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벽두, 세계는 또 한 번 기존 국제정치의 문법이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은 1월 3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를 공습한 뒤 니콜라스 마두로(Nicolas Maduro) 대통령을 미국으로 압송했다. 참수작전이었다. 지난해 말 베네수엘라 유조선을 나포했을 때만 해도, 한 국가의 현직 대통령을 치외법권적으로 체포-구금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이는 트럼프식 ‘던로주의’(Dunlawism, 먼로주의를 빗댄 말)의 본격적 발현이다. 전통적 고립주의도,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도 아닌, 힘에 기반한 적극적 중남미 개입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현대판 먼로주의 추론(corollary)이라 부른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장면은 아니다. 1990년 1월, 미국은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를 마약 범죄 혐의로 체포하기 위해 파나마에 지상군을 투입한 바 있다. 그래서 언론은 평행이론을 꺼내든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차원이 다르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힘의 정치가 국제질서를 압도하는 ‘정글의 법칙’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중국의 대만 무력 위협, 남중국해 무력 시위를 도덕적으로 비판할 명분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 금지’라는 국제법의 대원칙은 종잇조각이 되었다. 우리는 무질서의 시대, 각자도생의 시대로 들어섰다.
미국이 우리 동맹이고, 오래 정부에 몸담았던 내가 너무 트럼프를 깎아내렸다면서 "마두라와 같이 인권을 유린한, 세계질서를 문란케한 부도덕, 패륜아에 대한 응징의 뉘앙스"를 살짝 추가하면 어떨까 하는 지인의 코멘트도 있었었다.
유엔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논평을 냈지만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중남미에서도 반응은 미미하다. 트럼프와 각을 세우고 있는 콜롬비아 대통령과 일부 전직 좌파 정상들만 비판에 나섰다. 중남미의 맹주인 멕시코는 아직 침묵 중이다. 외교 관행을 아는 이들에겐 이례적인 장면이다. 원칙보다 실리를 염두에 둔 선택일 것이다.
트럼프는 침공이유로 마약 퇴치를 내세우고 있으나 숨은 3가지 의도는 에너지 안보, 중국 이란의 중남미 영향력 배제를 노리는 지정학적 경쟁과 중남미 반미 세력의 차단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는 마두로 체포 이후 안정한 민간 정권 이양까지 통치한다며 ‘베네수엘라의 안정’을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자꾸만 아프가니스탄의 장면이 겹쳐진다.
미국은 2001년 테러의 배후로 탈레반을 지목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0년간 국가 재건을 시도한 끝에 2021년 탈레반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철수했다. 2011년 외교부 남아태 심의관 시절, 바그람 미군기지를 방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바그람 기지를 통해 미군은 결국 떠났다.
미국은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ávez) 대통령 이후 10여 년 넘게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베네수엘라를 과연 안정시킬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외부의 군사력은 정권을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사회를 재건하지는 못한다. 미국은 자신의 ‘안마당’에서 또 하나의 수렁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중남미판 베트남의 악몽이 재현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베네수엘라 이후의 다음 타깃은 쿠바가 될 수도 있다. 멕시코 대사 재직 시절 쿠바를 겸임하며 여러 차례 방문했고, 현지 한인 후손들을 만난 기억이 있다. 경제적 곤궁 속에서도 버텨온 1000여 명의 한인 사회다. 만약 트럼프의 군사 행동이 쿠바로 확산된다면, 그들의 안위부터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의 미국은 ‘포스트 베네수엘라’를 말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인내와 제도, 그리고 국제 규범이다. 그것을 포기한 순간, 승자는 없고 혼란만 남는다. 지금 미국은 세계를 이끄는 길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무너질 위험한 길 위에 서 있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