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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원의 동티모르워치 22] 한-동티모르 관계는 무엇이 특별한가?

한국이 선진국으로 행동한 첫 무대...1999년 한국 외교사 새 경험과 관점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한국학센터를 출범시키고 그 발전을 도모해온 내내, 줄곧 따라다닌 질문이 있다. ‘한국과 동티모르의 관계는 무엇이 특별한가.’

 

질문은 여러 갈래에서 날아왔다. 한국학을 배우러 온 동티모르 학생들이 물었고, 동티모르를 찾은 공직자-기업인-NGO 활동가들이 사석에서 넌지시, 그러나 진지하게 유사한 질문을 했다. 협력 사업을 논의하던 동티모르 정부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결이 다른 세 갈래가 끝내 같은 한 점으로 수렴했다.

 

개별적인 답은 찾기 쉬웠다. 상록수부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개발 협력, 고용허가제(EPS)를 통한 노동력 송출, 한류... 그러나 어느 하나도 양국 관계의 특수성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평화유지군을 보낸 나라는 한국 말고도 여럿이었다. ODA(공적개발원조)의 수혜국에서 공여국이 된 것도 양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EPS는 다른 동남아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제도였고, 한류는 오히려 인도네시아-필리핀-베트남에 더 깊게 스며 있었다. 오래 사색한 끝에 이제 그 답에 닿았고, 필자 나름의 답을 이 칼럼으로 적는다.

 

■ 1999년 한국인 손봉숙 유엔 ‘선거관리위원’ 참여 독립 주민투표

 

답이 닿은 자리는 1999년이었다. 그해 한국이 동티모르 한 곳에서 행한 일들이 한국 외교사에 새로운 경험과 관점을 제공했다. 그때까지 한국이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종류의 일들이자, 흔히 선진국의 몫이라 여겨온 일들이었다. 다른 어떤 수교국에서도 이만큼이 한자리에 모인 사례는 찾기 어렵다.

 

 

첫째, 한국은 한 신생국의 산파 노릇을 했다. 1948년 한국은 8개국으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감시 아래 5·10 총선거를 치러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확보한 나라다. 갓 태어나려는 나라가 스스로 선거를 관리할 역량도, 그 결과를 국제사회에 인정받을 통로도 갖지 못했을 때, 외부의 눈이 들어와 그 절차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한국은 그 산파의 손길을 받고 출발한 나라였다.

 

그로부터 51년이 흐른 1999년, 자리가 뒤바뀌었다. 인도네시아의 24년 점령을 끝낼지 묻는 동티모르 독립 주민투표가 그해 8월 유엔 관리 아래 치러졌다.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위협으로 투표일이 두 차례 미뤄지고, 투표소마다 유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선거였다.

 

그 주민투표를 관리하기 위해 유엔이 임명한 세 명의 선거 관리 위원 가운데 한 명이 한국인 손봉숙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중앙선거관리위원, 자국의 선거를 감독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한 신생국의 주권이 결정되는 자리에 유엔의 이름으로 앉았다. 8월 30일, 등록 유권자의 98%가 투표장에 나왔고, 그중 78.5%가 독립을 택했다.

 

한국인이 타국 주권의 ‘판정석’에 앉은, 알려진 첫 사례였다. 1948년 외국인 위원들이 한반도의 선거를 지켜보며 새 정부의 정통성을 보증해 주었듯, 1999년에는 한국인이 타국의 그 자리에 앉았다. 산파의 손길을 받고 태어난 나라가, 반세기 만에 다른 나라의 산파가 되어 준 순간이었다.

 

■ 김대중 대통령, 클린턴-오부치와 ‘동티모르 독립’ 3자 정상회담...다국적군 파병도

 

둘째, 한국은 다자 무대에서 한 신생국의 운명을 다루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APEC은 본래 경제 협력 포럼이어서 한 회원국의 인권·안보 위기를 정식 의제로 올리기 어려운 제도적 제약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제약을 우회해, 1999년 9월 12일 오클랜드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오부치 일본 총리와 별도의 3자 정상회담을 갖고 동티모르 사태를 정면으로 다뤘다. 그 자리에서 세 정상은 동티모르의 폭력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8월 30일 주민투표에 나타난 동티모르인의 자유의사가 완전히 존중되도록 인도네시아 정부가 즉각 조치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언론성명을 냈다.

 

김대중 정부는 이 자리에서 동티모르 독립을 지지하고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을 제안했으며, 앞서 한국군 파병 의사도 공개적으로 밝힌 터였다. 그날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을 군 철수 및 평화유지군 수용과 연계하는 결정적 압박을 가했고, 호주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함께 작용해 하비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다국적군 수용을 선언했다.

