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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글로발로 앙코르4] 크메르 왕국의 영웅들② 동 메본과 프레 룹

동 메본과 프레 룹이 하늘궁전 창시자, 앙드레 말로 문화재 밀반출 현장 체포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초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석조사원이다. 30여 년간 매일 2만 5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지어졌다. 앙코르 와트는 400여 년 동안 밀림 속에 방치되었다 1860년 우연히 발견된 세계 7대불가사의 중 하나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벗어나자 앙코르 와트에도 예전처럼 외국인 관광객이 붐비는 ‘관광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지난해는 전년 비해 약 50여만명이 늘어났다. 아세안익스프레스가 조성진 기자와 함께 '왕국의 사원' 앙코르 와트 ‘시간여행’을 떠난다.  풍경에 새로운 숨길을 불어넣는 그의 '역사인문기행'에 동참해보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 동 메본과 프레 룹, 하늘 궁전을 세운 앙코르 예술의 창시자

 

아버지 인드라바르만 1세와 아들 야소바르만 1세가 나라의 초석을 다진 지 30년이 흘러 크메르의 아홉 번째 왕 라젠드라바르만 2세(재위 944~968)는 전왕의 자리를 빼앗다시피 하여 왕위에 올랐다. 왕은 됐지만 왕위 계승의 명분이 없어,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명분을 만들려면 자신의 외삼촌인 야소바르만 1세를 내세워야 했다. 야소바르만 1세의 아들, 즉 조카가 자야바르만 4세(재위 928~942)에게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자야바르만 4세는 왕도를 코 케르(Koh Ker)로 옮기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20년 가까이 방치됐던 야소다라푸라로 왕도를 다시 옮기고 데바라자 의식을 거행했다. 야소다라푸라는 야소바르만 1세가 세운 사원 도시이고, 데바라자 의식은 “왕은 신과 같은 존재로서, 신의 권능으로 이 땅을 다스리겠다”고 제신에게 고하는 의식이다.

 

야소바르만 1세를 기리기 위해 아들이 만들기 시작했던 박세이 참크롱(Baksei Chamkrong)도 완공시켰다. 박세이 참크롱은 프놈 바켕에서 아주 가깝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야소바르만 1세가 만든 인공 저수지인 야소다라타타카(동 바라이) 한가운데 야소바르만 1세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는 사원 ‘동 메본’을 건립했다. 메본은 ‘은총이 넘치는 어머니’란 뜻이다. 수상 사원이라 기단이 높지 않다. 동 바리이 네 귀퉁이에는 ‘신성한 갠지스강의 여신인 강가(Ganga)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비문을 세웠다. 어머니가 갠지스강의 여신을 상징하는 강가와 같은 존재임을 나타냄으로써 자신도 여신의 아들, 즉 신왕(=데바라자)임을 표시한 것이다.

 

 

정통성 명분을 쌓은 후에는 왕권을 강화하는 실질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대내적으로 지방의 호족세력을 약화시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고, 대외적으로는 베트남 남부, 라오스, 태국을 정벌했으며 선조 때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육진랍(상부 첸라)까지 통일했다.

 

프레 룹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위대한 전사였고, 그의 검은 자주 피로 물들었으며, 몸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했다. 죄인은 처벌하지만 무고한 자에게는 바다와 같은 연민을 갖는다.” 그는 강력한 왕이었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앙코르 예술의 창시자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사원을 많이 남겼다. 동 메본(East Mebon) 이외에 왕과 뱀의 여인 이야기가 전해지는 하늘 궁전 피메아나카스(그의 아들이 완공했다)와 왕의 무덤이자 신전인 프레 룹(Pre Rup), 왕실 목욕탕 스라 스랑(Srah Srang)이 있다. 그리고 대사제인 야즈나바라하가 건축한 크메르 부조 예술의 걸작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도 유명하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 확립된 앙코르 건축 사상과 조각상에 대한 기본 구도는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특히 크메르 왕조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뛰어난 건축가이자 구루인 카빈드라리마타나(Kavindrarimathana)의 공이 컸다. 그는 바춤 사원, 동 메본, 스라 스랑을 건축했다.

 

 

펍스트리트 근처 호텔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유적지로 향했다. 스라 스랑은 시엠립 시내에서 앙코르 와트 동문으로 가다가 오른쪽 숲길을 따라 계속 가면 나온다. 앙코르 톰을 기준으로 동쪽에 유적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앙코르 톰을 통과하거나 앙코르 와트 해자를 끼고 숲길을 따라 목적지로 가곤 했다.

