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 3] 태국-캄보디아 국경의 먼지, 아세안 평화의 금

  • 등록 2025.12.20 01: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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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직접 밟은 국경 비포장길 새록...60년 “회원국간 전쟁 없다” 전통 깨져

 

서정인 전 주아세안 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을 역임한 아세안 10개국과 인연을 갖고 있다. 특히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2023년 외교부 은퇴 후에도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전문가 및 저명인사(ARF EEP) 및 아세안동아시아경제연구소(ERIA) 한국이사로서 아세안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세안익스프레스는 현재 유엔기념공원관리처장을 맡고 있는 서정인 주 아세안대사를 새 칼럼 필진으로 초빙했다. 한국 주요 아세안 외교에서 직접 발로 뛰었던 현장 경험과 넓은 안목으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주는 그의 인사이트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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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태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는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분쟁 지역을 직접 찾은 적이 있다.

 

지도 위에서는 가느다란 선 하나에 불과했지만, 현장은 달랐다. 붉은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길, 간간이 보이는 철조망, 그리고 “여기까지가 태국입니다”라는 군인의 짧은 말. 그 선은 종이 위의 경계가 아니라, 역사와 감정이 켜켜이 쌓인 현실이었다.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이 지난 60여 년간 이룬 최대 성과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회원국 간 전쟁이 없었다는 점”을 든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 태국과 캄보디아의 무력 충돌 소식은 더 씁쓸하게 다가온다. 아세안의 자부심에, 아주 가느다란 금이 가는 소리 같아서다.

 

 

■ 올해 터진 국경분쟁, 훈센을 “삼촌”이라 부른 태국 총리 헌재서 해임

 

이번 분쟁의 시작은 사소해 보였다.

 

2025년 초, 국경을 순찰하던 태국 군인이 지뢰를 밟아 사상자가 발생했다. 태국은 “캄보디아가 고의로 지뢰를 매설했다”고 주장했고, 캄보디아는 “과거 크메르루주 잔존 지뢰가 폭발했을 뿐”이라고 맞섰다. 어느 쪽이든, 이미 개인 지뢰는 국제협약상 불법이다. 그러나 국경에서는 법보다 기억이 먼저 움직인다.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은 정상 간의 전화통화였다. 패통탄 태국 총리와 훈센 캄보디아 상원의장의 통화 내용이 유출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통화 속에서 총리는 훈센을 “삼촌”이라 불렀고, 국경 충돌의 책임을 자국 군 지휘관에게 돌리는 듯한 발언을 했다.

 

 

태국 국민의 분노는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결국 총리는 직무가 정지됐고, 헌법재판소는 해임 결정을 내렸다. 태국 정치에서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지난 17년간 다섯 명의 총리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 갈등을 단순히 ‘말실수’나 ‘외교적 사고’로만 볼 수는 없다. 표면 아래에는 오래된 계산과 기억이 겹쳐 있다.

 

■ 경제: 카지노와 온라인 사기단속, 역사:논란의 씨앗 800킬로미터 국경선

 

하나는 경제다.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에는 카지노와 온라인 사기 조직이 뿌리내리고 있다.

 

태국 정부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사기 단속을 강화하자, 국경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캄보디아 쪽의 이해관계가 흔들렸다. 태국 내 카지노 합법화 논의 역시 국경 카지노 수익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또 하나는 역사다. 1904년과 1907년, 프랑스와 시암(태국) 사이에 맺어진 조약과 지도는 오늘날까지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산맥의 분수령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한다는 원칙은 있었지만, 실제 지도는 프랑스 식민 행정의 편의에 따라 그려졌다. 그 결과, 국경선은 지금도 약 800킬로미터에 걸쳐 흔들린다.

 

 

그 상징이 10세기 힌두교 프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 사원이다. 캄보디아는 1959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고, 사원 자체는 캄보디아의 소유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사원을 둘러싼 주변 영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 ‘침묵’이 분쟁을 남겼다. 2008년 유네스코 등재, 2011년과 2013년의 추가 판결, 그리고 최근 에메랄드 트라이앵글 지역에서의 충돌까지, 역사는 반복된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갈등은 앙코르 제국과 아유타야 왕조의 기억까지 닿아 있다. 한때 대륙 동남아를 호령하던 캄보디아는 쇠퇴했고, 태국은 부상했다. 강대했던 기억과 약해졌던 기억은 국경에서 다시 만난다. 역사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감정일지도 모른다.

 

■ 정치가 외교 무너뜨리는 국경 분쟁의 속살

 

분쟁의 또 다른 이면은 정치다. 특히 정치가 외교를 망치고 있다.

 

물론 현재의 분쟁에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한다. 태국의 왕실-군부 기득권은 탁신 가문을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밀어내고 싶어한다. 캄보디아의 훈센 역시 장남에게 물려준 권력을 민족주의로 단단히 다지고자 한다. 국경은 늘 국내 정치의 가장 쉬운 동원 수단이다.

 

그럼에도 전면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력과 군사력의 격차, 그리고 무엇보다 아세안이라는 울타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세안은 완벽하지 않지만, 회원국 간 무력 충돌을 막아온 집단적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도 말레이시아 의장국의 중재로 휴전이 성사됐고, 미국과 중국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개입했다.

 

다만 마음 한켠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다. 태국과 캄보디아가 중재를 요청한 곳이 아세안이 아니라 국제사법재판소와 강대국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아세안의 평화 메커니즘에 대한 신뢰가 아직도 갈길이 멀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 국경은 정치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나는 다시 그 국경을 떠올린다.

 

먼지 날리던 길, 말없이 서 있던 병사, 그리고 그 선을 넘나들며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 그들에게 국경은 정치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한국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태국·캄보디아·라오스가 맞닿은 에메랄드 트라이앵글에서 소지역 협력은 늘 말뿐이었다. 거창한 외교가 아니라, 환경·문화·관광 같은 기능적 협력부터 차근차근 쌓아간다면 어떨까. 평화를 만드는 일은 때로 조용한 사업 하나에서 시작된다.

 

아세안의 평화는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축적이었다.

 

그 금이 더 넓어지지 않기를, 국경의 먼지가 다시 가라앉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때의 풍경을 오래 붙잡아 본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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