 

한국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서, 강대국이 아니면서도 신생국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파병 의사까지 먼저 내건 드문 행위자였다. 같은 달 28일 국회 본회의는 ‘국군부대의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병동의안’을 표결에 부쳤고, 160명이 투표하여 158명이 찬성했다.

 

인도네시아 거주 한국 교민의 신변 위협과 인도네시아와의 외교 관계 악화 등 만만치 않은 우려가 있었던 만큼, 그 결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의안이 통과되어 한국은 전례 없는 국제적 평화구축 행위자로 활동할 토대를 확보했다.

 

 

■ 한국, UNAMET 민간경찰 합류-상록수부대 파견 ‘유엔 깃발’ 첫 행보

 

셋째, 한국은 유엔 깃발 아래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다. 1999년 6월, 한국 경찰 5명(차경택 경정, 김충실·안정호 경위, 최규환 경사, 은요열 경장)이 유엔의 요청에 따라 동티모르 임무단(UNAMET)에 민간경찰로 합류해 독립 투표 감시에 참여했다. 한국 경찰이 유엔 깃발 아래 처음으로 국경을 넘은 순간이었다.

 

그해 10월에는 상록수부대가 동티모르 동부 로스팔로스로 떠났다. 국가기록원 기준 파병 인원은 상록수부대 436명과 유엔평화유지군사령부 참모 8명을 더해 모두 444명으로, 12개 파병국 가운데 아홉 번째 규모였다. 특전사 1개 대대를 중심으로 의료·공병 요원이 함께 편성된 부대였고, 그 안의 보병 한 개 대대가 결정적이었다.

 

국가기록원은 이를 한국이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한 역사상 최초로 보낸 보병부대로 기록한다. 베트남 파병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미국 지휘 아래 동맹의 의무였다면, 동티모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264호에 응한 자발적 응답이었다. 소말리아(1993) 이래 한국군의 PKO 참여는 줄곧 공병·의료의 지원부대로 한정되어 있었다. 동티모르에서 처음으로, 경찰과 군이 함께 유엔 깃발 아래 거드는 자리에서 행동하는 자리로 옮겨 앉았다.

 

■ 상록수부대원 다섯 명이 급류 희생, 두 나라 무게감

 

넷째, 한국은 타국의 평화를 위한 행동에 자국민의 희생까지 감수해야 했다. 2003년 3월 6일, 동티모르 서쪽 오에쿠시의 에카트 강. 시간당 수백 밀리미터의 폭우 속에서 예하 부대 발전기 수리를 위해 강을 건너던 상록수부대원 다섯 명이 급류에 휩쓸렸다.

 

다섯 명은 순직 후 전원 1계급 특진하여, 민병조·박진규 중령과 백종훈·최희·김정중 병장으로 추서되었다. 운전병이던 김정중 병장의 시신은 22년이 지난 지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PKO에서 한 사고로 가장 많은 인명을 잃은 사례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이 다른 수교국에서는 좀처럼 갖지 않은 무게가 두 나라 사이에 놓이게 된 순간이었다.

 

 

■ 박경서 WCC 아시아국장, 건국 이래 한국인에게 건국공헌 훈장 첫 수여

 

이 네 가지 국가의 행위보다 먼저 한 시민이 낸 길이 있었다. 다섯 번째이자 가장 오래된 행위다. 1984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국장이던 박경서는 독일 구호기구 ‘세계를 위한 빵’(Brot für die Welt)의 군더트(Helmut Gundert) 아시아국장 등 아홉 명과 합동 조사위원회를 꾸려 인도네시아 군정하의 동티모르에 처음 발을 디뎠다.

 

외부 관찰자의 진입이 사실상 봉쇄되어 있던 시기였다.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는 국제사회에 동티모르의 실상을 알리는 통로가 되었고, 박경서의 회고에 따르면 1990년에는 그의 주선으로 독립운동 지도자 조제 라모스-오르타가 유엔 인권위원회 무대에 섰다. 그 뒤 라모스-오르타와 벨루 주교는 1996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고, 동티모르는 2002년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2025년 11월 27일, 86세의 박경서는 라모스-오르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동티모르 국민대훈장(건국공헌)을 받았다.

 

동티모르 정부가 2002년 건국 이래 한국인에게 건국공헌 훈장을 준 첫 사례였다. 다른 네 행위가 1999년 한 해에 국가가 행한 일이라면, 박경서의 발자국은 건국 이전의 한 민간인이 낸 길이 건국 이후의 양국 관계로까지 이어진, 양국 사이에서 보기 드문 연결선이다.

