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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원의 동티모르워치 25] 동티모르에 ‘독서문화 정착’은 어떻게 가능할까?

포르투갈어-테툼어 공용어, 인도네시아어-영어 실무어...그 아래 19개 ‘국가어’
“무엇을, 어떤 언어로, 어떤 그릇에 담아”...한국은 이중언어사전-제도 탁월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벤치에 비스듬히 앉은 한 사내의 동상이 있다.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큰 봉우리, 횡보 염상섭이다. 그의 등 뒤 세 개의 큰 바위에는 굵은 한글이 새겨져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문장 앞을 지날 때마다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최근, 딜리에서 돌아온 뒤로는 한 가지 상상을 더하게 되었다. 만약 이 바위와 이 글귀를,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 한복판에 똑같이 세운다면 어떨까. 그곳을 지나는 동티모르 사람은 이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까. 아마도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언어로 책을 읽지?” 이 되물음 속에 동티모르 독서문화의 모든 문제가 기반이 들어 있다.

 

필자는 딜리 내 여러 도서관을 찾아본 적이 있다.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도서관은 장서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용자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책은 있는데 사람이 없는, 묘하게 적막한 공간이었다.

 

반면 시내 중심의 사나나 구스마오 독서실(Xanana Gusmão Reading Room)과 UNTL 캠퍼스 안의 ‘우마 아메리카(Uma Amerika)’는 달랐다. 학생과 청년들이 책상마다 앉아 자료를 펼치고 있었고, 공간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우마 아메리카는 2016년 주동티모르 미국대사관과 UNTL이 공동으로 문을 연 동티모르 최초의 ‘아메리칸 스페이스’로, 미국이 공공외교의 일환으로 운영하는 연구-문화-도서 공간이다.

 

같은 도시, 비슷한 거리 안의 도서관들이 어째서 이토록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가. 그 차이의 밑바닥에는, 넘어야 할 분명한 산 하나가 서 있었다. 바로 언어다. 활기가 도는 그곳에서조차, 언어 문제는 끝내 넘어야 할 산임이 명백했다.

 

우리는 흔히 독서문화를 “책을 얼마나 공급하는가”의 문제로 여긴다. 그러나 독서는 그 무엇보다 먼저 언어 행위가 아닌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된 책은, 아무리 많아도 장서 목록의 숫자일 뿐이다. 동티모르의 언어 지형은 한국인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헌법은 포르투갈어와 테툼어를 공용어로,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실무어로 규정하며, 그 아래로 16개에서 19개에 이르는 지역어가 “국가어”로 깔려 있다. 한 권의 책을 낼 때 “어떤 언어로 낼 것인가”라는 질문은, 뒤집으면 “그 책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만드는 쪽이 아니라 읽는 쪽에서 보면, 언어 선택은 곧 독서 가능성을 규정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 연구결과를 보면 “테툼어를 할 줄 아느냐”가 초기 문해 습득에 기대만큼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밝힌 점이다.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현장이 이미 다언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교사들은 테툼어로 가르치다가도 학생이 못 알아들으면 지역어로 다시 설명하고, 숫자는 인도네시아어나 포르투갈어로 센다. 정책은 테툼어 중심이지만, 살아 있는 교실은 여러 언어를 넘나들며 굴러간다. “어떤 언어로 책을 읽지?”라는 가상의 되물음이 황당한 가정은 아닌 이유이다.

 

■ 책을 담을 그릇 — 도서관과 출판, 그리고 저작권

 

언어가 첫 번째 산이라면, 두 번째 산은 책을 담을 그릇이다. 그리고 이 그릇은 세 부분이 한꺼번에 비어 있다.

 

먼저 도서관이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사나나 구스마오 독서실은 2000년 6월, 재독립 직후 키르스티 소드 구스마오(Kirsty Sword Gusmão) 여사가 19세기 포르투갈 농장회사 건물에 문을 연 곳으로, 동티모르에서 다시 운영을 시작한 최초의 공공도서관이다. 비영리 단체가 운영하며 청소년과 학생을 위한 독서 진흥 활동, 저자 행사와 전시를 이어가고 있고, 내가 목격한 대로 지금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국가도서관은 다른 상황이다. 동티모르 국립도서관은 2009년 정부 결의로 설립 근거가 마련되고 2011년 착공이 예고되었으나, 시공사가 거듭 교체되는 우여곡절 끝에 2025년 말까지도 입찰 분쟁이 이어지며 아직 완공되지 못했다. “가장 성공한 민간 도서관”과 “15년 넘게 짓지 못한 국립도서관”의 대비, 이것이 동티모르 독서 인프라의 현주소다.

 

출판 산업은 사실상의 태동기라 하겠다. 상업 출판 생태계는 사실상 부재하고, 인쇄물 대부분은 교재와 정부 문서, 그리고 국제 NGO가 보급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미비하나마 출판사의 활동이 막 시작되고 있다.

