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 20일 일본의 옛 도읍 나카오카 경(長奧京) 발굴 현장에서 한 매의 나무 표찰[木札]이 발견되었다. 세로 2.7cm, 가로 1.3cm, 두께 2밀리의 이 표찰에는 ‘소민쇼라이자손자(蘇民将来子孫者)’라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그것은 비백(飛白) 체[글자의 획에 희끗희끗한 흰 자국이 나도록 쓴 묵서(墨書)의 서체의 한 가지-글쓴이]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소민쇼라이의 자손입니다”라고 쓰인 표찰은 뒤에서 살피듯이 당시 일본의 서민들이 역병막이[疫病除け] 부적[お守り]으로 효험이 있다고 믿는 민중 신앙의 표식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 같은 부적 중 천년 이상이나 된, 가장 오랜 것이라 한다(川村湊, 2007, 6). 일본의 신사나 절간에서는 지금도 ‘소민쇼라이’ 부적을 배포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 부적을 현관 입구에 걸어두는 풍습이 지금도 일본 각지 마을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소민쇼라이의 자손’이라고 쓰인 부적이 왜 역병을 막아 준다는 것인가? 이런 민간신앙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여기에는 행역신(行疫神)인 고즈텐노오(牛頭天王, 이하 ‘우두천왕’)의 이야기가 관련된다. 다시 말하면 우두천왕 이야기에
지난 번 이야기에서 짚은, 조선의 원혼이 일본에 건너가 “원령문화로 꽃 피웠다”는 서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중심에는 원령이 문학-예술의 모티브로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원령을 모티브로 삼은 예능으로서 일본의 전통연극 노-(能)를 살펴보기로 하자. 무릇 노-란 무엇인가? 노-는 일본의 전통예능의 하나로 쿄-겐(狂言:, 가부키 연극)과 함께 남북조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실연되는 세계에서도 가장 오랜 연극생명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독자의 양식을 갖는 노-무대에, 노-가면을 쓰며, 제아미(世阿弥)가 ‘가무이도(歌舞二道)’라고 지적하듯이 춤으로 높여지고, 추상화한 연기와 노래[謠(우타이)]와 반주음[囃子(하야시)]에 의한 음악 요소의 융합된 연극이다. 메이지 이후 ‘노가쿠(能樂)’라고 부르는 편이 일반화되었지만 ‘사루가쿠(猿樂)’ 또는 ‘사루가쿠노 노-’로 불러지며 제아미는 사루가쿠(申樂)이라는 글자로 이에 등치시키고 있다. ‘노-(能)’란 가무를 딸리고 연극적 전개를 갖는 예능의 의미이며 덴가쿠(田樂)의 노-, 엔넨(延年)의 노도 행해지고 있는데, 사루가쿠의 노-와 같은 발달을 이룩하지 못했다. ‘요쿄쿠(謠曲)’는 노-
일본에는 ‘고료-신코-’(御靈信仰, 이하 ‘어령신앙’)라는 신앙이 있다. 이 신앙은 비명에 죽은 사람의 영혼=어령이 무서운 지벌을 내린다고 두려워해 그 영혼을 달래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원령신앙’인데, 이 신앙이 생겨난 것은 기록으로는 8세기 말 시작된 헤이안(平安) 기 이후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한토(한국의 땅)에서 무교가 일본에 건너간 것이 야요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만큼 그때 무교에 내재한 원혼신앙도 당연히 건너갔을 것이다.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원혼(冤魂)신앙이 ‘원령(怨靈)’이란 옷을 입고 왜 땅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대인들은 원혼이 천재나 역병 같은 재앙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원혼이란 한을 품고 죽었다든지 비명에 죽은 사람의 혼령을 말한다. 그런데 왜 땅으로 건너간 원혼 신앙은 그 본고장인 조선과는 달리 ‘원령문화’로 꽃피웠다. 조선에서는 경직된 유교 이데올로기에 속박되고 핍박을 받는 신세로 전락돼 무교의 원혼신앙은 ‘무속(巫俗)’이라는 이름으로 사교(邪敎) 화 된 것과 대비된다. 일본의 민속학자로 이름난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는 신(神)이 되는 인간의 자격 조건을 두 가지 들고 있다. 하나는 높은 지위나
일본 아베 내각의 이인자로 치부되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한국 위안부에 망언을 일삼아 ‘망언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번에는 단일민족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2020년 1월 13일 후쿠오카에서 열린 국정보고회에서 “2000년의 긴 세월에 걸쳐 하나의 언어, 하나의 민족, 하나의 왕조가 이어지고 있는 나라는 여기[일본]밖에 없으니, 좋은 나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에 망언제조기라는 딱지가 붙었으니 ‘망언’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과연 ‘하나의 언어, 하나의 민족, 하나의 왕조’라는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하나의 언어’가 거짓이라는 것은 이전 이야기 ‘일본어 서사’에서 드러났으며, ‘하나의 왕조’도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글쓴이가 다른 곳[김정기, <일본천황, 그는 누구인가>(2018)]에서 짚었기에 여기서는 ‘하나의 민족’에만 초점을 맞춰보자. 일본 우익 쪽에서 내세우는 ‘하나의 민족’론, 즉 단일민족론은 겉만 보아서는 그 정체를 놓친다. 그 속에는 일본민족 우월론-->타민족 멸시가 깔려있고, 더 나아가 타민족문화 말살-->타민족 살육-->인종청소 같은 검은 음모가 숨겨져 있다. 그런 점에서 나치 독일
