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유엔기념공원을 걷다 보면 한국전쟁이 결코 한반도만의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인 이곳에는 현재 14개국 2,339명이 잠들어 있다. 그 가운데 동남아 출신으로는 태국 참전용사 세 분이 영면하고 있다. 반면 7,420명을 파병했던 필리핀 참전용사의 묘는 아직 없다.
그 이유에는 각국의 안장 문화가 있다. 전쟁 중 부산 일대 유엔군 묘지에는 한때 1만 명이 넘는 전몰자가 가매장되었지만, 전후 각국의 정책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특히 필리핀과 태국은 전사자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해 고향에 안장했다. 그래서 오늘날 유엔기념공원 추모명비에는 필리핀 전사자 120명, 태국 전사자 13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당시 전사자의 묘는 남아 있지 않다.
1950년의 동남아시아는 오늘날의 ASEAN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떤 나라는 갓 독립했고, 어떤 나라는 여전히 식민지였으며, 또 다른 나라는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들이 탈식민과 냉전이라는 두 거대한 흐름 앞에서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다.
■ 필리핀과 태국, 한반도로 오다
동남아에서 한국전쟁에 전투병을 파견한 대표적인 두 나라는 필리핀과 태국이었다.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불과 4년 만에 유엔군에 참여했다. 필리핀 원정군 PEFTOK에는 모두 7,420명이 참전했다. 당시 국내에서도 후크발라합 계열의 공산주의 반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에 한국전쟁은 단순한 ‘먼 나라의 전쟁’이 아니었다.
태국 역시 육군뿐 아니라 해군과 공군까지 파견했다. 유엔기념공원 공식 통계에 따르면 6,326명이 파병됐고 136명이 전사했다.
두 나라의 선택은 이후 미국과의 안보관계 강화로 이어졌고, 1954년에는 모두 미국 주도의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에 참여했다. 한반도와 동남아의 안보를 하나의 냉전적 위협 속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 기억은 지금도 유엔기념공원에 남아 있다. 연못 위의 ‘한-태 우정의 다리(Thai-Korean Friendship Bridge)’는 1976년 태국 정부가 기증해 건립했고, 노후화된 뒤 2008년 재건되었다. 작은 다리 하나지만 전쟁에서 맺어진 인연이 전후의 우정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 식민지와 신생 독립국의 서로 다른 길
반면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브루나이는 당시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말라야와 싱가포르는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브루나이는 영국 보호령이었다.
특히 말라야에서는 이미 1948년부터 영국·영연방군과 공산주의 게릴라 사이에 ‘말라야 비상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유엔군이 북한군과 중국군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 동남아에서도 또 다른 반공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버마, 오늘날의 미얀마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 독립을 선언한 뒤 네덜란드와 4년간 독립전쟁을 치렀고 1949년 말에야 주권을 인정받았다. 1950년은 사실상 독립국가로서 첫해였다. 버마 역시 1948년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공산주의 반란과 소수민족 무장투쟁에 직면했다.
이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미·소 가운데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독립을 지키고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리핀·태국과 달리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과 거리를 두며 중립주의와 비동맹을 모색했다. 이 흐름은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로 이어졌다.
■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또 하나의 전쟁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의 상황은 더욱 복잡했다.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의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949년 중국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인도차이나의 민족해방전쟁은 국제적 냉전과 빠르게 결합했다.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고 중국은 베트민을 지원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 역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과 냉전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맞았다.
결국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패배하고 제네바협정이 체결됐다. 같은 해 SEATO가 만들어졌다. 한국전쟁과 인도차이나전쟁은 별개의 전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냉전 공간으로 연결했다.
■ 70여 년 뒤, 다시 부산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유엔기념공원의 안장 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2015년부터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사망한 유엔군 참전용사 가운데 본인이나 유가족이 희망하는 경우 국제관리위원회의 승인을 거쳐 유엔기념공원에 사후 안장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태국 참전용사들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내가 유엔기념공원 부임 후 2024년 로드 아사나판 참전용사가 태국인으로서는 처음 안장됐고, 2025년에는 마놋 품마니껀 해군 참전용사와 나롱 얨니욤 육군 참전용사가 뒤를 이었다. 현재 세 분이 참전용사 묘역에서 영면하고 있다.
전쟁 중 목숨을 잃은 태국군은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살아서 귀국했던 참전용사들이 70여 년 뒤 자신이 지켰던 한국을 마지막 안식처로 선택한 것이다.
필리핀과의 기억도 이어지고 있다.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11월 2일 유엔기념공원을 찾아 참전용사들을 추모하고 향나무 한 그루를 기념 식수했다.
아직 이곳에는 필리핀 참전용사의 묘가 없다. 그러나 120명의 전사자 이름은 추모명비에 새겨져 있고 7,420명의 참전 역사는 한국과 필리핀을 이어주고 있다.
■ 서로 다른 길 끝에서 다시 만나다
1950년 동남아는 하나가 아니었다.
필리핀과 태국은 유엔군으로 한반도에 왔다. 말라야·싱가포르·브루나이는 식민통치 또는 보호체제 아래 있었고, 인도네시아와 버마는 신생 독립국으로서 비동맹의 길을 모색했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에서는 탈식민과 냉전이 뒤엉킨 또 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시대, 서로 다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1967년 이후 하나둘 ASEAN이라는 지역공동체 안에서 만나게 된다.
오늘 유엔기념공원을 걸으면 그 긴 역사가 몇 개의 풍경으로 압축되어 다가온다.
상징구역에 필리핀과 태국 참전기념비가 있고, 연못 위에는 한-태 우정의 다리가 놓여 있다. 그 너머에는 70여 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태국 참전용사 세 분의 묘가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심은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 참전비, 다리와 묘, 그리고 한 그루의 나무.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전쟁이었지만 동시에 동남아가 탈식민과 냉전의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던 시대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70여 년이 지난 오늘, 그 서로 다른 길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다시 만나고 있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