 

숲길을 지날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상쾌하다. 다른 곳과 2~3도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우리나라 남도의 한적한 숲길을 달리는 느낌이다. 오전 9시 이전에 지나면 긴팔 옷이 필요할 만큼 조금 서늘하다. 툭툭을 타고 달리면서 얼굴과 온몸으로 받아내는 바람은 더위에 지칠 무렵 시원한 청량제가 된다. 툭툭을 타면 눈, 코, 귀, 몸으로 앙코르를 볼 수 있다. 밀림에 갇혀 있었던 1천년 전 왕국의 신비와 숨결이 바람을 타고 다가온다.

 

 

스라 스랑은 왕실 목욕탕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기록을 보면 왕실 사람들만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위해서 이 호수를 만들었다. 단, 호수의 둑을 망가뜨릴 수 있는 코끼리의 출입은 금지한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해학과 여유가 풍부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우리 삶도 경계를 풀고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한결 기쁘고 행복해질 텐데, 잠시나마 그런 소망을 품어본다.

 

가로 700미터, 세로 350미터 크기로 커다랗게 만든 것은 관개용수를 저장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지만 더운 날씨 탓에 목욕을 자주 해야 했던 원인도 있다. 주달관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두세 집에 하나씩 연못이 있어 목욕을 하지만, 며칠에 한 번은 강에서 씻는다고 했다. 남녀 구분 없이 다 벗고 들어간다. 스라 스랑도 마찬가지다. 매일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강에 들어간다.

 

지금 우리가 구경하는 스라 스랑은 자야바르만 7세 때 제방을 쌓고 다시 지은 것이다. 선착장 테라스엔 사자 두 마리가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난간에 있는 나가의 모습도 독특하다. 7개의 나가 머리가 있고 가운데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가루다의 형상이 있다.

 

 

스라 스랑에서 1킬로미터 정도 더 가면 프레 룹(Pre Rup)을 만나게 된다. 프레 룹은 동 메본에서 남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952년 동 메본이 건축되고 난 후 9년이 지난 961년에 지어졌다. 구조나 형식은 동 메본과 거의 유사한데 더 세련되게 지어졌다. 아마도 건축가 카빈드라리마타나가 동 메본을 참조해서 프레 룹을 설계하다 사망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몸을 뒤집는다’라는 뜻의 프레 룹은 시신을 한 번 뒤집어 화장하는 캄보디아 전통의 화장 방식 때문에 왕족의 화장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단순 화장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어떤 학자는 프레 룹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동 바라이까지, 동서쪽과 남쪽으로는 1킬로미터에 걸쳐 신도시가 건설됐다고 주장한다. 그 말이 타당하다면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후 야소바르만 1세를 넘어서기 위해 프놈 바켕 중심의 야소다라푸라를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대부분 뛰어난 왕들은 죽으면 자기가 묻힐 곳을 중심으로 도시를 만들어보려는 욕심이 강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때는 욕심이 아니라 ‘바르만’으로서 백성의 방패이자 수호자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라 여겼겠지만.

 

사원의 역할이 신전이면서 왕의 무덤이기 때문에 화장터는 부수적인 기능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왕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서는 입구 근처 어딘가에 화장 장소를 만들어놓는 게 여러모로 편할 성싶다. 그렇다면 사원 입구 앞 돌 받침대에는 난디가 아니라 왕의 시신이 놓여져 있지 않았을까.

 

피라미드 식으로 쌓아 올린 3단의 사원은 동 메본보다 더 아름답고 가파르며 높다. 죽음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하늘에 좀 더 가까이 닿으려는 왕의 의도를 잘 반영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욕심인가 꿈인가 아니면 통치 전략인가.

