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양수의 Xin chào4] 베트남 홍득법은 여성의 지위를 높였는가?

  • 등록 2025.12.09 08: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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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봉건사회에서 법과 일상의 언어가 그려낸 여성의 이중적 초상

 

아세안(ASEAN)은 동남아 10개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성원은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대륙의 5개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브루나이 등 해양국 5개국이다.

 

최근 한국과 관련에서 가장 큰 나라가 베트남이다. 삼성전자 등 한국 글로벌이 진출하고, 교민도 급속히 늘어나고, 한국 유학생 중 중국에 이어 가장 큰 나라가 베트남이다. 한국관광객이 가장 찾는 동남아 국가도 베트남이다.

 

이렇게 급속히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아세안익스프레스가 생활 속에서 찾아보는 베트남의 언어, 습속, 그리고 문화 등을 조명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부산외대 교수로서, 그리고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인 배양수 교수의 베트남 시공간 여행을 동반할 수 있다. [편집자]

 

 

■ “법적으로 높았던 여성의 지위”라는 통념

 

베트남 봉건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문장은 “베트남 여성의 지위는 동아시아 유교 사회 중 비교적 높았다”라는 평가다. 이 주장의 근거는 주로 15세기 레 왕조(黎朝) 시기에 제정된 홍득법(洪德法), 공식 명칭은 국조형률(國朝刑律, Quốc triều hình luật)에 있다.

 

이 법전은 여성에게 상속권과 재산권을 인정하고, 일정 조건에서 이혼권을 보장함으로써 여성의 법적 주체성을 부분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법률 조항은 사회 현실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이상적 규범의 ‘선언’일 뿐이다. 따라서 여성의 실제 삶이 어떠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식 법체계뿐 아니라, 민중의 삶과 감정이 응축된 속담과 까자오(ca dao 구전 민요로 가락은 사라지고 노랫말만 남아 있는 구비문학의 한 갈래)까지 함께 검토해야 한다. 이 글은 홍득법과 민속 언어의 대비를 통해 “법적으로 높았다는 여성의 지위”가 과연 실질적 현실이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 홍득법 속 여성: ‘권리 있는 주체’로의 제한적 승인

 

홍득법은 봉건사회에서 보기 드문 방식으로 여성을 재산의 주체로 인정하였다. 먼저 상속 제도에서 딸은 아들과 함께 부모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고, 장남이 없을 때 장녀가 제사를 맡아 향화(제사용 상속재산)를 잇는 것도 허용되었다. 이는 혈통 계승을 오직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던 종법적 관념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둔 제도적 조치라 할 수 있다.

 

재산권 규정에서도 홍득법은 부부 재산을 남편의 고유 재산, 아내의 고유 재산 그리고 혼인 이후 형성된 공동재산으로 구분하였다. 특히 아내가 혼인 시 친정에서 가져온 재산은 시가(媤家)의 소유로 자동 편입되지 않고 ‘아내의 고유 재산’으로 인정되었다. 이는 여성을 독자적 재산 주체로 간주한 사례이며, 당시 동아시아 봉건 질서 안에서는 다소 이례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혼인과 이혼에 관한 규정 역시 주목된다. 남편이 장기간 부재하거나 아내를 부당하게 학대할 경우, 여성은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가졌으며, 여성에 대한 폭력 또한 처벌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조항만 놓고 보면 홍득법이 여성을 단순한 종속자가 아닌 일정한 권리를 가진 법적 주체로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보호’와 ‘권리 부여’는 엄격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홍득법이 보호 대상으로 상정한 여성은 어디까지나 정실부인(嫡妻)에 한정되며, 첩(妾)에게는 동일한 권리나 보호가 적용되지 않았다. 첩은 법적으로 낮은 신분에 속하였고, 폭력·학대·이혼 등에서 정실부인이 누리던 법적 보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홍득법의 여성 보호 조항은 여성 전체를 포괄한 평등한 권리 보장이라기보다, 가부장적 가족 구조 안에서 ‘정실부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제한적 장치에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홍득법이 제도적으로는 여성에게 일정한 권리와 법적 가능성을 열어주었음에도, 이러한 조치가 여성의 일상적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 사회를 지배한 유교적 가부장제 질서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홍득법은 여성을 ‘권리 있는 주체’로 제한적으로 승인하였지만, 그 범위는 협소했고 적용 역시 계층화되어 있었으며, 실제 사회적 현실과의 괴리도 컸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삼종 사덕...유교적 규범과 여성 존재의 구조화

 

베트남 봉건사회를 지배한 도덕 이념은 삼종 사덕(三從四德 tam tòng, tứ đức)이었다. 이는 여성의 삶을 철저히 관계적 존재로 규정하는 체계였다. 여성은 평생 아버지, 남편, 아들을 따라야 하며, 자기 욕망보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삼종은 여성이 독립적 판단 주체가 아니라 영속적 복종의 대상으로 설정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덕 또한 여성의 삶을 가사 노동, 외모, 언어 태도, 정절과 같은 영역으로 한정하며 공적 영역으로부터 배제하였다. 이 규범은 여성의 삶을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 ‘도덕적 상징’으로 환원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법률보다도 훨씬 강하게 여성의 삶을 규율했으며, 구비문학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재현된다.

