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어느 오후, 딜리의 한 식당. 옆자리 끝에 무심코 놓여 있던 작은 브로셔 하나가 필자의 시선을 잡았다. 표지에 박힌 글자는 단 한 줄이었다. “왜 쿠바의 의료서비스가 강한가?” 발행은 라오 하무툭(La'o Hamutuk). 테툼어로 ‘함께 걷는다’는 뜻을 가진 이 작은 싱크탱크는, 정부와 국제기구의 개발 사업을 가장 매섭게 감시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NGO(비정부 기구, nongovernmental organization)가 ‘사회주의 섬나라의 의료를 왜 강한가’라고 묻고 있었다. 식당 천장 선풍기가 한 박자 늦게 도는 소리를 들으며, 표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본 기억이 있다. 이 질문의 답을 만나려면, 딜리에서 차로 다섯 시간 떨어진 산 너머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야기는 2003년 2월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시작된다. 비동맹정상회의(NAM)의 한 조용한 회담장에서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과 피델 카스트로의 사절이 마주 앉아 의료 협력의 큰 틀을 합의했다. 그 합의의 결과가 동티모르 산골 마을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봄이었다.
2004년 4월, 에르메라의 한 마을. 가까운 보건소까지 걸어서 한나절이 걸리던 그곳에 흰 가운을 입은 낯선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영어도, 포르투갈어도, 테툼어도 서툴렀다. 그의 모국어는 스페인어였다. 카리브해에서 1만 8000킬로미터를 날아온 사람이었다. 첫 의료단은 의사와 보건기술자를 합쳐 180여 명. 마을 주민들이 처음 만난 ‘의사’는 그렇게 카리브의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1999년 유혈사태로 도시 인프라의 80%가 파괴되고 의료 서비스의 70%가 마비된 직후, 인구 94만 명의 신생국에 남은 의사는 35명 안팎이었다. 인도네시아 점령 24년이 의료인력을 빼갔고, 1999년의 학살이 남은 자들마저 흩어놓았다. 영아 1,000명 가운데 83명이 첫 돌을 보지 못하던 시기였다. WHO와 세계은행이 손을 내밀었지만, 산골 보건소의 빈 의자를 채울 인력은 어디서도 오지 않았다. 그 의자에 처음 앉은 사람은 카리브해에서 온 사람이었다.
2005년 12월, 알카티리 총리가 아바나를 방문한 자리에서 카스트로는 두 가지를 약속했다. ‘의료진 300명을 상시로 보내겠다’. 그리고 ‘동티모르 청년 1,000명에게 의대 무상 장학금을 주겠다’. 학비, 기숙사비, 매달의 용돈까지 쿠바가 댔다. 인구 1,000명당 의사 한 명이라는 비율이 그 자리에서 그어졌다.
이듬해부터 딜리 공항에서 아바나행 연결편을 타는 청년들이 생겨났다. 라우템의 한 가족은 아들의 여권을 받아 들고 처음으로 비행기 안을 들여다봤다. 6년 뒤 돌아온 아들은 가운을 입고 보보나로 보건소의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2010년부터 2013년 사이,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ELAM)과 동티모르국립대(UNTL)에서 양성된 의사들이 본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2012년 11월에는 한 번에 406명이 졸업했다. 2017년까지 1,100명이 넘었다. 라오 하무툭의 브로셔가 그 격류의 한가운데에서 발간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브로셔의 답은 단순했다. 쿠바는 한 사람을 1년 돌보는 데 미국의 10분의 1에 못 미치는 비용을 쓴다. 그런데도 영아사망률은 미국보다 낮다. 그 차이는 비싼 장비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새벽 다섯 시 마을을 도는 가정방문, 산모의 손목을 짚는 매주의 산전관리,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외우는 마을 의사에게서 온다. 미국의 봉쇄 60년이 쿠바를 의약품 부족으로 몰아넣었고, 그 결핍이 1990년대 중반 침술과 약초와 동종요법을 전통-자연의학(Medicina Natural y Tradicional)이라는 이름으로 보건부 처방 체계 안으로 정식 끌어들이게 했다.
비싼 의료가 아니라 가까운 의료, 첨단이 아니라 손에 닿는 의료. 동티모르의 흙길 위에 그대로 옮겨놓을 수 있는 의료. 라오 하무툭은 거기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2004년 4월부터 2008년 중반까지 쿠바 의료여단이 수행한 진료는 누적 270만 건. 인구 100만명의 나라에서 한 사람이 평균 두 차례 이상 카리브의 억양을 만난 셈이다. 영아사망률은 2005~2010년 1,000명당 45명까지 내려갔다. 십 년 전의 절반이었다.
물론 이 그림이 한쪽에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일부 분석가들은 쿠바의 의료 파견을 ‘외교적 고립을 우회하기 위한 공공외교’로 읽어왔다. 미국의 봉쇄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정치적 압박 속에서, 쿠바는 자국의 가장 풍부한 자원인 의사를 외교 통화(通貨)로 환전해 왔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쿠바는 같은 시기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아프리카 39개국에 의료진을 보냈다. 2005년 9월에는 재난 전담 부대인 ‘헨리 리브 여단(Brigada Henry Reeve)’을 창설해 2010년 아이티 지진 현장으로 1,500명 이상을 투입했다. 동티모르는 그 거대한 의료 외교 네트워크의 한 점이었다. 슈바이처라는 표현이 다소 과장으로 들릴 수 있는 이유다.
아프리카 람바레네의 슈바이처는 한 사람의 신앙에서 출발했지만, 카리브의 의사들은 한 국가의 전략에서 시작해 한 세대의 헌신으로 이어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쩌면 쿠바는 봉쇄와 고립이라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 택할 수 있는 인간적인 형태의 공공외교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기를 파는 외교가 있고, 차관을 푸는 외교가 있고, 정보기관을 심는 외교가 있다. 그리고 산골 보건소의 빈 의자에 의사 한 명을 앉히는 외교가 있다. 동기가 어떻든, 그 의자에 앉은 사람이 환자를 보았다는 사실은 남는다.
필자도 한때 그 의자의 환자였다. 딜리에 머물던 2022년 2월, 뎅기열에 걸려 시내의 한 병원을 찾았다. 청진기를 든 채 들어선 의사의 영어는 더듬거렸고, 가운 안쪽에서 스페인어의 억양이 새어나왔다. 그가 짚어준 맥, 그가 적어준 짧은 처방, 며칠 뒤 다시 와보라며 건넨 한 마디. 그 며칠 사이 열이 내렸다.
그가 어느 산골에서 임기를 시작해 어느 항공편으로 카리브해로 돌아갔는지 나는 모른다. 그날 그 의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가슴팍의 이름표 옆에 박혀 있던 닥토르(Doctor)라는 글자를, 그리고 그가 진료실 문을 닫고 나가던 흰 가운의 뒷모습을 기억할 뿐이다. 그가 떠난 진료실의 의자에는 곧 또 다른 닥토르가 와서 앉았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람이 왔을 것이다. 2004년 봄에 처음 채워진 그 의자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 비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22년이 흘렀다. 2025년 10월 26일, 쿠알라룸푸르. 카스트로의 사절과 구스마오 대통령이 의료 협력의 첫 합의를 맺었던 바로 그 도시에서, 동티모르는 제47차 아세안 정상회의의 단상에 올라 11번째 정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했다.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종 이름이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더 깊게 스민다.
최창원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