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대입구역에서 자하문까지. 이 길에서는 김환기와 김광섭, 백석과 법정스님, 김정희와 조지훈 등 시인묵객과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조선 초기 누에를 처음 치기 시작했다는 ‘선잠단’도 만난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과 신윤복 화첩 등 국보급 문화재를 소유한 사립미술관 '간송미술관'도 반갑다. 성북동 천주교성당과 길상사, 한국가구박물관을 걸어올라가면 ‘북악하늘길’로 이어진다.
북악하늘길에서는 “도심인데, 일순간 숲속에 들어온 느낌”을 빠져든다. 소위 ‘북악스카이웨이’를 옆을 걷는 길이다. 이 길은 생각보다 서울시민들에게 덜 알려졌다.
북악스카이웨이는 드라이브 명소로 유명하다. 이 도로는 성북구 아리랑고개와 창의문(자하문)을 잇는다. 길 중간에 위치한 ‘북악팔각정’은 이 길의 쉼터이자 서울 시내와 평창동과 북한산을 볼 수 있는 최고 전망대다.
지난 주말 지하철 4호선 6번 출구로 나와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창작센터 앞에서 이 길을 출발했다. 동선은 한성대입구역-성북동 시인의거리-천주교성당-길상사-북악하늘길-북악팔각정-자하문이다. 거리로 10.87km, 걸음 16777보, 2시간 30분이 걸렸다.
볼 것도 많고, 쉬어가고 싶은 장소도 많고, 떠올릴 만한 사람이 많은 길이었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지만 힘들지 않고, 내리막이 있어 더 호젓했다.
■ 성북동 시인의거리에서 만나는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시인의거리’는 시와 소설, 한옥과 역사, 사찰이 한 곳에 겹치는 곳이다. 근현대 예술가들의 흔적이 살애있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 길은 성북동에 살았던 시인묵객의 자취를 기린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를 비롯,이덕무, 채제공 등이다. 1930년대 초반 이미 김기진, 김일엽 등 많은 문인들이 모여 살아 '문인촌'이라 불렸다. 이후 이태준 박태준 한용운, 해방 이후에도 조지훈 김광섭이 살았다.
1968년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로 개발로 사라지는 성북동의 자연과 인간의 삶을 노래한 ‘김광섭 시인의 집터’가 반갑다. 그리고 '문장강화'를 쓴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집필했던 한옥 ‘수연산방’도 정지용-이효석-김기림 등 문학 사랑방으로 사랑받았다. 지금은 전통찻집이 되었다.
심우장(尋牛莊, 사적 550호)은 올해 시집 ‘님의 침묵’ 초간본 출간 100주년인 만해 한용운의 저항정신을 엿볼 수 있는 집이다. 그는 조선총독부를 마주 싫다는 뜻에서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 ‘님의 침묵’을 다시 읽고 북정마을에 있는 심우장에 들어가보면 시대에 맞선 저항과 절개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성북동 시인들은 김환기, 김용준, 윤이상, 채동선 등 다른 성북동 예술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리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낸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가 살았던 한옥도 찾아볼만한 곳이다.
■ 한국문화재를 지켜낸 전형필의 ‘간송미술관’, 국보를 가장 보유한 사립미술관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 해례본’ 등 한국의 국보급 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립미술관이다.
한글의 창제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일제강점기인 1940년 무렵 거액을 들여 구입해 지켜낸 문화유산이다.
간송미술관은 성북동 시인의거리 끝 성북초등학교 골목에 있다.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혜원전신첩, 국보 135호), 청자기린형뚜껑향로,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등 수많은 국보급 유산을 소장한다.
간송은 1930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이 돈을 조선의 고서화-도자기-불상 등을 사들였다. 인사동 고서점도 인수했다. 고서-고문헌-서화도 수집했다.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문화재도 돈으로 막았다. 대표적인 것이 당시 서울 기와집 20채에 해당하는 거액을 주저하지 않고 샀다. 국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간송 전형필은 이처럼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었다.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었다. 문화재를 개인 소유가 아닌 민족문화의 자산으로 보존하겠다고 생각한 그는 1938년 성북동에 ‘보화각’을 세웠다.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이었다.
“문화재의 국적을 지킨 사람” “문화재를 통한 독립운동가”로 평가받는 전형필. 현재 간송미술관은 전시 준비로 휴관 중이었다. 간송미술관은 1년에 1~2회만 개방한다.
■ 시인 백석의 연인 김영한, 법정 ‘무소유’ 읽고 요정 대원각 7000평 시주
길상사는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요정 대원각을 시주해 탄생한 절이다. 대원각은 한때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영한은 1987년 법정 스님 '무소유'를 읽고 7000여 평의 최고급 요정 대원각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절로 만들어주기를 요청했다. 시가 1000억원이 넘었다. 법정 스님은 1997년 12월 14일 세 번의 거절 끝에 받아들여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로 바꾸었다.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불명을 받았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 뜰에 뿌려 주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백석은 1996년 북한에서 눈을 감았다.
