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신화의 찬탈적 침략성2 상(上) 일제 조선침략 옹호 이데올로기 작용 <기기> 신화에는 천황의 ‘섭정’ 진구코-고-(神功皇后, 이하 ‘신공황후’)가 등장한다. 이 여인은 ‘삼한정벌’ 또는 ‘신라정토’의 영웅으로 상투적인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 이 이미지는 메이지 시대 이래 근대 천황 상에 내포된 찬탈적 침략성을 상징한다. 필자는 신공황후의 이미지는 애초부터 조선을 표적으로 겨냥한, 저 땅의 지배자들의 마음속에 박혀 그것이 집단무의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지금도 그것이 일본 사회의 저류로 흐르고 있다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신화는 메이지 시대(1868~1912)에 정한론(征韓論)이 타오르게 한, 불쏘시개 구실을 하는가 하면 일제의 조선침략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 빌미가 되었다. 이 신화를 따라가 보자. 제14대 천황으로 되어있는 추아이(仲哀)의 제3비가 된 신공황후가 어느날 신탁(神託)을 받는다. “처녀의 눈썹같이 생긴 나라가 바다머리에 있는데 그곳은 눈부신 금, 은, 화려한 색의 재물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이를 ‘다쿠후스마시라기노쿠니’((栲衾新羅国=신라국)이라합니다. 만일 내게 제사를
[일본 신화 정치적 작위성1] 나오키 ‘천양무궁의 신칙’은 조작...천황 통치를 ‘신정' 승화 지난번 이야기에서 이른바 ‘국학’에 이어 그 사상적 기반을 종교적 옷을 입힌 ‘국가신도’, 그 모두가 천황 통치에 부조한다는 점을 짚었다. 그런데 국학의 천황 부조를 뛰어넘어 천황 통치를 ‘신정(神政)’의 위치로 승화시킨 것이 따로 있다. 일본 신화이다. 메이지 헌법은 겉으로는 입헌군주제의 옷을 입히고 있지만 천황의 ‘신성한’ 존재로 못박고 있다. 그 배후에 바로 일본 신화가 밑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유구한 문명을 품은 세계의 민족은 대체로 여러 신화를 내재한다. 그 중에 건국 신화, 종교 신화, 민중 신화가 보편적이다. 무사의 나라 일본에는 영웅 신화도 있다. 앞서 본 스사노오노미고토가 하늘나라 고천원에서 내려와 머리가 아홉 개나 달린 큰 뱀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를 베어 처녀를 구했다는 이야기라든가 전설적인 영웅 야마토다케루 이야기 등. 글쓴이가 일본 신화에 주목하는 첫째 이유는 그 정치적 작위성이 두드러진다는 데에 있다. 이 정치적 작위성은 천황을 일본의 통치자로서 정당성에 부합하도록 조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 예로서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神勅)’을
일본의 국학이 천황을 ‘현인신’으로 받는 종교적 뒷받침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른바 ‘국가신도’에도 깊숙이 관련을 맺는다. 국가신도란 무엇인가? 일본의 코지엔(広辞苑) 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메이지 유신 뒤, 신도 국교화 정책에 의해 신사신도(神社神道)를 황실신도 아래 재편성하여 만들어진 국가종교. 군국주의·국가주의와 결부되어 추진되고 천황을 현인신으로 하여 천황지배의 사상적 지주로 되었다. 이 단순한 정의가 “메이지 유신 뒤, 신도 국교화 정책에 의해...만들어진 국가종교”라고 했지만 이는 무미건조한 사전적인 의미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국가신도가 종교의 이름으로 이웃나라 조선에 자행한 만행이나 자국민에 저질은 죄상은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헤아릴 수 없는 청년들이 ‘텐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이 정의가 언급한 “군국주의·국가주의와 결부되어 추진되고 천황을 현인신으로 하여, 천황지배의 사상적 지주로..”하여 그 일단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 영문도 모른 채 죽은 극히 일부가 야스쿠니(靖国) 신사에 ‘호국영령’으로 묻혀 있다고. 문제는 전후 일본 총리라는 자들이 이 ‘영령’에 참배
일본의 국학이 이웃 나라, 즉 조선, 만주, 중국을 침탈하고 마침내 태평양 전쟁까지 이른 황국 사관의 이데올로기로 된 기반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원천은 천황을 ‘현인신’, 즉 ‘아라비토카미(現人神)’으로 떠받든 천황 신앙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노리나가가 구상한 ‘천황교 교의’는 그가 필생 연구 끝에 엮어낸 <고사기전>에 드러내고 있으며 노리나가 사후 그의 문인으로 자임한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1776~1843)가 완성했다고 두루 알려지고 있다. 이번 이야기는 노리나가의 천황교 교의를 중심 줄거리로 삼고자 한다. 그에 앞서 <고사기전>이 담고 있는 한반도 편견을 짚어 보자. ■ 한반도 편견의 뿌리:노리나가 ‘일본서기’ 바꿔치기 인용해 ‘고사기’ 일대수정 <고사기>에는 이른바 천손강림 신화에서 천황가의 조상신이라는 니니기 신(邇々芸命)이 츠쿠시(筑紫, 규슈의 옛 이름)의 히무카(日向)의 다케치호 봉(高千穗峰)으로 내려왔을 때 <고사기>의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땅은 카라쿠니를 향하고, 카사사(笠沙)의 미사키(御前)와 직통하고 아침 해가 눈부시게 내려쬐며, 저녁 해가 밝게 내려쬐는 나라니라
