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원의 동티모르 워치 13] 유네스코가 ‘긴급구조’한 직물, 타이스

  • 등록 2026.02.28 21: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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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긴급 보호가 필요한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지역적 정체성 상징

 

딜리의 주동티모르 한국대사관 접견실에는 특별한 타이스(Tais)가 놓여 있다. 화려한 전통 문양 사이로 서툴지만 선명하게 수놓인 한글, "감사합니다.“

 

동티모르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동티모르국립대(UNTL) 학생들이, 자신들의 유학길을 내준 한국 대사에게 선물한 것이다. 학생들이 며칠 밤낮을 꼬박 들여야만 완성되는 이 직물에 '감사합니다'라는 한글을 새겨 넣은 모습을 보는 것은 필자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무게감 있는 선물인 타이스에, 한국에서 배운 따뜻한 말을 얹었다.

 

대사관의 타이스가 ‘소리 없는 감사’라면, 딜리 국회 의사당(Parlamento Nacional) 본회의장의 타이스는 ‘국가’ 자체다. 들어서면 의원들의 좌석보다 먼저 눈에 꽂히는 것이 벽면을 따라 걸린 형형색색의 타이스들이다. 동티모르의 지자체를 상징하는 이 직물들은 저마다 문양과 색상이 다르다.

 

로스팔로스의 타이스에는 악어와 닭이 이깟(Ikat) 기법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고, 옆에 걸린 오에쿠시의 것은 짙은 주황빛 꽃무늬가 전혀 다른 세계를 펼친다. 글자를 몰라도 옷만 보면 어느 고향 사람인지 알 수 있다던 옛말처럼, 국회 벽면은 동티모르의 모든 지역적 정체성이 한자리에 모인 파노라마다.

 

2021년 유네스코가 타이스를 '긴급 보호가 필요한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좁은 국토 안에서 이토록 다양한 문양이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의 삶 전체를 관통하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유네스코는 높이 샀다.

 

수백 년간 동티모르 다양성을 지켜온 것은 문자가 아니었다. 어머니에서 딸로, 할머니에서 손녀로. 허리에 베틀 끈을 감고 나란히 앉은 여인들이 면사를 천연 염료로 물들여 한 올 한 올 엮으며, 말없이 손끝으로 가르치고 눈짓으로 배웠다. 각 부족의 문양과 염색 비법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여성들만의 비밀 언어'였고, 특정 문양의 의미와 조합은 해당 공동체의 여성 장로만이 온전히 알고 있는 구술 지식이었다.

 

이 조용한 전승이 가장 절박했던 시간은 인도네시아 점령기(1975~1999)였다. 언어가 금지되고 집회가 차단된 24년, 산골 마을의 어머니들은 점령군이 빼앗을 수 없는 유일한 것—자기 부족의 문양—을 베틀 위에서 지켜냈다. 선언문도 없고 조직도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파괴할 수도 없었던 이 저항은 동티모르 전역을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했다. 오늘날 국회 벽면에 걸린 지역의 타이스가 모두 제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 시절 베틀을 놓지 않았던 여인들 덕분이다.

 

점령의 어둠을 견뎌낸 타이스는 이제 세계 무대로 걸어 나왔다. 올해 5월, 베니스 비엔날레 아르세날레에서 90대 직조 장인 베로니카 페레이라 마이아의 'Tais Don'이 유럽 관객 앞에 처음 펼쳐진다. 1991년 산타크루스 학살 희생자의 이름을 한 올 한 올 직조한 이 작품은, 베틀 위의 독립운동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한국과의 접점도 넓어지고 있다. 2026년 한국국제교류재단(KF)은 티모르 에이드(Timor Aid)와 협력하여 타이스 홍보하고 한다. 젊은 디자이너 크리스 라모스는 타이스를 현대적 재킷과 드레스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화려한 무대의 그림자는 짙다. 동티모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타이스로 감싸고, 사람이 죽으면 타이스로 덮는다. 삶의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모두 이 직물 안에 있다. 그런데 지금 딜리 시장에는 중국과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찍어낸 '프린트 타이스'가 저가로 관광객을 유혹한다. 그 천조각에는 지역의 고유한 색깔도, 직조공의 기도도 없다. 며칠 밤낮을 들여 짠 수직 타이스는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기술을 가진 여성들은 늙어가고, 젊은 세대는 베틀보다 공장을 택한다. 유네스코가 '보존'이 아닌 '긴급 구조'를 선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타이스는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발리마 산골에서 새벽빛을 받으며 엮이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이다. 점령의 어둠 속에서도 끊이지 않았던 이 소리 없는 언어가 기계 소음에 묻히지 않도록 지켜내는 활동, 그것이 유네스코가 '긴급 보호'를 선언한 진짜 이유가 아닐까?

 

글쓴이=최창원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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