시아와 같은 분쟁 당사국인 아세안 국가들조차 필리핀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조용한 외교(quiet diplomacy)’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 말라카 해협: 협력으로 위험을 낮춘 사례

 

이와 대비되는 성공 사례가 바로 말라카 해협이다.

 

한때 이 해협은 해적 활동이 빈번해, 중동산 원유와 동북아 수출입 물류의 최대 리스크 요인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소다자 협력 모델이 작동하면서 상황은 크게 개선되었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3국의 해상·공중 공동 감시

 

•2007년 출범한 싱가폴 사무국이 있는 아시아해적퇴치기구(ReCAAP)

 

•역내외 국가(한·중·일, 인도, 중동 국가 등)의 정보 공유 및 재정 참여

 

그 결과, 말라카 해협의 해적 사건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이는 해양 안보가 특정 국가의 힘이 아니라 협력적 거버넌스로 관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 주는 함의: 호르무즈보다 더 큰 리스크

 

한국의 시각에서 보면, 남중국해는 단순한 분쟁지역이 아니다. 한국 수출입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통과하고,

에너지·원자재·중간재 공급망의 핵심 통로이다.

 

만약 어느 날 중국이 남중국해를 사실상 영해처럼 취급하며 통항을 제한한다면, 그 충격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못지않거나 오히려 더 클 수 있다.

 

‘말라카 모델’을 남중국해에 적용하면 어떨까.

해법은 이미 동남아에 존재한다.

 

남중국해에서도 말라카에서 시행중인 다음과 같은 접근이 필요하다.

 

•분쟁 당사국 간 해상·공중 감시 협력체 구축

 

•아세안 중심의 다자 해양 협의체 확대

 

•한·중·일 및 역외 국가 참여 구조 설계

 

•사전적 위기관리(Preventive Governance) 체계 구축

 

즉, 특정 국가의 일방적 통제 이전에

다자 협력으로 ‘봉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 바다는 연결의 공간인가, 통제의 공간인가

 

호르무즈에서 시작된 항행의 자유 훼손은 남중국해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말라카 해협은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바다는 원래 연결의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그것을 다시 통제의 공간으로 바꾸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다.

 

한국을 포함한 해양국가들에게 선택은 분명하다.

힘의 균형에만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협력의 질서를 설계할 것인가.

 

그 해답은 이미 동남아의 바다 위에 떠 있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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