 

■ "딸 열보다 아들 하나가 낫다" 속담과 ca dao에 투영된 여성의 실존

 

남아 선호와 여성 존재의 지워짐을 표현한 “아들은 하나만 있어도 있는 것이고, 딸은 열이 있어도 없는 것이다. 一男曰有 十女曰無 Nhất nam viết hữu, thập nữ viết vô”라는 속담은 남아 선호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표현에서 여성은 아무리 많아도 ‘있음’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는 여성의 존재가 혈통 계승 논리 속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음을 뜻한다.

 

법적으로 딸에게 상속권이 있었음에도, 민중의 인식 속에서 딸은 여전히 ‘가계를 잇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 틈새는 여성의 지위가 단순히 법률로는 상승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운명성과 수동성을 노래한 “여자의 운명은 두레박 신세. Phận gái mười hai bến nước”라는 까자오가 있다. 이는 여성의 삶을 열두 개의 나루터에 비유하며, 어느 나루에 닿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고 노래한다. 이는 여성의 삶이 자기 선택이 아니라 ‘어떤 집으로 시집가느냐’에 따라 좌우됨을 상징한다.

 

“내 몸은 장터에 나부끼는 비단과 같아, 누구 손에 들어갈지 모른다. Thân em như tấm lụa đào, phất phơ giữa chợ biết vào tay ai”라는 까자오 역시 여성의 존재가 하나의 상품처럼 타인의 선택에 맡겨지는 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여성은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라 선택당하는 객체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여성이 법적으로 권리를 보유했는지와 관계없이, 실질적 삶에서는 강한 운명론과 수동성 속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 "딸은 남의 집의 사람" 딸과 며느리: 소속 없는 존재

 

“딸은 남의 집의 사람이다. Con gái là con người ta”라는 말은 여성의 존재가 친정에서도, 시가에서도 온전히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딸은 결국 떠날 존재이며, 본가의 영속적 구성원이 아니다.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시적 존재로 간주하며, 사회적으로 ‘잠정적 소속’을 가진 불안정한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여성의 상속권이나 법적 권리와 무관하게 존재론적 배제를 의미한다.

 

 

■ 시집살이 며느리 삼중 의무, 여성의 고통과 희생의 미화

 

속담과 까자오에서 여성의 삶은 고통과 인내의 서사로 반복된다. 여성은 시집살이 속에서 며느리로서 삼중의 의무를 수행하고, 노동과 희생을 통해 가정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며느리는 쟁기 끄는 소처럼 힘들다. Làm dâu khổ như trâu kéo cày”라는 표현은 며느리의 노동 강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여성이 ‘집안의 노동력’으로 기능했음을 암시한다.

 

여성의 고통은 종종 미화되었다. “여성은 참고 견뎌야 한다. Phụ nữ phải biết cam chịu.”라는 표현은 여성의 인내를 도덕적 미덕으로 전환한다. 이는 구조적 억압을 개인의 성품 문제로 환원시키는 담론이다.

 

■ 가질 수 있었지만 제약 첩첩...법과 현실 사이의 구조적 간극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규범 체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이 실제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종종 이론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법과 현실 사이의 구조적 틈은 여러 요인에 의해 발생하며, 이는 법이 의도한 목적을 달성한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홍득법은 형식적으로 여성에게 일정한 권리를 부여했지만, 그것은 곧 여성의 실질적 지위 향상을 의미하지 않았다. 여성은 권리를 ‘가질 수 있었지만’, 행사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회적 제약과 도덕적 압박에 놓여 있었다.

 

법이 말하는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주체’였지만, 민속 언어가 말하는 여성은 ‘운명에 떠밀리는 고통의 존재’였다. 이 이중성은 봉건 베트남 여성의 실제 위치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다.

 

■ 2000년 대 이후 주체 등장...여성 담론의 역사적 변화와 그 의미

 

여성 담론의 변화를 살펴보면, 전통 사회에서 여성은 순종과 희생의 상징이었고, 식민지기에는 ‘민족의 어머니’로 재구성되었다. 혁명기에는 ‘여성 전사’라는 이미지가 강조되었지만, 이는 해방된 주체라기보다 국가 이데올로기의 도구였다.

 

200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여성은 자신을 말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이는 베트남 사회에서 여성 권리와 평등 담론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역으로 말하면, 봉건시대 여성의 고통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된 것이었다.

 

■ “높았다”기보다 “이중적”...가부장제 질서 속 종속 위치 '눈물'과 '한숨'

 

따라서 베트남 봉건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단순히 “높았다” 혹은 “낮았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적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더 정확한 진술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베트남 봉건사회에서 여성은 법적으로 일정한 권리를 인정받았으나, 사회문화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강고한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홍득법은 여성의 권리를 말했지만, 속담과 까자오는 여성의 고통을 노래했다. 이 두 언어 사이의 틈새야말로 봉건 여성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 여성의 진짜 위치는 법전의 문장이 아니라, 그들이 흘린 눈물과 노래한 한숨 속에 존재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제도적 평등과 사회적 평등은 전혀 동일하지 않으며, ‘법이 허용한 권리’는 ‘삶이 체감한 현실’과 언제나 긴장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긴장을 인식하는 순간, 베트남 봉건 여성의 존재는 더 이상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성평등 논의의 출발점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배양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박명기 기자 highnoon@aseanex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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