우리는 고분시대 4~5세기 즈음 일본 열도의 주민을 ‘일본인’이라고 불렀지만 6세기까지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은 없었다. 따라서 이는 편의상 부른 이름에 지나지 않고 야마토 왕조의 국호는 ‘왜국’이었으니 ‘왜인’이라 해야 마땅하다. 이 ‘왜인’을 교체해 들어선 것이 퉁구스 계=조선계 정복민족이었다면 그 윗대 조몬 인(繩文人)·야요이 인(弥生人)은 누구인가? 조몬 시대란 기원 전 1만년에서 전 4세기 즈음까지 아득한 옛날이며, 야요이 시대란 기원 전 4세기에서 후 3세기까지 이어진 시기이다. 특히 야요이 시대는 한반도에서 논농사와 함께 금속기가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일본문명의 발상 기로, 도래 문물이 상륙한 북 규슈는 야요이 문명의 발상지로 일컬어진다. 대체로 새끼줄 문양의 토기를 만들었다는 조몬 인(繩文人)은 남방계 인으로 알려진 반면 야요이 인은 볼록한 둥근 항아리를 만든 북방 계인으로 일컬어진다. 그 항아리는 1984년 도쿄대학 구내인 혼고(本鄕) 야요이 쵸-(弥生町)의 무코-카오카 패총(向ヶ岡貝塚)에서 발견되었다 해서 ‘야요이식 토기’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먼저 조몬 인에 주목해 보자. 일본의 역사민속박물관 교수 고야마 슈조(小山修三)의 저술 <조
일본 고고학이 가르는 역사구분으로 고분(古墳)시대란 기원 3세기부터 7세기 전후의 약 400년을 가리킨다. 이 시기 일본인은 저 세상으로 떠난 지배자를 기려 거대한 고분을 조영했다. 기나이(畿內) 오사카 평야에는 오-진(応神) 천황 능으로 알려진 콘다고뵤야마 고분(誉田御廟山古墳)은 분구 길이가 420m나 되고, 오-진의 네 째 황자로 임금의 자리를 이은 닌도쿠(仁德) 천황 능으로 알려진 다이센능고분(大山陵古墳)은 분구 길이 486m에 이르는 등 최대 규모의 고분이 출현한다. 지방에서도 오카야마(岡山)의 쓰쿠리야마(造山)고분은 분구 길이 360m, 츠쿠리야마(作山)고분은 분구길이가 260m에 이른다. 군마의 오-다테텐신야마(太田天神山) 고분도 분구 길이 210m에 이르는 등 거대 고분이 만들어졌다. 이런 고분이 만들어진 것은 3~4세기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거대 고분이 돌연 나타난 것일까? 특히 출토된 유품 중 대륙제의 ‘금색찬연’한 부장품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말없는 이들 거대 고분에 누운 주인공은 누구일까? 글쓴이는 이 의문에 명쾌한 해답은 준 것이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주장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이라고 본다. 도쿄대의 이노
글쓴이가 이제까지 일본어 서사를 몇 회에 걸쳐 썼지만 한 나라의 언어를 단지 몇 차례로 그 전체 상을 그린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여느 어부가 조각배로 한 나라 언어의 거대한 대양을 건너가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글쓴이는 그것을 알지만 ‘고래사냥’이 아니라 잔챙이라도 건져 올리려는 심정에서 쓴 것이다. 그 잔챙이란 일본어가 지닌 한국어와의 근친성 또는 차별성, 발음의 특이성, 한자훈독의 난해성, 인명과 지명의 다기성, 차별어의 병리성을 더듬어 본 것이다. 그밖에 일본어는 상대방을 받드는 존경어,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가 특히 발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한국어 ‘가다’는 일본어로 ‘이쿠(行く)’지만 겸양어 ‘마이루(参る)’가 있을 뿐만 아니라 존경어 ‘이럇샤루’도 있다. 이와 함께 ‘가시다’ ‘오시다’ ‘나가시다’ 등 두루 표현하는 존경어도 있다. 한국어에도 ‘가 나이다’와 같은 예스러운 겸양어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존경어로 ‘납시다’와 같은 예스러운 말과 함께 ‘가시다’라는 말은 있다. 이번 이야기로 일본어 서사를 갈무리해 보자. 이전 이야기서 글쓴이는 한국어와의 근친성에서 볼 때 한국어와 일본어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일본 깡패나 폭력배보다 조선인이 무섭다” 1921년 11월 4일 당시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 1856~1921)가 도쿄역 남구(南口)에서 한 청년이 휘두르는 칼에 찔려 암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범인을 포박한 형사가 대뜸 “너 쵸-센징이지”라는 말을 던졌다는 것이다. 사실 범행을 저지른 건 정치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 청년이었지만 경찰은 반사적으로 범인을 조선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건 경찰뿐만 아니었다. 당시 일본 신문은 하라 수상의 암살을 호외(戶外)로 전하면서 “하라 수상 센징(鮮人)에 찔려/도쿄역전에서 쓰러져” “돌연 군중 속에서...14~15세 조선인 풍(朝鮮人風)의 한 청년이 불쑥 나타나”[大阪朝日新聞, 1921년 11월 4일치 호외]라고 쓰고 있다. 이런 선입견에 의한 오도가 “두려운 존재로서 조선인의 이미지를 널리 번지게 한 것”(水野直樹·文京洙, 2015, 20)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1923년 9월 일어난 칸토 대지진 때 ‘후테이노센징’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 등 터무니없는 데마로 조선인이 일본 곳곳에서 떼죽음을 당한 참극을 일깨웠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건을 예외로 치더라도 ‘두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