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 9] 아세안공동체는 왜 ‘우리’가 되지 못했나

  • 등록 2026.01.31 08: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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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시민들 ‘아세안 시민’ 인식...아세안 지역 정체성 얇고 취약
대안은 공통 학습모듈, ‘함께 배운 기억’과 ‘공유된 이야기’ 필요하다

 

2015년 아세안 공동체가 출범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국민에게는 ‘먼 이야기’다. 역내 무역과 투자는 늘었고, 정상과 외교장관 회의는 정례화됐지만, 일상에서 “아세안 덕분에 삶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시민은 많지 않다. 아세안이 하나의 공동체라면, 왜 ‘우리(We- feeling)’라는 감각은 이렇게 약할까.

 

아세안 공동체는 세 개의 축으로 추진돼 왔다. 경제공동체(AEC), 정치안보공동체(APSC), 사회문화공동체(ASCC)다. 성과의 속도와 체감도는 이 순서와 거의 일치한다. AEC는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 가치사슬을 중심으로 가장 빠르게 진전됐다. 역내 교역과 외국인 투자는 확대됐고, 아세안은 ‘하나의 생산기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혜택은 대체로 기업과 투자자에게 먼저 돌아갔고, 일반 국민의 체감은 제한적이었다.

 

정치안보공동체는 엘리트 중심의 영역이다. 분쟁을 관리하는 대화와 규범의 장으로서 아세안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는 외교관과 안보 전문가의 언어에 가깝다. 합의와 비간섭의 원칙은 안정에는 기여했지만, 국민에게 ‘공동체의 실감’을 주기에는 거리감이 크다.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더디게 움직여 온 축이 사회문화공동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분야야말로 ‘사람 중심’, ‘국민 중심’을 표방한다. 교육, 문화, 복지, 정체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럼에도 성과가 체감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간 아세안 공동체는 시장과 제도, 그리고 엘리트 협의에 과도하게 집중해 왔고, 국민의 정체성과 경험을 형성하는 영역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을 투입해 왔다.

 

그 결과, 흥미로운 괴리가 나타난다. 많은 동남아 시민들은 ‘아세안’을 알고 있고, 형식적으로는 자신을 ‘아세안 시민’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세안이 “엘리트 중심이고 일반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식도 적지 않다. 인지와 소속감은 높아졌지만, 생활 속 체감과 참여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세안 사회에서 여전히 가장 강력한 정체성은 종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이다. 그 위에 얹혀야 할 ‘아세안 지역 정체성’은 아직 얇고 취약하다. 공동체는 제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함께 배운 기억’과 ‘공유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세안 정체성 조성을 위한 여러 방안 가운데,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통의 아세안 역사·사회 교육은 가장 근본적인 해법 중 하나다. 물론 유럽연합조차 단일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논쟁을 겪었듯, 아세안에서 하나의 ‘공통 역사서’를 만드는 일은 정치적으로 쉽지 않다. 각국의 국가 건설 서사, 국경과 소수민족 문제, 식민과 독립의 기억은 여전히 민감하다.

 

그러나 선택지는 ‘단일 교과서’만이 아니다. 현실적인 대안은 공통 학습모듈이다. 해양 교역의 역사, 식민지 경험과 독립, 냉전과 발전 경로, 이주와 다문화, 재난과 기후위기처럼 동남아가 공유해 온 주제를 중심으로, 각국 교과과정에 유연하게 삽입할 수 있는 공동 교육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특정 국가의 서사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연결돼 왔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형성할 수 있다.

 

이미 아세안 내부와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 차원에서 이런 시도는 시작됐다. 다만 아직 학교 현장까지 충분히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사회문화공동체가 진정 ‘국민 중심’이 되려면, 회의 문구가 아니라 교실과 교사, 그리고 학생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한국 외교의 기여 가능성도 분명해진다. 한국은 시장이나 안보 담론보다, 교육·청년·문화 협력에서 비교우위를 가진 파트너다. 단일 역사서를 대신할 공통 학습모듈 공동개발, 아세안 교사 네트워크와 연수, 청년 교류를 역사·사회 프로젝트형 학습과 연계하는 방식은 아세안 사회문화공동체의 취약한 고리를 실질적으로 보강할 수 있다.

 

필자가 아세안 대사시 2016년 한아세안 협력기금 사업을 프로젝트 방식에서 프로그램 방식으로 전환할 때 교육, 문화, 환경을 우선 협력 분야로 선정(그후 우선 분야 확대)한 바 있다. 우리는 미국, 중국, 일본, 인도, EU 등 11개 대화상대국 중 유일하게 부산에 아세안 문화원을 갖고 있고, 서울 한아세안 센터의 우선 협력 분야의 하나도 문화다. 아세안 정체성 함양을 위한 제도가 우리 만큼 잘 된 대화상대국은 없다.

 

아세안 공동체의 다음 단계는 분명하다. ‘하나의 시장’을 넘어 ‘하나의 우리’로 가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이들이 교실에서 배우는 이야기와 서로를 이해하는 경험일지 모른다. 공동체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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