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원의 동티모르 워치 12] 또 하나의 바티칸, 97.6%가 천주교도

  • 등록 2026.02.24 0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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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가톨릭과 생존의 십자가...요한 바오로 2세-프란치스코 두 교황 방문

 

남서쪽 끝자락, 국경 도시 수아이(Suai)의 공기는 유난히 묵직했다. 그 덥고 습한 바람을 맞으며 들어선 마을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장면과 마주했다. 조상신이 머무는 신성한 집, ‘우마 루릭(Uma Lulik)’ 앞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전통 가옥의 문앞에 으레 악귀를 쫓는 무시무시한 수호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예수였다. 놀라웠던 건 그 표정이다. 창을 든 전사도, 심판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는 세상 모든 풍파를 다 품어줄 듯 더없이 인자한 미소로 그 토속적인 우마 루릭의 문 앞에 양쪽 기둥에 서 있었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그 모습.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들에게 가톨릭은 바티칸에서 건너온 딱딱한 교리만은 분명 아니었다. 척박한 땅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하고 따뜻한 ‘루릭(Lulik, 신성한 힘)’ 그 자체였다.

 

바티칸 시티라는 특수한 도시국가를 제외하고 동티모르는 종교자유가 있는 국가들 중에 사실상 가장 높은 비율의 가톨릭 신앙을 보이고 있다. 2022년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무려 97.6%가 신자다. 딜리(Dili)에도 모스크 돔이 있긴 하다. 하지만 동티모르 스카이라인의 상징은 거대한 '크리스토 레이(Cristo Rei)' 예수상이다. 일요일 아침 성당으로 향하는 딜리 거리는 하얀 미사포를 쓴 여인들의 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압도적인 가톨릭 신자율 뒤엔 아이러니하게도 ‘침략’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동안에도 신자 비율은 20~30%였다. 폭발적인 개종은 1975년, 인도네시아 통치기간에 시작됐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판차실라(Pancasila)’라는 건국 이념하에 종교 선택을 강요했다. 그 선택권안에는 조상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신을 믿지 않는 자는 공산주의자”라는 논리가 있었다. 정령을 믿던 동티모르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점령국의 종교인 이슬람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이 남기고 간 십자가를 택했다. 그것은 개종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피난처’에 가까웠다. 그리고 독립투쟁이 계속되며 동티모르인을 돌보려 앞장선 가톨릭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으로 그 피난처에 신뢰가 더해졌다.

 

동티모르의 성당은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을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성당 문을 활짝 열고 인도네시아 통치상황에서 볼때 혁명적인 결단을 내렸다. 당시 동티모르인에게 강요했던 인도네시아어를 거부했다.

 

동티모르의 성당은 혁명적인 결단을 내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현지어 미사를 허용한 이래, 마르티뉴 다 코스타 로페스 주교서리는 테툼어를 전례 공식 언어로 통일했다. 1983년 인도네시아가 포르투갈어 미사마저 금지하자, 테툼어 미사는 본격화되었다. 점령군이 학교에서 인도네시아어를 강요하며 아이들의 혀를 옥죌 때, 성당에서는 테툼어 기도가 울려 퍼졌다.

 

점령군이 학교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쓰라며 아이들의 혀를 옥죌 때, 성당에서는 테툼어로 된 기도가 울려 퍼졌다. 노벨평화상 수상연설에서 “저는 본질적으로 동티모르의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로서 여기에 서있다고 굳게 믿습니다”라고 말했던 카를로스 벨로(Carlos Belo) 주교는 학살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상징적 사례다. 동티모르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십자가 그늘 아래 있을 때만 안전하다는 것을. 그렇게 가톨릭은 종교를 넘어 동티모르 사람들의 정체성이 되었다.

 

필자가 수아이의 우마 루릭에서 본 것처럼 동티모르의 가톨릭은 엄밀히 말해 ‘로마 가톨릭’과 ‘토착 신앙’의 기묘한 동거다. 필자가 만난 수많은 현지인들은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만 그들의 방식으로 조상신을 섬겼다.

 

자타공인 가톨릭국가인 동티모르 국가행사에도 토착신앙의 상징인 리아나인(Lia Na’in, 전통 구술 수호자)의 춤이 선보인다. 성모 마리아상에 전통 직물인 '타이스(Tais)'를 입히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사제들도 이를 굳이 막지 않는다. 아니, 막을 수 없다.

 

이 이중적인 구조야말로 동티모르인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이기 때문이리라. 독립 후 가톨릭 권력은 정부의 지원과 함께 강해졌다. 낙태나 가족계획 같은 민감한 이슈에서 교회는 여전히 완고하다. 이는 때로 국가 개발이나 여성 인권 문제와 충돌하며 파열음을 내기도 한다. 신앙이 권력이 될 때 생기는 부작용, 어쩌면 이 젊은 국가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동티모르인들의 믿음은 경이롭다. 동티모르에서 가톨릭 성지로 타시 톨루(Tasi Tolu)를 뺄 수 없다. 2024년 9월 10일, 프란치스코 교황(Francis, Jorge Mario Bergoglio)이 딜리를 찾았을 때 동티모르인들은 열광했다. 전체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60만 명이 전국에서 모여 ‘타시 톨루’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35도가 넘는 뙤약볕 아래서 몇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그들의 눈빛은 기쁨이 가득했다.

 

마침 타시 톨루광장은 1989년 10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Johannes Paulus Ⅱ)가 동티모르에 와서 약 10만 명(추정)의 동티모르인이 미사를 한 같은 장소다. 동티모르의 비극적인 상황을 세계에 알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그 곳에 다시 교황이 찾아온 것이다.

 

동티모르인들에게 교황은 종교 지도자만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24년의 점령기, 전 세계가 외면할 때 유일하게 자신들의 손을 놓지 않았던 ‘오랜 친구’였기 때문이다. 60만 명이 뙤약볕 아래 모인 것은 신앙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그 친구가 다시 찾아와 준 것에 대한 가슴 벅찬 환대이기도 했다.

 

동티모르에서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 이상이다. 그것은 야만의 시대를 견뎌낸 ‘방패’였고, 지금은 흩어진 부족들을 하나로 묶는 단단한 ‘접착제’다. 오늘도 딜리의 붉은 저녁놀 속에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는 이 작지만 단단한 나라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글쓴이=최창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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