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인 전 주아세안 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을 역임한 아세안 10개국과 인연을 갖고 있다. 특히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2023년 외교부 은퇴 후에도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전문가 및 저명인사(ARF EEP) 및 아세안동아시아경제연구소(ERIA) 한국이사로서 아세안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세안익스프레스는 현재 유엔기념공원관리처장을 맡고 있는 서정인 주 아세안대사를 새 칼럼 필진으로 초빙했다. 한국 주요 아세안 외교에서 직접 발로 뛰었던 현장 경험과 넓은 안목으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주는 그의 인사이트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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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에서 함께 근무하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동료가 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를 다녀오더니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동남아는 오토바이, 중국은 자전거, 중남미는 자동차가 압도적이잖아요. 도대체 왜 이럴까요?”
그 질문에 나도 잠시 멈췄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살았고, 베트남-캄보디아-미얀마를 수 없이 다녔고, 멕시코에서도 근무했고, 중국 출장도 여러 번 가보았다. 생각해보니 ‘몸으로 아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지난 세월 느꼈던 경험을 꺼내놓고, 동남아 각국 거리 풍경을 떠올려보면서 천천히 정리해 보았다.
■ 인도네시아–시간을 지키기 위한 선택: 왜 싱가포르-말레이시아는 다를까
1990년대 말, 내가 근무하던 자카르타는 이상한 도시였다. 백화점도 많고 고층 아파트도 계속 올라가는데, 도로와 대중교통은 정말 열악했다.
중심 도로를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골목길이다. 거기에 우기 때 폭우라도 쏟아지면 자동차는 몇 시간씩 꼼짝을 못 한다. 그때 깨달았다. 이 도시에서 중요한 건 ‘편안함’이 아니라 ‘제 시간에 도착하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오토바이다. 자동차보다 빠르고, 골목을 빠져나갈 수 있고, 약속 시간은 지킬 수 있다.
오토바이가 많은 첫 번째 이유는 기후와 도시 구조, 그리고 시간이었다.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동남아인데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는 풍경이 다르다. 여긴 오토바이보다 자동차다.
이유는 비교적 단순하다. 이 나라들은 동남아 안에서도 ‘선진국’이고,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진 자동차 중심 문화가 있다. 무엇보다 차를 살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있다.
같은 기후, 비슷한 위도라도 경제 수준과 역사적 경험이 교통 문화를 갈라놓는다.
동남아시아 딱 하나 예외적인 도시가 있다. 미얀마의 경제수도인 양곤(Yangon)이다. 2003년 갑작스럽게 취해진 조처다. 가장 널리 퍼진 가설은 당시 한 오토바이가 군부의 고위 지도자를 위협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 베트남은 왜 유독 ‘오토바이 천국’일까: 하노이의 교통은 ‘규칙’이 아니라 ‘예측’
베트남, 특히 하노이를 처음 가면 누구나 놀란다. 신호등도 부족하고, 횡단보도도 애매한데
생각보다 큰 사고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나도 늘 궁금했다. 그래서 베트남 지인에게 물었고, AI에게도 물어봤고, 무엇보다 직접 걸어보며 느꼈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노이 교통은 신호가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노이의 교통은 ‘규칙’이 아니라 ‘예측’이다
하노이의 오토바이는 빠르지 않다. 대부분 20~30km 수준으로 흘러간다. 다들 급가속도 없고, 정지도 없다. 서로를 본다. 그리고 상대의 다음 1초 행동을 예측한다.
신호등보다 눈, 속도, 리듬이 교통을 지배한다. AI도 그렇게 말하더라.
“하노이는 규칙 기반이 아니라 흐름 기반 교통이다.” 듣고 보니 딱 맞는 표현이었다.
■ 하노이 보행자는 왜 뛰지 않을까
하노이에서 길을 건널 때, 현지인들은 거의 뛰지 않는다. 멈추지도 않고,똑같은 속도로 그냥 걸어간다.
그게 생존 방식이다. 왜냐하면 보행자가 일정한 속도로 걸으면 오토바이 운전자는 계산이 가능하다.
“아, 저 사람은 저기까지 가겠구나.”
그래서 속도를 줄이거나 살짝 방향을 틀어 피한다. 반대로 사람이 갑자기 뛰거나 멈추면 오토바이 운전자의 계산이 깨진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라.
“한국은 규칙을 믿는 사회고, 하노이는 행동을 예측하는 사회예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이 시스템은 언제 깨질까. 물론 이 방식도 영원하지는 않다. 속도가 올라가고, 자동차 비중이 커지면 이 ‘예측 시스템’은 쉽게 무너진다.
실제로 하노이도 자동차가 늘면서 사고가 증가하고, 전기 오토바이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위험 요소가 커지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 정부도 신호 체계 강화와 관리로 방향을 틀고 있다.
■ 중국은 왜 자전거였을까, 멕시코는 왜 자동차였을까?
중국의 자전거 문화는 근대 이후의 이야기다. 개인 자동차 소유를 억제하던 사회주의 계획경제, 평탄한 대도시 구조, 그리고 ‘자전거는 생활필수품’이던 시절의 유산이다. 베이징, 톈진, 상하이는 지금도 자전거 친화적이다.
다만 중국도 이제는 달라졌다. 전동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빠르게 늘고 있다. 환경 규제와 경제 성장의 결과다.
중남미는 왜 자동차일까. 그럼 중남미는? 멕시코 시티에서 근무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답이 나온다.
땅이 넓고, 자동차 전제의 도시 구조이고, 경제 수준도 동남아보다 높은 편이다. 고급 오토바이는 종종 봤지만, 생활용 오토바이는 많지 않았다.
■ 길 위의 교통은 그 사회의 초상이다
결국 교통수단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기후, 도시 구조, 경제 수준,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 방식이 모두 담긴 결과다.
동남아에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나 많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들여다보면 바로 오토바이가 너무나 편하기 때문인 이유도 있다.
차량가격이, 자동차의 1/10 가격인 50만~300만 원 내외에 그치는 것은 물론이고 유지비도 거의 들지 않다. 싸고 편리하다는 것이다.
일제 혼다, 스즈키, 야마하 등이 40년 넘게 동남아 원동기 차량 시장을 싹쓸이해왔다. 최근 중국 업체가 그 틈을 파고 들고 있다.
동남아도 변하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고, 대중교통이 늘고, 전기차와 전기 오토바이가 새로운 풍경을 만들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서 사람을 읽는 일은 여전히 그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 아닐까.
오늘도 오토바이가 가득한 동남아의 거리를 떠올리며, 그 질문을 다시 곱씹어 본다.
“왜 여긴, 이렇게 흘러갈까.”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