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 10] 아세안, ‘By-Default’ 리더십의 힘

  • 등록 2026.02.07 10: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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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서지 않고 살아남는 법’...미·중 경쟁 속 아세안은 왜 중심에 서는가

 

 

동남아 외교를 오래 지켜본 이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ASEAN의 by-default leadership(방임적 리더십)”은 의도적으로 질서를 설계해 끌고 가는 리더십이 아니라, 강대국이 서로 불편해 주도하지 못하는 공간을 결과적으로 아세안이 메우며 회의를 굴려가는 리더십을 뜻한다.

 

반대로 EU 등 선진 지역기구가 국제무대에서 보여주는 방식은 by-design leadership—처음부터 규범과 제도를 설계하고, 기준을 제시하며, 따르지 않으면 비용이 따르는 리더십이다.

 

이 두 방식은 겉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작동 원리는 완전히 다르다.

 

ASEAN의 리더십은 ‘의제 설정’이 아니라 ‘판 유지’에 가깝다. 아세안안보포럼(ARF), 아세안+3(APT), 동아시아정상회의(EAS), 확대아세안국방장관회의(ADMM-Plus)같은 협의체에서 아세안의 목표는 늘 같았다.

 

누구도 불편해서 회의장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 그래서 성명은 모호하고, 표현은 절제되어 있으며, 합의는 최소공약수에 머문다. 그 대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인도, 호주가 같은 테이블에 앉는 구조는 유지된다. ‘아세안중심성(ASEAN Centrality)’는 권위가 아니라, 플랫폼 통제력이다.

 

반면 EU의 리더십은 질서를 설계한다. EU 일반데이터보호협정(GDPR), 디지털시장법, 그린딜처럼 규범을 만들고, 기준을 제시하고, 따르지 않으면 제재나 비용이 발생한다. 리더십의 본질이 ‘모두가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왜 동남아에서는 by-default가 작동했을까.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강대국 사이에서 ‘줄 서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발전시켜 온 공간이다. 그래서 아세안의 집단적 본능은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갈등이 폭발하지 않게 관리하는 데 맞춰져 있다. 남중국해, 미얀마, 우크라이나, 가자 사태에 대한 아세안 성명이 늘 모호하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 와중에도 회의는 계속 열리고, 채널은 유지된다. 이것이 by-default 리더십의 성과다.

 

21세기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이런 리더십이 가능할까. 시카고대의 존 미샤이머(John Mearsheimer)는 회의적이다. 패권 경쟁 구조에서는 중립지대가 사라지고, 중견국도 결국 한쪽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아메리칸대의 아미타프 아차리아(Amitav Acharya)는 아세안이야말로 그런 압력 속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된 질서라고 본다. 조지타운대의 아브라함 뉴만(Abram Newman) 역시 공급망과 기술, 데이터까지 ‘무기화’되는 시대일수록, 이런 완충 플랫폼의 가치가 더 커진다고 지적한다.

 

현실은 아차리아와 뉴만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미·중 경쟁이 격화될수록, 강대국이 서로 불편해하는 공간에서 아세안이 회의를 소집하고, 의제를 관리하고, 대화를 지속시키는 역할은 더 필요해진다. 해결은 못해도, 단절은 막는다. 질서를 만들지는 못해도, 질서가 깨지는 것을 늦춘다.

 

EU식 by-design 리더십이 ‘질서를 만드는 힘’이라면, 아세안식 by-default 리더십은 ‘질서가 깨지지 않게 버티는 힘’이다. 미·중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전자가 더 어려워지고, 오히려 후자의 공간이 커진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금 같은 시대에 아세안의 중앙성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아세안은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모두가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오늘의 국제정치에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리더십이 된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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