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도이머이를 천명한 지 40주년을 맞는 해다. 베트남은 20세기 중후반의 상당 기간을 프랑스, 미국, 크메르 루주 및 중국과의 전쟁과 분쟁 속에서 보냈다. 궁핍의 끝에서 몸부림친 베트남은 개혁 개방을 선언하고 세계에 문을 열었다.
세계은행의 명목 달러 기준 통계에 따르면, 베트남의 1인당 GDP는 1986년 436달러에서 2025년 5,066달러로 약 11.6배 증가했다. 다만 이 비교에는 물가와 환율 변동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눈부신 성장 배경에는 ‘도이머이’ 정책이라는 성공적 실천이 있었다.
1986년 12월 베트남 공산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 토지·공장·생산·유통을 국가가 일원적으로 통제하던 기존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여러 경제 부문의 활동을 인정하고, 시장이 상품의 가격과 유통을 일정 부분 조절하도록 허용했다. 베트남은 이 정책을 ‘도이머이’, 즉 ‘쇄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도이머이는 어느 날 갑자기 결정된 정책이 아니었다. 지방과 기업이 생존을 위해 먼저 기존 규정을 우회했고, 일부 지도자들이 그 현실을 중앙에 전달했으며, 쯔엉찡(Trường Chinh)을 비롯한 당 원로들이 자신의 오랜 신념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당의 공식 노선이 될 수 있었다.
도이머이 선언 과정에서 베트남 지도부의 역할과 활동에 관한 내용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후이득이 쓴 『승리측』에는 도이머이 노선이 공식화되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글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승리측』 도이머이 노선 공식화 과정 서술, “현실에서 먼저 시작된 개혁”
통일 이후 베트남은 북부에서 시행하던 중앙계획경제와 배급제를 남부 전역으로 확대했다. 국가는 기업의 생산량과 가격을 정하고 원료와 생활필수품을 배급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산계획만 내려보낼 뿐 공장에 필요한 원료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했다. 노동자의 임금과 배급품도 한 달 생활을 보장하지 못했다. 기업들은 국가의 규정을 그대로 따르면 생산을 중단해야 했고, 규정을 어기면 감사를 받거나 처벌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모순을 잘 보여 주는 것이 1984년 프억롱 방직회사에서 열린 섬유업계 회의의 일화다. 한 참석자가 기업들이 두 개의 회계장부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자, 섬유산업 책임자 부이반롱(Bùi Văn Long)은 이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하나는 국가가 정한 가격으로 작성하는 장부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시장가격으로 작성하는 장부라고 설명했다. 국가 가격으로 만든 장부는 “합법적이지만 합리적이지 않았고”, 시장가격으로 만든 장부는 “합리적이지만 합법적이지 않았다.” 합법적인 장부는 상부에 보고하기 위한 것이고, 합리적인 장부는 실제로 공장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대나무 한 그루의 시장가격은 1.5동이었지만 국가가 인정하는 가격은 1동에 불과했다. 기업은 실제 가격을 지급하고도 장부상으로는 이를 처리할 수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대나무 한 그루를 산 뒤 가운데를 잘라 두 그루를 산 것처럼 기록해야 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지키기 위해 현실을 왜곡해야 하는 역설이 벌어진 것이다.
호찌민시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업이 시장에서 직접 원료를 사고 제품을 판매하거나, 생산성과 이익에 따라 노동자에게 보상하는 방식이 나타났다. 중앙정부의 규정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이를 ‘울타리 허물기(xé rào)’라고 불렀다.
보반끼엣(Võ Văn Kiệt)과 응웬반링(Nguyễn Văn Linh) 등 남부 지도자들은 이를 단순한 규율 위반이 아니라 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았다. 그러나 중앙의 일부 지도자들은 호찌민시를 ‘반동적’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이러한 움직임에 적대적이었다. 이에 보반끼엣은 중앙 지도자들을 직접 생산 현장으로 초청해 과거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경제를 운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는 전략을 택했다.
■ ‘도이머이’ 과정 가장 중요한 인물 ‘쯔엉찡’의 변화와 달랏회의
도이머이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쯔엉찡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집단화와 중앙계획경제를 옹호한 공산당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처음에는 농촌의 도급제와 기업의 자율적 활동에도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983년부터 중부고원과 남부의 농촌·공장·기업을 직접 방문하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부고원을 방문한 쯔엉찡은 공식 보고와 현실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문서에는 주민 대부분이 생산집단이나 협동조합에 가입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협동조합(합작사)은 형식적으로만 운영되고 있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이동식 화전농업을 했고, 협동조합은 노동량이나 생산성을 계산하지 못한 채 생산물을 균등하게 나누었다.
