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라(Ermera)의 새벽은 커피 향으로 시작된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등성이에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무렵, 농부들은 이미 붉게 익은 커피 체리를 손으로 하나씩 따고 있다. 농약도 없고, 비료도 없다. 수십 년 된 커피나무가 야생에 가깝게 자란 숲 속에서, 인간의 손길은 수확의 순간에 닿는다. 이 장면은 소순다 열도 동쪽 끝, 인구 약 142만명의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의 현재다.
동티모르 커피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글로벌 커피 기업들과 세계 각지의 스페셜티 로스터들이 오래전부터 이곳 원두를 수입해왔음에도, 이 나라 이름은 커피 산지로서 좀처럼 대중에게 각인되지 않았다. 잘 보관된 커피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동티모르의 커피 역사는 19세기 포르투갈 식민 통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주요 수출품이던 백단향 자원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갈되자, 포르투갈은 대체 작물을 모색했다. 옥수수와 사탕수수를 비롯한 여러 작물을 시도했지만, 척박한 고산 토양에서 끝내 살아남은 것은 커피뿐이었다.
특히 수도 딜리 남서쪽에 위치한 에르메라 지구가 커피 재배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서늘한 고지대 기후, 화산성 토양, 풍부한 강수량이 아라비카 재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다. 1860년대 아폰수 드 카스트루 총독 시기부터 커피는 식민지 주력 수출품으로 자리 잡았고, 1860년대 중반에는 이미 총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오늘날에도 에르메라는 동티모르 전체 커피 생산량의 약 절반을 담당한다.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과 그 이후 이어진 혼란의 시기에도 커피나무는 묵묵히 자랐다. 전쟁과 방치 속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세월이 길어졌고, 그 역설적인 무관심이 커피를 완전한 유기농으로 만들었다.
동티모르 커피에 관해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다. 이 이야기는 현대 커피 산업 전체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1927년, 에르메라의 커피 농장에서 포르투갈 농장주들은 이상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당시 실론과 자바, 수마트라 등 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아프리카로 번져가던 커피 녹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멀쩡히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이 나무는 1917년에 조성된 티피카 아라비카 농장 안에서 홀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른 뒤 1955년, 종자가 처음으로 포르투갈의 커피녹병연구소로 송부되어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 나무는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종간 교배종임이 밝혀졌다. 아라비카는 44개 염색체, 로부스타는 22개 염색체로 본래 자연 교배가 극히 어려운 조합이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두 지 티모르', 약칭 HdT의 기원이다. 원본 식물은 'HT CIFC 4106'으로 등록되어 지금까지 세포유전학적 연구의 원점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12년 9월 29일, 티모르국립대학과 포르투갈 에보라대학 공동조사단이 에르메라 파투베시 마타 노바 지역에서 원목이 여전히 생존해 있음을 확인했다.
HdT는 이후 CIFC를 통해 세계 각국의 연구소로 퍼져나갔다. 포르투갈이 본격적으로 HdT 종자를 전 세계에 배포한 것은 1965년부터였다. 2024년 4월, 동티모르커피협회 부회장이자 티모르 글로벌 농업사업 프로그램 매니저인 아폰수 올리베이라는 포르투갈 통신사 루사(Lusa)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1900년대 초 전 세계의 커피가 괴멸당하고 있었다. 녹병에 감염된 아라비카는 죽어갔고, 그 부드러운 풍미는 곰팡이 질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1927년 티모르에서 발견된 이 자연 교배종이 "세계의 커피를 구한 역사적 유산이며, 현재 50개국 이상에 재배되고 있다"고 강조하며, 동티모르 커피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또한 "에르메라의 원목은 2016년에 고사했으나, 그 뿌리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고 있으며, 1세대 표본은 포르투갈 오에이라스의 CIFC 연구센터에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HdT는 전 세계에서 재배되는 녹병 저항성 아라비카 품종의 약 99%에 대한 유전적 조상이다. 커티모르, 사르치모르,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95, 케냐 루이루 11 — 오늘날 중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널리 재배되는 상업용 품종들이 모두 이 나무의 후손이다.
에르메라의 그 한 그루 커피나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글로벌 커피 산업은 녹병 앞에서 훨씬 더 큰 위기를 맞았을지 모른다. 세계 커피 생산의 유전적 방어막을 제공한 나라가 바로 동티모르다.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어도.
수확철에 에르메라를 찾은 적이 있다. 커피 체리를 하나하나 손으로 따고 있는 농부 곁에 서서, 필자는 무심한 척 물어봤다. "마지막으로 커피에 농약을 치신 게 언제예요?" 농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골몰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했다. "한… 10년 전이요."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유기농이 원래부터 당연한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10년 전에는 농약을 쳤다는 말이 아닌가.
바로 물었다. "그럼 그 이후엔 왜 안 치셨어요?" 그러자 진짜 이야기가 나왔다. 주변에서 농약을 치면 수확량도 늘고 좋다는 말에 한번 해봤는데, 막상 그 커피가 판매 과정에서 결격 사유가 됐다는 것이다. 제값도 받지 못하고 팔기도 힘들었다. 그 이후로는 절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커피 농부들도 모두 마찬가지라고.