 

 

마지막 그릇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가장 근본적인 저작권이다. 다행히 동티모르는 2022년 처음으로 저작권·저작인접권법(법률 제14/2022호, 2023년 시행)을 제정해, 문학·학술·예술 저작물과 그 저자를 보호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우리나라처럼 문화 주무 부처가 이를 관장한다. 법의 골격은 세워진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2025년 말 현지에서는 예술가와 음악가들이 표절과 미흡한 규제, 약한 법 집행을 호소하며 실효적 보호를 촉구했다. 법은 있으나 저작물을 등록하고 권리를 집행할 실무 체계, 그리고 무엇보다 그 권리를 떠받칠 출판 생태계가 아직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한편 산업재산권을 아우르는 지식재산법안(IP Code)은 2026년 6월말 일반심의를 통과하였다. 아직 세부 심의가 남아있기는 하나 고무적 현상이다. 하지만 상표제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방향이 준비되고 있다. 요컨대 “사람이 책을 만들고” 그 책이 보호받는 선순환의 땅은, 법이라는 씨앗은 뿌려졌으나 아직 단단히 다져지지 않았다.

 

■ “공부시키면 된다”는 답의 함정

 

여기서 한국 독자에게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이 있다. “교육열 높은 한국인이 동티모르의 발전을 어디서부터 도와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적지 않은 이들이 주저없이 답한다.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면 된다.” 한강의 기적을 교육의 힘으로 일군 우리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직관이다.

 

 

이 관점을 동티모르에 그대로 투입하기에는, 먼저 넘어야 할 장벽들이 있다. 한국의 “공부시키면 된다”는 명제에는 단일한 모국어라는 거대한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는 한글이라는 하나의 문자로 읽고, 같은 언어로 시험을 치고 교과서를 본다.

 

그러나 동티모르의 아이는 집에서는 지역어를, 교실에서는 테툼어를, 교과서에서는 포르투갈어를 마주한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격려가 닿기 전에, “무슨 언어로 공부하라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먼저 가로막는 것이다.

 

가장 문해도가 높은 테툼어로 된 읽을 자료 자체가 부족하다. 그 부족한 자료를 담을 도서관과 출판·저작권의 토대마저 비어 있다면, 교육열은 쏟아부을 그릇을 찾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진다.동티모르의 발전은 “더 열심히”의 문제라기보다는 “무엇을, 어떤 언어로, 어떤 그릇에 담아”의 문제가 여전히 중요한 일인 셈이다.

 

■ 길은 있다 — 현지어 콘텐츠라는 열쇠

 

그렇다면 길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는 이미 현장이 증명하고 있다. 동티모르 현지에서 운영되는 글로벌이너피스(Global Inner Peace)는 동화를 비롯한 300여 권의 서적을 테툼어로 번역해 독서문화를 가꾸고 있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외국의 좋은 책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겨 손에 쥐여줄 때 비로소 책이 사람에게 가닿는다는 것이다. 국제 NGO들이 테툼어 아동도서를 보급하거나 현지어 콘텐츠를 태블릿에 담아 디지털 도서관을 운영해 온 시도들 역시 같은 교훈을 가리킨다. 독자가 이해하는 언어로 된 콘텐츠, 접근 가능한 매체, 그리고 그것을 운영할 지역 주체, 이 세 가지가 결합할 때 독서문화는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

 

필자가 UNTL 도서관에서 본 적막과, 사나나 구스마오 독서실에서 본 활기의 차이도 결국 여기서 갈린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장서의 양이 아니라, 그 책이 내가 이해하는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거는가의 문제가 아닌가. 이미 언어의 장벽이 기술로 해결되는 시대에 들어선 세계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는 현상은 아직 동티모르에서 일어나진 못하고 있다.

 

 

■ 한국이 놓을 수 있는 다리

 

여기서 한국의 역량을 검토해 보자. 한국은 마침 동티모르의 가장 깊은 두 병목, 즉 언어 자원과 제도 역량 그 양쪽에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언어 자원 측면에서, 이미 사전학적인 미시구조를 갖춘 최초의 이중언어사전, 테툼어-한국어 및 한국어-테툼어 사전이 편찬되었고, 이는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번역과 출판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뜻이며, 글로벌이너피스의 번역 사업이 보여주듯 “현지어 콘텐츠 생산”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작업에 한국이 실질적 자산을 보태고 있다는 의미다.

 

제도 역량 측면도 시의적절하다. 2026년 한국발명진흥회(지식재산처 산하)는 우리나라 지식재산 경험과 노하우 전수를 위해 동티모르 국가지식재산기관을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출원·심사·등록·공고에 이르는 표준운영절차를 마련하고, 지식재산 상담 헬프데스크를 구축하며, 현지 인력의 역량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마침 동티모르가 지식재산법안의 통과와 상표제도 도입을 눈앞에 두고 실무 기반을 채워야 하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이 협력은 제도의 빈 골격에 살을 붙이는 일과 맞물린다. 책을 짓는 일(언어 자원)과 그 책을 담을 제도를 짓는 일(지식재산 체계)이 이렇게 한 시기에 만나고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그 문장을 딜리 한복판의 바위에 새겨 세운다면, 동티모르 사람이 되물어 올 “어떤 언어로 책을 읽지?” 라는 질문. 필자는 이 되물음이야말로 동티모르 독서문화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이 정확해야 답도 정확해지기 때문이다. 그 답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된 자료를 만들고, 그것을 담을 도서관과 저작권 제도를 함께 세우는 일, 언어와 제도를 동시에 짓는 일이다. 언젠가 딜리의 광장에 그 바위가 선다면, 그 곁에 한 줄을 더 새기고 싶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그 책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여야 한다.” 언어라는 산은 높지만 넘지 못할 산이 어디 있겠나?

 

글쓴이=최창원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이사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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