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 13]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미·중 경쟁

  • 등록 2026.02.22 09: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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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 경고처럼 미-중 경쟁 격화될수록 한국-아세안 전략적 협력 공간 넓어져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세계는 두 강대 세력의 경쟁 속에 흔들렸다. 해양 상업국가 신흥 아테네와 군사 중심의 육상 강국 스파르타. 이 둘의 대결은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고, 승패를 떠나 그리스 전체의 쇠퇴를 초래했다.

 

이 사례는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을 설명하는 비유로 자주 등장한다. 특히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남긴 “아테네의 부상과 그로 인한 스파르타의 공포가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통찰은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재해석되며 현대 국제정치 담론의 단골 개념이 되었다.

 

비유는 단순하다. 아테네는 해상 네트워크와 상업, 동맹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한 개방적 강국이었다. 델로스 동맹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고, 민주정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을 내세웠다. 반면 스파르타는 육상 군사력과 규율, 전통 질서 수호를 핵심 가치로 삼았다. 폐쇄적이지만 안정된 체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패권을 유지하려 했다.

 

이를 오늘에 대입하면 미국은 해양 패권과 동맹 네트워크, 규범 질서를 기반으로 한 아테네형 강국으로, 중국은 대륙 기반의 국력과 군사 현대화를 통해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스파르타형 신흥 강국으로 비유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해상 교통로와 달러 체제를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설계해 왔고,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경제력과 기술력을 축적하며 체제 전환을 요구하는 위치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고대 그리스는 상호의존이 낮은 도시국가 체제였지만, 오늘의 미·중은 세계 최대 교역 파트너이자 핵무기 보유국이다. 전면전의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충돌은 군사적 전쟁이 아니라 기술·경제·제도 영역에서의 비군사적 패권 경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인공지능, 공급망, 해상 통제권, 디지털 규범이 새로운 전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조 속에서 아세안은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고대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코린토스, 테베, 밀로스—은 두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거나 선택을 강요받았다. 전쟁의 피해는 오히려 이들 주변국이 더 크게 입었다. 오늘날 동남아 역시 미·중 전략 경쟁의 교차로에 있다.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이중 구조 속에서 각국은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한다.

 

아세안의 차별성은 제도적 집단성에 있다. 개별 도시국가였던 고대 그리스와 달리, 아세안은 협의체로서 공동의 원칙을 갖고 있다. 내정 불간섭, 합의(consensus), 중립성, 개방적 지역주의는 강대국 사이에서 완충 공간을 만들어 왔다. 아세안 주도의 다자 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APT), 동아시아정상회의(EAS), 확대아세안국방장관회의(ADMM-Plus)-은 경쟁을 관리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대화를 지속시키는 안전판이다.

 

또 하나의 차이는 상호의존의 깊이다. 동남아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고리다. 반도체 후공정, 전기차 배터리, 희토류 가공, 디지털 플랫폼, 해상 물류 허브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남중국해는 세계 해상 물동량의 요충지다. 16세기 은과 비단이 오가던 교차로가 오늘날 반도체와 데이터의 교차로로 변모한 셈이다. 이는 아세안이 단순한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구조를 형성하는 ‘위치 권력(locational power)’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한국 외교에도 함의는 분명하다. 한국 역시 안보는 미국 동맹, 경제는 중국과 긴밀, 그리고 생산기지는 동남아에 분산된 다층적 구조를 갖고 있다. 미·중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국과 아세안의 전략적 협력 공간은 넓어진다. 공급망 다변화, 디지털 규범 협력, 해양 안보, 기후·에너지 전환 분야에서 공동의 이해가 커진다. 아세안의 ‘균형 외교’는 한국에도 참고할 만한 모델이다.

 

투키디데스의 경고는 공포가 구조를 경직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는 숙명이 아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승자인 스파르타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리스 전체가 약화되었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오늘날 미·중 경쟁이 제로섬으로 흐른다면 글로벌 질서 전체가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경쟁을 관리하며 공존의 틀을 유지한다면 다극적 안정 구조로 전환될 수 있다.

 

아세안은 그 전환의 시험대다. 강대국 경쟁을 흡수하고 완충하며, 동시에 경제적 기회를 극대화하는 능력이 향후 동남아의 위상을 결정할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비극이 재연될 것인지, 아니면 경쟁 속 공존이라는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질 것인지는 아직 열려 있다. 그 선택의 공간 한가운데에 아세안이 있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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