쯔엉찡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정치국과 중앙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냐”라고 묻자, 지방 당서기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후 쯔엉찡은 정치국 회의에서 “거짓말이 만연해 있는데도 모두가 아무도 거짓말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1983년 달랏에서 열린 회의는 그의 변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호찌민시의 공장장과 경제 담당자들은 쯔엉찡, 팜반동(Phạm Văn Đồng) 등 원로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을 직접 설명했다. 한 담배공장장은 지도자들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국가는 생산계획을 내려보내면서 원료는 공급하지 않았고, 공장장이 직접 원료를 구해 계획을 달성하면 격려하기는커녕 감사를 하거나 체포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쯔엉찡은 ‘울타리 허물기’가 사회주의를 파괴하려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공장과 노동자를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실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장장들에게 어려움을 두려워하거나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잘못이 있다면 고치면 된다고 말했다.
■ “이론에 현실을 억지로 맞추기보다 현실을 직시하라”
쯔엉찡의 변화에는 새로운 보좌진과 연구자들의 역할도 컸다. 그는 당 조직이 배정해 주는 순응적인 관료 대신 하응히엡(Hà Nghiệp), 쩐념(Trần Nhâm), 다오쑤언섬(Đào Xuân Sâm), 즈엉푸히엡(Dương Phú Hiệp) 등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학자와 전문가들을 직접 선택했다.
쯔엉찡은 이들에게 외부에서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의견도 연구팀 안에서는 솔직하게 말하라고 요구했다. 자신은 그 의견을 정치국에 전달할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그는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먼저 내세우기보다 전문가들의 말을 듣고 질문하고 기록했다. 기존의 이론에 현실을 억지로 맞추기보다, 현실을 통해 이론과 정책을 다시 검토하려 한 것이다.
그는 공식 보고서뿐 아니라 국민 사이에 퍼지는 풍자와 농담도 수집하게 했다. 당시 주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 식량과 생필품은 부족했고, 도시의 공무원과 교수들조차 아파트에서 돼지나 물고기를 길러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하노이의 한 공동주택 2층에서 돼지를 기르던 반느끄엉(Văn Như Cương) 교수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찾아온 행정기관 직원들은 조서에 “반느끄엉 교수가 2층에서 돼지를 기르고 있음”이라고 기록했다. 교수는 잘못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서명하기 전에 문장을 다음과 같이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돼지가 2층에서 반느끄엉 교수를 먹여 살리고 있음.”
이 농담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국가가 교육자와 공무원에게 최소한의 생활도 보장하지 못해, 사람들이 본업보다 부업과 비공식 경제에 의존해야 했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었다.
■ NEP서 찾은 ‘시장을 인정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논리’ 설파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시장과 사적 경제를 인정하는 정책이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론적 설명이 필요했다. 당시 베트남 간부들은 스탈린식 계획경제를 사회주의의 유일한 모델로 배워 왔다. 중국에서는 이미 덩샤오핑이 개혁을 시작했지만, 베트남과 중국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사례를 공개적으로 따르기는 어려웠다.
쯔엉찡의 연구팀은 대신 레닌의 신경제정책, 즉 NEP에서 근거를 찾았다. 러시아의 전시공산주의가 실패하자 레닌이 상품생산과 개인경제, 사적 자본과 외국자본을 제한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상품경제와 시장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사회주의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1984년 베트남 공산당 제5기 중앙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쯔엉찡은 지도자들에게 “경제생활의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그는 당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장가격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정한 낮은 가격과 실제 시장가격의 차이 때문에 기업과 주민들은 거짓 보고와 불법 거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동자의 임금이 배급품을 포함해도 한 달 중 열흘 정도의 생활비밖에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스무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또한 “국가는 기업과 주민의 사소한 활동까지 직접 통제하느라 정작 국가 경제의 방향을 설계하고 조정할 능력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쯔엉찡은 ‘관료주의·배급제·보수주의·침체’가 지방과 기업의 자율적인 규정 위반보다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 연설은 중앙위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관료적 배급제를 폐지하고 가격·임금·통화체제를 현실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당내에서 힘을 얻었다.
■ ‘가격·임금·통화 개혁’ 한꺼번에 시행 ‘1985년 개혁의 실패’
그러나 도이머이로 가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985년 지도부는 가격을 현실화하고, 현물 배급을 화폐임금으로 전환하며, 통화를 교환하는 ‘가격·임금·통화 개혁’을 한꺼번에 시행했다.
