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아세안은 이미 에너지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중동에서 들어온 원유를 한국 정유사가 고도 정제해 휘발유-경유-항공유로 만들고, 이를 동남아로 수출하는 구조는 일상적인 경제 흐름이 되었다.
실제로 한국은 연간 수백억 달러 규모의 석유제품을 수출하는 정유 강국이며, 그 주요 시장 중 하나가 아세안이다.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은 한국 정유제품의 안정적인 수요처다. 이 점에서 한국과 아세안은 이미 하나의 에너지 가치사슬 안에 있다.
그러나 지금 이 구조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 봉쇄 상황은 이 공급망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논의되던 리스크가 현실이 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과 아세안의 에너지 공급망은 이미 연결되어 있지만, 그 연결이 동일한 병목(초크포인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동 원유는 호르무즈를 지나 인도양을 거쳐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 동북아와 동남아로 이동한다.
즉 지금의 공급망은 시장 기반 ‘공동 번영 구조’인 동시에 ‘공동 취약 구조’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한국의 원유 도입이 줄어들고 정유 생산이 감소하면, 아세안으로의 석유제품 수출도 줄어든다. 결국 한국과 아세안이 동시에 충격을 받는다. 지금의 공급망은 평시에는 효율적이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충격을 증폭시키는 구조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현재 한국–아세안 에너지 공급망은 ‘상업 네트워크’일 뿐, ‘안보 체계’는 아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공급 확대가 아니라 공급망의 성격 전환이다. 평시 기업 작동 원리인 단순 효율성(efficiency)에만 머물어선 안되고 상시 위기에 맞게 복원력(resilience)을 중시해야 한다. 안보가 경제를 압도하는 시대엔 과거 초세계화 시대에 경제가 안보를 압도하던 때와 다르게 기업이나 정부의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첫째, 공동 비축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비축 역량과 아세안의 수요를 연결해 위기 시 상호 지원이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 위기 시 우선 공급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한다. 평시 계약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서 자동으로 작동하는 공급 보장 체계가 필요하다.
셋째, 공급선 다변화를 가속화해야 한다. 중동 의존도를 줄이고 미국, 아프리카, 호주 등 다양한 공급원을 공동 활용해야 한다.
넷째, 해상 에너지 루트 공동 관리가 필수다. 호르무즈에서 말라카로 이어지는 항로는 단순한 물류 경로가 아니라 아시아 경제의 생명선이다. 정보 공유, 보험 대응, 해상 안전 협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을 제도화할 수 있는 현실적 플랫폼이 바로 ASEAN+3(한중일)이다. 이미 정상회의부터 실무 협의까지 갖춘 구조를 보유하고 있으며, 금융위기 대응 경험도 있다. 이를 에너지 안보 협력으로 확장한다면 아시아 차원의 대응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미 아세안+3(한중일)은 경제와 금융위기시 통화스왑을 통해 치앙마이이니셔티브다자화(CMIM)과 비상식량비축제도(APTEER)를 통한 식량안보 분야에서 성공한 경험이 있다.
이제 에너지안보 분야에서 성과를 만들 때다. 과거 미국이 없는 아세안+3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트럼프가 호르무즈 해협 이슈관련 여타국들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한 바도 있는만큼 미국이 빠진 아세안+3 협의체를 통한 유사 국가간 에너지안보 협의체 운영은 미국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아세안+3 협의체 중 기존 아세안+3에너지장관회의를 중심으로 아세안과 걸프협력위(GCC) 협의체와 인도, 호주 등 관련국도 어떤식으로든 참여시켜 개방형 에너지안보 플랫폼을 설계해도 좋다고 본다.
한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한국은 자원 보유국은 아니지만, 정유·LNG·조선·배터리·원전 등 에너지 전반의 산업 역량을 갖춘 국가다. 특히 중동 원유를 가공해 재수출하는 구조는 한국을 ‘에너지 가공·재분배 허브’로 만든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아세안과 연결된 에너지 완충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잠재력이다.
결국 지금의 상황은 질문을 바꾼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함께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다.
호르무즈 봉쇄는 일시적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낸 구조적 취약성은 일시적이지 않다. 이제 한국과 아세안은 선택해야 한다. 시장 중심의 연결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위기에 대응하는 공동의 에너지 안보 체계를 구축할 것인가.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