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남프엉(Nam Phương) 황후와 바오다이(Bảo Đại) 황제의 한국어본이 베트남에서 나왔다.
바오다이 황제와 남프엉 황후는 베트남 근현대사의 마지막 군주제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 자료집 『남프엉 황후와 바오다이 황제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어본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베트남 여성출판사(Vietnam Women’s Publishing House)에서 출간된 연구 기반 역사서다.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후였던 남프엉 황후의 삶과 시대를 깊이 있게 추적한 작품이다.
이 책은 단순한 전기나 역사 서술을 넘어, 실제 역사 현장을 찾아가며 수집한 자료와 인터뷰, 문헌 조사 등을 토대로 구성된 현장 기반 역사 탐구 기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두 저자인 빙다오(Vĩnh Đào)와 응우옌 티 타잉 투이(Nguyễn Thị Thanh Thúy)는 베트남과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직접 방문하며 약 3년에 걸쳐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검증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연구 과정을 통해 이 책은 베트남 왕조의 마지막 시기를 대표하는 두 인물, 바오다이 황제와 남프엉 황후의 실제 삶과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한국어본은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우리 교민과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베트남에서 출간되었다는 것.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다.
■ 베트남 마지막 황후의 삶을 추적한 역사적 여정
남프엉 황후(1913~1963)는 베트남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본명은 응우옌 흐우 티 란(Nguyễn Hữu Thị Lan).
그녀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의 황후이자, 베트남 역사상 생전에 공식적으로 책봉된 두 번째 황후였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공식 기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녀에 대한 역사 자료는 극히 일부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 식민지 시기에 발간된 『인도차이나의 군주와 명사들(Souverains et Notabilités d’Indochine)』이라는 자료에서조차 남프엉 황후에 대한 기록은 단 한 페이지에 불과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한다. 저자들은 남프엉 황후와 바오다이 황제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기록을 검증하고, 서로 다른 기록들 사이의 모순을 분석하며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려 노력하였다.
■ 3년에 걸친 베트남-프랑스 현장 조사와 국제적 자료 수집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현장 조사 중심의 연구 방식이다.
빙다오는 프랑스 소르본대학교(Sorbonne University)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로 프랑스와 베트남의 문화·역사 교류 연구로 잘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오랫동안 학문 활동을 이어오며 베트남 왕조사와 식민지 시대의 역사 연구에 집중해 왔다.
또 다른 공동 저자인 응우옌 티 타잉투이는 사회학 학자로 ‘어머니들의 모임’ 회장이며, 여성·아동 및 역사 관련 저서의 공동 저자이다. 두 학자는 남프엉 황후의 삶을 단순한 왕실 전기가 아니라 정치사·여성사·문화사가 교차하는 역사 서사로 복원해 냈다.
저자들은 약 3년에 걸쳐 베트남 전역을 여행하며 황후와 황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들을 직접 방문하였다. 조사 지역은 사이공, 띠엔장, 투득, 쩔런, 비엔호아, 달랏, 꼰뚬, 퀴논, 후에, 하노이 등 베트남 주요 도시를 포함한다.
또한 연구는 베트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저자들은 프랑스까지 직접 방문하여 바오다이 황제와 남프엉 황후가 머물렀던 장소들을 조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 책은 단순히 개인의 전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함께 보여준다.
바오다이 황제와 남프엉 황후가 살아간 시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겹쳐 있던 시기였다. 프랑스 식민 통치,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독립운동, 1945년 바오다이 황제의 퇴위,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 선언, 특히 1945년 바오다이 황제의 퇴위는 143년 동안 지속된 응우옌 왕조의 통치가 끝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베트남 정치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남프엉 황후의 삶 역시 이 역사적 전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 남프엉 황후의 가문과 성장 배경...새로운 역사적 사실 발견
저자들의 연구는 기존 역사 서술에서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여러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남프엉 황후의 실제 생년월일이다. 기존 기록에서는 황후의 생일이 1914년 12월 4일로 알려져 있었지만, 저자들의 조사 결과 실제 생일은 1913년 11월 14일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이공 대성당 세례 기록, 출생 신고 문서, 프랑스 국립 해외문서 보관소 자료를 통해 검증되었다.
이처럼 책은 기존에 널리 알려져 있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다시 검토하며 역사 서술의 정확성을 높이고 있다.
책은 남프엉 황후의 가문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한다. 황후의 본명은 잔 마리엣 응우옌 티란(Jeanne Mariette Nguyễn Thị Lan)이며, 사이공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베트남 남부의 부유한 가톨릭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서구식 교육과 교양을 쌓으며 성장했다.