문제는 상품 공급과 국가재정, 기업관리 체제에 대한 준비 없이 가격과 임금만 크게 변경한 데 있었다. 농산물은 높은 가격으로 매입하면서 공업제품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판매했고, 국가에 충분한 재원이 없는데도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부족한 통화를 충당하기 위해 신권의 액면가를 열 배로 높여 기습적인 화폐 개혁도 시행했다.
쯔엉찡은 구권과 신권을 일정 기간 함께 유통하면서 점진적으로 교체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부 지도자들은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으며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라 내려올 수 없다”라며 계획을 강행했다. 쯔엉찡은 반대 의견을 냈지만 결국 집단 결정에 따라 국가평의회 주석으로서 화폐교환 명령에 서명했다.
결과는 심각했다. 상품은 시장에서 사라졌고 물가는 급등했으며 국민의 저축과 임금은 가치를 잃었다. 후이득이 인용한 당시 자유시장 소매가격 지수에 따르면, 1986년 가격은 전년보다 587.2퍼센트 상승했다. 국회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이 정책만큼 국민을 동요시키고 분노하게 한 일이 없다는 공개 비판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 실패는 개혁 자체를 중단시키기보다 개혁의 방향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가격과 화폐만 바꾸어서는 경제를 살릴 수 없으며, 기업의 자율권과 유통체계, 생산관계, 국가의 역할을 포함한 경제관리 체제 전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 “사회주의 질서 파괴 우려” 당내 논쟁과 도이머이의 공식화
시장과 상품경제를 인정하려는 개혁안은 당내 보수파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도므어이(Đỗ Mười), 또흐우(Tố Hữu) 등은 분권화와 자유유통이 사회주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부 소련 고문도 중앙계획과 국가 통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쯔엉찡과 개혁파는 국가가 모든 경제활동을 직접 결정하는 체제가 오히려 생산을 마비시킨다고 반박했다. 쯔엉찡은 “자본주의 발전단계는 건너뛸 수 있어도 상품생산은 건너뛸 수 없다”라고 정리했다. 상품생산과 시장은 자본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86년 7월 레주언(Lê Duẩn) 총서기가 사망하자 쯔엉찡은 30년 만에 다시 총서기가 되었다. 그는 기존의 정치보고서 작성팀을 교체하고 자신의 연구팀을 중심으로 제6차 당대회 문건을 다시 작성하게 했다.
새로운 보고서는 여러 경제 부문의 존재, 상품경제, 기업의 자율성, 경제관리 체제의 혁신을 인정했다. 또한 경제위기가 단순히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당이 장기간 주요 방침과 정책에서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좌경적·주관주의적 사고와 객관적인 경제법칙의 무시가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1986년 10월 쯔엉찡은 하노이시 당대회에서 “도이머이가 시대와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길이며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절박한 문제”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12월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이 노선은 당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 노선의 승리와 지도자의 교체...국가 생존 위한 역사적 결단
제6차 당대회를 앞두고 많은 대표는 쯔엉찡이 총서기로 계속 남아 개혁을 이끌기를 원했다. 특히 남부 대표들의 지지가 강했다. 그러나 레득토(Lê Đức Thọ)와 팜반동 등 원로들은 세대교체와 지도부의 단합을 이유로 쯔엉찡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쯔엉찡, 팜반동, 레득토는 당의 일상적인 최고지도부에서는 물러나고 중앙위원회 고문으로 남았으며, 응웬반링이 새로운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이후 응웬반링은 ‘도이머이의 총서기’로 널리 알려졌지만, 도이머이의 형성은 어느 한 사람의 업적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도이머이는 남부 지방과 기업이 생존을 위해 시작한 ‘울타리 허물기’, 보반끼엣과 응웬반링이 중앙 지도자들에게 보여 준 현장의 현실, 연구자들이 마련한 새로운 이론, 그리고 쯔엉찡이 자신의 과거 신념과 당의 오류를 인정하면서 이를 공식 정책으로 전환한 과정이 결합된 결과였다.
쯔엉찡은 처음부터 개혁을 주장한 선구자는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계획경제를 옹호했고, 실패한 1985년 화폐교환에도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그러나 기존 노선을 대표했던 최고 원로가 현실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바꾸고, 당의 장기적인 오류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결국 도이머이는 베트남 지도부가 새롭게 시장을 발견한 사건이라기보다, 국민과 지방기업의 생활 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던 경제 원리를 뒤늦게 인정하고 제도화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기존 이론에 현실을 억지로 맞추는 대신, 국가의 생존을 위해 현실에 맞게 이론과 제도를 바꾸기로 한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의 역사적 결단이었다.
글쓴이=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