일본에는 ‘국학’이라는 전통 학문 분야가 있다. ‘전통 학문 분야’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학문과는 거리가 먼 천황제 옹호 또는 천황 신앙이 묻어나는 ‘의사(擬似)학문’이다. 물론 국학에도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어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핵심은 일본천황과 연관을 빼놓을 수는 없다. 국학이란 무엇인가? 본래 이니시에마나비(古学び)라 불렀다. 간단하게 말하면 일본의 독자적인 사상이나 정신세계를 일본 고전에서 찾자는 ‘학문’이다. 국학은 에도 중기에 완성되지만 처음 승려 게이추(契沖, 1640~1701)에서 그 싹을 틔운다. 그것을 이어받은 사람이 가다노 아즈마로(荷田春滿, 1669~1736)이다. 그는 교토의 후시미이나리(伏見稻荷) 신사의 신관으로 복고신도를 창도한 신도가이다. 조선왕조의 경우 아직도 주자학(朱子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형편과 견주어 보면 그들 국학자는 자아의식을 일본 고전에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한발 앞서 갔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중신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중국의 주자를 모르는 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든가 ‘오랑캐’라 했다. 당시 지배적인 당파 세력 노론(老論)의 우두머리인 우암에게는 주자는 신이
타루이 토-키치(樽井藤吉)는 ‘대륙낭인(大陸浪人)의 선구자 중 한 사람’(旗田巍, 1969)로 불리는 메이지 시대(1868~1912) 인물이다. 대륙낭인이란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중국대륙 특히 만주·유라시아대륙·시베리아 등 방랑하면서 각종 정치활동을 한 일군의 일본인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방랑자’가 아니라 일본의 조선 병탄을 노린 대륙침략의 척후병들임을 놓칠 수 없다. 타루이는 메이지 26년 즉 1894년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란 저서를 내놓고는 조선 병탄을 도모한 ‘대동합방’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침략사관을 포장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가 주장한 ‘대동합방’의 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70년대 대두하여 무르익었던 ‘세이칸론’(征韓論, 이하 ‘정한론’)을 눈여겨봐야 한다. 왜냐하면 대동합방론은 정한론의 후속편이기 때문이다. 정한론을 포장한 자는 타루이뿐만 아니다. 미국의 펜실바니아 대학 교수 힐라리 콘로이(Hilrary Conroy)는 전혀 다른 논리로 정한론을 합리화한 <일본의 조선병탄>(The Japanese Seizure of Korea, 1960)을 간행한다. 그는 조선
일본인은 누구인가 16 일본의 조선관: 일본 국사교과서에 각인된 조선관 1984년 9월 6일 우여곡절 끝에 한국의 신군부 독재자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은 당연히 이웃나라 국가 원수의 예우로 그를 맞았다. 그때 주목을 받았던 것 중 하나로 일본천황의 ‘말씀(お言葉)’ 즉 ‘만찬사’라는 것이 있다. 그 ‘만찬사’는 예정대로 9월 6일 궁중 만찬회에서 천황의 육성으로 낭독되었는데, 그 중 고대사에 관련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각해 보면 귀국과 우리나라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이웃나라로 그 사이에는 옛날부터 여러 가지 분야에서 밀접한 교류가 있어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에 의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컨대 기원 6, 7세기의 우리나라 국가형성의 시대에는 다수의 귀국 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 사람에게 학문·문화·기술 등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긴 역사에 걸쳐 양국은 깊은 이웃 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금세기 한 시기에 있어 양국사이에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실로 유감이며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마이니치신문> 1984년 9월 7일치). 재일작가이자 한일
일본인은 누구인가 15 . 일본의 조선관: 야나기에 심대한 영향끼친 아사카와 형제 이전 이야기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관, 특히 조선 막사발을 보는 그의 미학을 짚어 보았지만 그의 조선도자기 미학은 아사카와(浅川) 형제의 다리를 매개로 해 성립한 것이다. 야나기로서는 그들이 없었다면 그는 조선예술은커녕 조선에 대한 관심조차 그렇게 깊이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김정기, 2011, 107). 아사카와 형제는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서 ‘조선민족미술관’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것은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민간 박물관이었다. 그런데 이 박물관은 야나기가 주도하고 아사카와 형제, 그리고 소수의 야니기 동호인이 참여해 세운 ‘타인’의 박물관이었다. 야나기는 형 노리다카가 가져온 청화추초문모깎이 항아리에 눈을 떴지만,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은 1920년 초겨울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가 지바(千葉)의 아비코(我孫子) 자택을 찾은 것이 계기였다. 그때 야나기는 다쿠미를 통해 그가 몇 년간 조선에 살면서 터득한 조선민예에의 독창적인 미에 눈을 떴다고 보여진다. ■ ‘조선멸시관’ 뛰어넘기 위해 조선민족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