외조부인 레팟닷(Lê Phát Đạt)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큰 재산을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이공에 성당을 건립하고 다양한 사회 활동을 지원하며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남프엉 황후의 아버지 응우옌 흐우하오 역시 초기에는 가난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었지만, 이후 사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형성하였다.
■ 황태자와의 운명적인 만남...생전에 공식 책봉된 두 번째 황후
남프엉 황후와 바오다이 황제의 만남은 1930년대 초 이루어졌다. 당시 바오다이는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었으며, 이후 귀국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결국 1934년 두 사람은 후에 황궁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응우옌 티란은 남프엉 황후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남프엉’이라는 칭호는 ‘남쪽의 향기’를 의미한다.
이 사건은 베트남 왕실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오다이 황제는 결혼 직후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며, 이전 왕조 관례를 깨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로써 남프엉 황후는 응웬 왕조 역사에서 생전에 공식 책봉된 두 번째 황후가 되었다.
후에 황궁에서 남프엉 황후는 단순한 왕비 이상의 존재였다. 그녀는 여성 교육과 사회복지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선 사업을 펼쳤다. 궁정에서도 절제된 태도와 지적 품위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교육을 받은 현대적 여성임에도 베트남 전통 의복 아오자이를 입고 궁정 의례를 지키는 모습은 당시 베트남 사회가 경험하고 있던 전통과 근대의 공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책의 후반부는 왕조 몰락 이후의 삶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정치적 격변 속에서 바오다이 황제는 퇴위를 선언한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는 약 143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막을 내렸다.
이후 남프엉 황후는 다섯 자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남부의 칸 지역에서 생활하다가 이후 프랑스 중부의 작은 마을 샤브리냑으로 이주해 조용한 삶을 살았다. 특히 그녀의 말년은 매우 은둔적인 삶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많은 역사적 궁금증을 남기고 있다.
■ 역사적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베트남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
『남프엉 황후의 발자취를 따라』는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잊힌 역사적 기억을 복원하려는 노력이다. 저자들은 신문 기사, 잡지 자료, 인터뷰, 기록 문서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가능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제시하려 했다.
또한 남프엉 황후를 직접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 샤브리냑 마을의 주민들과도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책은 개인의 삶과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베트남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동남아시아 정치·사회 연구자, 식민지 시대와 탈식민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 베트남 왕실 역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왕조의 몰락과 현대 국가 형성이라는 역사적 전환기를 개인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문적 가치가 높다.
■ 역사와 인간의 이야기를 함께 담은 책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한 시대의 격동 속에서 살아간 한 여성의 삶, 그리고 '왕조의 마지막 황후'라는 역사적 역할을 동시에 조명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베트남 근현대사의 중요한 전환기를 더욱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1963년 세상을 떠났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우아하고 품위 있는 황후로 남아 있다.
『남프엉 황후와 바오다이 황제의 발자취를 따라』는 베트남 왕조의 마지막 시기를 살아간 두 인물의 삶을 통해 역사와 인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자들의 끈질긴 조사와 연구는 베트남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들을 다시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역사적 시각을 제공한다.
이 책은 베트남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자, 역사 속에서 잊힌 인물들의 삶을 되살리는 의미 있는 기록으로 평가될 것이다.
배양수 교수는 번역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프엉 황후의 삶은 단순한 왕실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의 역사적 전환을 상징하는 인간의 기록입니다. 제국과 식민,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는 역사 속에서 한 여성의 삶이 어떻게 시대의 굴곡을 통과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어 ”이 책은 베트남 왕조의 마지막 순간과 식민지 시대의 복합적인 역사를 동시에 보여주는 문화사적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 한국어 번역에 배양수 교수와 응우옌 티 투 번-레 투이 쭝 참여
한국어 번역에는 한·베 양국 학자들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배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가 번역을 맡았다. 베트남에서는 응우옌 티 투 번과 레 투이 쭝이 공동 번역자로 참여했다.
공동 번역자 중 응우옌 티 투 번은 인류학 박사로 현재 하노이 국립외국어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베트남 문학과 문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번역가이자 소설가로도 활동하며 여성 문화와 가족, 젠더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학술서와 번역서를 발표해 온 연구자인 응우옌 티 투 번은 국제한국어·한국문화교육학회(SKLCE) 부회장, 베트남작가협회 및 하노이작가협회 회원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투이 쭝은 한국어 교육 석사이자 현재까지 한·베트남어 번역 도서 약 30권을 번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