길상사는 대원각을 시주할 때 "그까짓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사랑이야기와 법정 스님과의 '인연'이 어우러져 문학적인 공간이자 명상과 산책, 사진을 찍을 만한 명소로 거듭 태어났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1938년)
공덕비 옆 안내판에는 김영한 생애와 이 시가 새겨졌다.
길상사와 관련한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당대 종교지도자의 종교를 초월한 우정과 존중도 주목을 받았다.
1997년 3000여명이 참석한 개원법회는 법정 스님과 교류가 있던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찾아와 “길상사가 도시인의 영혼의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김수환 방문과 축사에 성탄 메시지로 화답했다. 가톨릭 ‘평화신문’에 “예수님의 탄생은 한 생명의 시작일 뿐만이 아니라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남이다”며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썼다. 법정 스님은 1998년 IMF 외환위기 시기에 명동성당에서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길상사 마당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전 서울대 미대 교수) 최종태가 만든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법정 스님은 1999년 최 작가 작업실을 찾아 관음상 제작을 부탁했다. 2000년 4월 28일 길상사에 봉헌된 180cm의 이 석조불상은 얼굴과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하늘길 그리고 북악팔각정
북악하늘길은 서울 북쪽의 진산인 북악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이다. 이 길은 북악스카이웨이와 연관이 깊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이 일어났다. 소위 '1.21 사태'다. 이후 수도권 경비 강화를 위해 조성한 도로가 북악스카이웨이다. 그해 2월 21일 착공해 9월 28일 개통되었다.
42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이 길은 오랜 세월의 침묵을 깨고 2010년, 시민들에게 다시 개방되었다. 현재 북악팔각정을 찾는 사람들의 드라이브코스로 사랑을 받아 차량 통행도 많고, 이 도로 곁에 나있는 북악하늘길을 걷는 사람들도 나란히 걷고 있는 길이 되었다.
북악하늘길의 가장 큰 매력은 ‘서울 한복판에서 숲-역사-전망을 동시에 만나는 길’이라는 점이다. 성북동을 지나 북악산길 위로 올라서면 '국민대 캠퍼스' 등 서울 도심의 전경과 한양도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도심 속에서도 자연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길이 되었다.
북악팔각정은 소위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에 있는 정자다. 북한산 능선과 평창동 일대와 서울 도심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유명하다. 자동차 드라이브 중심의 도로에 있는 쉼터인 셈이다. 몇 달 전 일본인-중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팔각정은 현재는 공사 중이었다.
■ 자하문=창의문, 인근에는 ‘대한민국 최고가 작품’ 유명 김환기의 미술관
자하문(紫霞門)은 창의문(彰義門)이라는 이름을 따로 갖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서북쪽 사소문이었다. 자주빛 노을 뜻을 지닌 자하문은 창의문의 별칭이다.
1623년 인조반정시 광해군을 몰아낸 반군이 이 문으로 궁궐로 진입했다. 그래서 의를 드러낸 문이 되었다. 1968년 1.21사태로 북한 무장공비 침투로 창의문 부근에서 교전을 벌이고 우리 군경이 순직했고, 김신조는 생포되었다.
이 자하문 인근 부암동에는 ‘대한민국 최고가 작품’(2019년 132억원, 우주05-IV)으로 유명한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작품과 예술세계를 볼 수 있는 ‘환기미술관’이 있다.
김환기는 ‘성북동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1905~1977)과는 절친이었다. 성북동에서 가까이 지냈던 사이였다. 김환기는 김광섭의 시를 좋아했고, 두 사람을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김환기는 50세에 홍익대 미술대 교수를 때려치우고, 1970년 뉴욕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김광섭 시 '저녁에'를 떠올렸다. 이 시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을 그대로 작품 제목을 삼아 그림을 그렸다.
화면 전체에 작은 푸른 점을 반복해 찍었다. 어쩌면 그 푸른 점에는 그와 교류했던 화가와 작가 등 예술가의 얼굴도 들어 있을 것이다. 친구인 김광섭뿐만이 아니라 주례를 서준 화가 고희동, 사회를 본 시인 정지용, 자신이 시집 표지를 그려준 노천명, 그림을 팔아준 최순우, 피란 시절 부산에서 자주 술잔을 나누던 이중섭, 장욱진, 조병화….
그의 일기에는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를 남겼다. 이 그림은 1970년 한국일보의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탔다.
이후 이 시는 1980년대 초 유심초라는 쌍둥이 형제 가수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노래로 불러 인기를 끌기도 했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길은 성북동과 부암동, 김환기와 김광섭의 예술혼과 교류가 이어지는 ‘거장의 길’이기도 하다. 참, 빼놓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자하문 앞에 비운의 천재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그리고 인왕산 아래 종로구 누상동(현재 옥인길57)에는 윤동주 하숙집터가 있다.
가을이 성큼 다가섰다. 이 길에서는 오르막에서는 천천히 걷고, 전망대에서는 잠시 멈추고, 벤치에서는 쉬어도 좋다. 시를 읽고 그림을 보고, 북악하늘길을 걸을 수 있다. 그리고 ‘저녁에’ 서울의 별을 바라봐도 좋다. 그러다보면 세상의 ‘인연’을 생각날 수 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