이 짧은 대화가 동티모르 유기농 커피의 본질을 꿰뚫었다. 농약을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시장이 직접 가르쳐준 것이다. 한 번의 뼈아픈 실패가 농촌 공동체 전체를 유기농으로 묶어두는 강력한 규범이 됐다.
그 경험이 쌓이면서 역설적인 결과가 만들어졌다.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기농 커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동티모르 커피는 별다른 전환 작업 없이 유기농 인증이 가능한 상태였다. 토양을 수년간 화학물질로부터 해방시키는 고통스러운 전환 기간 없이, 이미 처음부터 유기농이었던 것이다.
공정무역 인증도 뒤따랐다. 1994년 미국 NCBA CLUSA의 지원으로 450명의 농민이 모여 설립된 동티모르커피협동조합 CCT는 오늘날 약 2만 8000명의 농가 회원을 거느린 동티모르 주요 농업 협동조합이자 단일 원산지 유기농 아라비카 공급 협동조합 중 하나로 성장했다.
스타벅스는 1996년 데이브 올슨의 첫 구매 이후 CCT와 소싱 관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동티모르 세척 아라비카의 대부분을 구매한다. CCT가 생산한 커피는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일본, 유럽 시장으로 향하며, 그중 일부는 2017년 출시된 "스타벅스 리저브 이스트 티모르 피베리"와 "이스트 티모르 타타마이라우" 같은 프리미엄 라인으로 소개되어 세계인의 잔에 담긴다.
동티모르 커피 농가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스페셜티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는 원두를 직접 따는 농부들이 정작 그 수익을 충분히 가져가지 못하는 구조가 오래 지속됐다. 가공 시설의 부재, 수출 인프라의 취약함, 중간 유통 과정에서의 가치 손실이 겹쳤다. 현재 동티모르의 평균 커피 수확량은 헥타르당 150~200kg 수준으로, 동남아시아 평균의 21%, 생산성 높은 농장의 10%에 머문다.
이 구조의 양 끝을 동시에 경험한 적이 있다. 한국에 귀국한 뒤, 서울의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에서 동티모르 커피를 주문했다. 리저브 매장은 스타벅스의 상위 컨셉으로, 전 세계 소량 생산 희귀 원두만을 엄선해 클로버 머신이나 사이폰, 핸드드립 등 다양한 프리미엄 추출 방식으로 제공한다. 인테리어부터 서비스까지, 커피 한 잔의 경험 자체를 파인다이닝처럼 설계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마신 동티모르 커피는 고급스러운 잔에 담겨 나왔고, 가격은 그에 걸맞게 상당했다.
그 커피를 마시며 에르메라가 떠올랐다. 동티모르의 한 호텔에서 마셨던 커피는 단돈 2달러였다. 같은 땅에서 자란, 어쩌면 같은 농부의 손을 거쳤을 그 커피가, 서울의 리저브 매장에 오면 몇 배의 가격이 된다. 그 차이가 바로 커피 산업의 구조다. 품질의 차이라기보다는, 브랜드·물류·공간·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가치의 이동이다. 커피를 재배하는 농부가 자신이 키운 커피를 사 마실 여유가 없는 모순은, 동티모르만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 나라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후변화는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했다. 강수 패턴이 불규칙해지고 기온이 오르면서, 전통적으로 커피 재배에 이상적이던 에르메라 고지대의 미기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2025년 1분기 커피 수출량은 약 96톤으로, 2024년 동기간 558톤에 비해 급감했다. 기후 변동성과 고령화된 커피나무, 가공 인프라 부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에 대응해 동티모르 정부는 아시아개발은행, 커피품질연구소, 동티모르커피협회의 지원을 받아 2019년 '국가 커피 부문 개발 계획 2019~2030'을 수립했다. 노후화된 1만 8000헥타르의 농장을 재조성하고, 기후 적응성이 높은 아라비카 신품종을 도입하며, 헥타르당 생산성을 10년 내 600kg까지 끌어올려 2030년까지 커피 생산량과 농가 소득을 모두 두 배로 확대한다는 목표다. 동시에 커피 수출액 270% 증가를 기대하고 있다. 목표는 야심차다. 그러나 이를 실현할 투자와 기술 이전이 얼마나 속도를 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또한 오랫동안 유기농으로 운영됐던 동티모르 커피는, 전 세계 유기농 커피 공급이 늘어나면서 '유기농'이라는 프리미엄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스페셜티 커피로의 고부가가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농가 차원의 품질 관리와 트레이서빌리티, 즉 추적 가능성 구현에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커피 한 잔은 언제나 어딘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티모르 커피를 마신다면, 그 잔 안에는 포르투갈 식민기로부터 이어진 긴 역사와, 전 세계 커피 품종의 유전적 운명을 바꾼 에르메라 산기슭의 한 그루 나무, 그리고 아직도 새벽 안개 속에서 손으로 열매를 따는 농부들의 시간이 녹아 있다. 세계가 이 이름을 모른다면, 우리가 아직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까닭일 터이다.
1인당 연간 400잔 이상을 소비하는 커피 강국 한국이, 2024년 미국 농무부 통계로는 416잔에 달하는 그 방대한 수요가 어디서 오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할 때 공정무역과 유기농의 라벨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연대가 시작된다.
에르메라의 새벽은 오늘도 커피 향으로 시작된다. 그 향이 언젠가 한국의 아침에도 제 이름으로 와닿기를.
최창원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