 

 

왕들은 죽으면 화장한 뒤 유골을 모아 신전에 보관한다. 백성들은 어땠을까? 화장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성 바깥 멀리, 사람이 없는 외딴 곳에 버렸다고 한다. 매, 들개 같은 짐승들을 기다리는데 와서 다 먹어 치우면 죽은 자의 부모가 복이 있어서 보답을 받았다고 여겼다. 티벳의 천장, 또는 조장과 비슷한 풍습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자연 친화적인 방법인 듯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죽은 이를 또 한 번 더 죽인다고 생각할 듯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사원을 바라보니 인생의 무상함이 갑자기 몰려온다. 누구라도 반드시 죽기 때문에 무상이지만, 영원히 산다고 해서 그게 무상이 아닌가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한다. 죽어서 신으로 기억되길 원하는 왕들도 무상하다. 갑자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 반테이 스레이 여신상을 훔친 앙드레 말로가 문화부 장관이 되다

 

1923년 10월, 22세의 앙드레 말로는 식민지성으로부터 유적 발굴을 위해 최대 20만 프랑을 프랑스 극동학원에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현지조사 허가를 받아낸다. 당시 프랑스 극동학원은 베트남 하노이에 있었다. 인도차이나의 모든 유적을 연구하고 조사하던 곳이다.

 

고액의 유산을 받은 클라라 골드슈미트와 결혼했지만, 주식투자에 실패해 거의 파산 지경인 상태였다. 20만 프랑을 제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한몫 챙길 요량으로 캄보디아로 향한다.

 

“비참한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한 장님이 원시적인 현금을 켜며 ‘라마야나’를 낭송하고 있었다. 몰락하는 캄보디아의 모습이 바로 그 늙은 장님과 같았다. 그 영웅적인 서사시가 기껏 한 무리의 거지와 하녀들을 감동시킬 뿐이었다. 파멸에 사로잡힌 땅, 사원들이 무너져 가듯이 민족적인 송가도 시들어 가는 굴복의 나라, 망국 중에서도 처참한 망국······.”

 

캄보디아는 앙드레 말로에게 죽음의 땅이자 기회의 땅이다. “호랑이 가죽을 얻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심정으로 무녀상을 찾아 나선다. 극동학원에 20만 프랑을 주더라도 훨씬 남는 장사다. (앙드레 말로가 말한 무녀상은 수문장 데바타 여신상이지만, 사실 무녀라 하면 천상의 무희 ‘압사라’다. 유럽인들은 데바타와 압사라를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압사라로 표현한다)

 

“얼마나 값이 나갈 것 같소?” 페르캉이 물었다.

“무녀상 두 개에 말이죠?”

“응.”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십만 프랑은 넘을 테죠.”

“정말이오?”

“그럼요.”

 

 

무녀상이 있는 곳은 밀림이다. 숨막히는 더위가 모든 것을 이글이글 삭게 만들고, 곤충과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인간의 의지를 혼미하게 하고, 행동을 무력하게 만든다. 적의로 가득 찬 밀림의 위협을 물리치고 실망과 시련을 겪으며 나아간다. 드디어 폐허가 될 대로 된 이지러진 사원 속에서 무녀상을 찾아낸다.

 

발견한 무녀상은 “아련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조각” 중 하나였다. 세 개의 돌에 걸쳐 새겨진 데바타는 탑의 벽에 박혀 있었다. 처음엔 톱과 끌, 줄칼을 사용하여 빼내려다 도저히 안돼 온 힘을 다해 망치질을 했다. 드디어 돌이 빠졌다.

 

1923년 12월 23일 밤, 앙드레 말로는 조각상을 프놈펜에서 사이공으로 밀반출하려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죄목은 ‘역사적 건축물 파괴 및 부조물 파편 횡령’. 1심에서 징역 3년 및 5년의 인도차이나 입국금지 판결이 내려졌으나, 구명운동 덕분에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7년 뒤 앙드레 말로는 자신의 경험담을 담아 소설 <왕도로 가는 길>을 출간했다.

 

 

유적 파괴자이자 도굴꾼 범죄자. 그런 전력을 가진 사람이 문화부 장관까지 지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아이러니다. 도대체 앙드레 말로와 프랑스 사회는 이 “도굴 행위”를 어떻게 보았을까? 필자가 <왕도로 가는 길>을 읽게 된 가장 큰 원인이자 궁금증이다.

 

<왕도로 가는 길>은 데바타 여신상을 찾으러 떠난 젊은 고고학자 클로드와 모험가 페르캉이 겪는 이야기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데바타를 찾으러 떠나기 위한 도입부이고, 3부와 4부는 데바타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탄트라의 에로티시즘과 연결된다.

 

2부가 원시의 밀림 속에서 데바타를 찾아내, 떼어내고, 이송하는 내용이다. 밀림과 폐허에 대한 묘사가 많고, 데바타를 떼어내기 위해 망치질하는 상황을 밀도 있게 썼다. 수레에 실어 마을로 가져온 데바타를 이후 어떻게 했는지는 소설에서 다루지 않는다.