 

 

■ 동티모르 전국민 63% 한국 ‘매우 신뢰한다’...호주-미국과 비슷

 

이런 특별한 관계 때문일까. 동티모르 안에서 한국의 위상은 유난히 높다. 미국 국제공화연구소(IRI)가 2023년 2~3월 동티모르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3%가 한국을 ‘매우 신뢰한다’고 답했다. 호주(68%)·미국(69%)에 바짝 다가선 수치이며, 중국(36%)을 크게 앞선다.

 

주목할 것은 신뢰의 ‘근거’다. 같은 시기 ISEAS 조사에서 동티모르인의 일본 신뢰(62.1%)가 경제력과 문화에 대한 존경에 기댄 것과 달리, 한국에 대한 신뢰는 독립 과정을 지원한 역사, 노동 이동을 통한 가계 경제 기여, 교육·문화 교류라는 ‘직접 겪은 경험’ 위에 서 있었다.

 

동티모르인들이 중국에 대해 표하는 경제적 수단의 정치적 활용이나 주권 위협이라는 우려는, 한국에 대해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호감의 크기가 아니라 호감의 뿌리가 다르다는 뜻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앞서 짚은 1999년의 자리에 가닿는다.

 

한국은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OECD 가입은 회원증이지 자격이 아니었다. 회원증은 받는 것이고, 자격은 행동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가입 이듬해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는 위치로 다시 떨어진 사실이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행동한 첫 무대는 따로 있어야 했다.

 

필자는 그 무대가 1999년 동티모르였다고 생각한다. 받았던 산파를 처음으로 되어준 일, 다자 무대에서 한 신생국의 운명에 적극 가담한 일, 동맹의 의무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으로 책임을 떠안은 일, 그 행동에 자국민의 희생까지 감수한 일,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앞서 한 시민이 길을 먼저 낸 일. 이 다섯 가지가 한꺼번에 한 자리에 모인 사례를, 적어도 필자는 한국 외교사에서 동티모르 말고는 알지 못한다. OECD가 우리에게 선진국 회원증을 줬다면, 동티모르에서의 자발적 행동이야말로 그 자격을 입증한 자리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 행동한 나라 한국, 26년간 흐른 세월 속 한국의 큰 ‘외교자산’

 

오래 묵힌 질문이 마침내 답에 닿았다. 한·동티모르 관계가 다른 어떤 수교국과도 닮지 않은 하나의 개념은, 한국이 그 신생국에서 처음으로 선진국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외교문서가 만든 관계가 아니라, 한 선거관리위원의 판정석과 한 대통령의 결단과 다섯 청년의 죽음,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앞서 한 시민이 낸 길이 차례로 새긴 자리. 그 자리에서 한국은 ‘받는 나라’에서 ‘세계의 책임을 짊어진 나라’로 자신의 좌표를 옮겼다.

 

행동했다는 것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1999년의 그 행동이 26년이 흐른 오늘까지 한국에 외교 자산으로 살아 있는 까닭은, 그것이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한국 외교의 새 좌표였기 때문이다. 동티모르가 2025년 아세안 11번째 정회원국으로 들어선 지금, 그 자산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가 한국에게 던져진 다음 질문이다.

 

한국이 ‘받는 나라’에서 ‘행동하는 나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는 반세기가 걸렸다. 한국은 제국을 경영한 적 없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드문 나라다. 식민의 기억으로 쌓은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깨끗한 출발인 동시에, 그만큼의 신뢰를 오직 행동으로만 쌓아야 한다는 더 무거운 과제이기도 하다.

 

동티모르인들에게 한국이 ‘받은 나라’가 아니라 ‘행동한 나라’로 먼저 각인된 것은 그 과제의 첫 답안이었다. 다만 첫 답안이 마지막 답안은 아니다. 동티모르에서 한국이 보인 행동들이 있었다.

 

즉, 다자 무대에서 목소리를 내고, 동맹만의 셈법이 아니라 보편의 가치로 판단하며, 받은 것을 되갚고, 그 책임의 비용까지 감수하는 일은 한 나라에만 해당하는 예외라고 보기엔 큰 자신일 것이다. 앞으로 어느 나라를 마주하든 한국이 돌아볼 만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동티모르가 아세안의 일원으로 발전하는 길에 한국이 함께 걷고, 그 첫 자리에서 보인 행동을 다른 자리에서도 잃지 않는다면, 1999년의 행동은 비로소 다음 장의 역사를 열게 될 것이다.

 

최창원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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