 

 

“그 폐허를 덮고 있는 표현키 어려운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마치 죽음의 힘 같은 괴이한 힘으로 그 조각들을 지켜온 것이다. 그리하여 몇백 년을 거쳐온 그 석상들의 몸짓이 폐허에 들끓는 지네 떼와 짐승들의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클로드는 눈을 떼지 않고 그 돌을 노려보았다…. 확확 다는 열기에 떨리는 나뭇잎과 둥근 해를 배경으로 뚜렷하게, 굳건하게,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돌, 그 적의에 가득 차 있는 돌을…. 이 돌은 완강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 수동적이면서도 인간을 거부할 수 있는 존재처럼 눈 앞에 있었다. 클로드의 가슴 속에 은밀하고 어처구니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클로드는 거의 넋을 잃고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사원처럼 무너져 조각난 그의 생각은 망치질 소리를 세며 그 흥분으로 몸을 떨 뿐이었다. 한 번 더, 언제나 한 번 더... 숲과 사원, 그리고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자... 감옥의 벽도, 줄로 깎는 소리 같은 이 망치질... 끝없는, 끝없는 망치질.”

 

“클로드 역시 해방되었다. 좀 더 마음이 약했더라면 눈물이 쏟아져 나올 지경이었다. 마치 물에 빠져 의식을 잃었던 사람처럼 그를 에워싼 세계가 그를 다시 맞아들였다. 첫 번째 부조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그 무턱대고 감사하고 싶은 심정에 또 한 번 사로잡혔다. 쪼개진 면을 위로 한 채 떨어져 있는 이 돌 앞에서 밀림과 사원과 자신 사이에 빈틈없는 조화가 이루어졌다.”

 

정리하면 이렇다. 밀림은 암흑의 힘이 지배하고,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무력하게 만드는 곳이다. 밀림에서 데바타를 찾는 일은 죽음을 담보로 한다. 죽을 각오를 해야, 또는 죽어야 원하는 것을 찾게 된다.

 

망치질은 밀림을 지배하는 죽음에 전이된 데바타를 감옥의 벽에서 해방시키는 행위다. 데바타는 이제 자신이 탄생한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의 세계로 회귀하여 현실적 존재가 된다. 현실적 존재는 인간의 실존이다. 망치질은 “인간의 조건”을 벗어나는 노력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적극적인 행위로 변모된다. 해방된 데바타는 동화된 타자이며, 동시에 운명과 싸워 이긴 새로운 인간이다.

 

데바타는 앙드레 말로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데바타 도굴로 인한 감옥 생활과 수개월 간의 재판 과정에서 식민당국에 대한 불신이 커지게 되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사이공에서 신문을 발행하면서 반식민지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중국에 머무르면서 1927년 4월 12일 장제스 국민당 우파가 일으킨 상하이 쿠데타를 목격한다. 이를 배경으로 인간 본성과 인간 조건의 복잡성을 다룬 소설 <인간의 조건>(1933)이 공쿠르 상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2차 대전 때는 자원입대해서 싸웠다. 포로로 잡혔다 탈출하여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다. 샤를 드골 대통령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이 된다.

 

앙드레 말로는 <왕도로 가는 길>을 통해 자신의 도굴 행위에 문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했던 시대에 인간 실존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는 계기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도굴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땠을까? 당시 캄보디아 국립박물관장이고 앙들레 말로의 체포를 주장했던 조지 그로슬레는 그를 ‘좀도둑’이라 비꼬았다. 중범죄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로 당시에는 단순 도굴범뿐만 아니라 많은 프랑스 고고학자들과 미술 수집가들이 도굴 활동(?)에 가담했다.

 

 

앙드레 말로도 “프랑스 고위 인사들이 앙코르를 방문해 유물을 가져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식민주의의 위선을 폭로하는 용감한 선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변호사의 역할도 컸다. 변호사들은 비슷한 시기에 한 고위 장교가 같은 범죄를 저질렀지만 처벌되지 않은 사례를 들며, ‘돌 몇 개’를 채취한 이유로 두 젊은이를 단죄하기는 어렵다며 관용을 호소했다. 그리고 앙드레 말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데바타 여신상을 가져갔을 거라 주장했다.

 

‘돌 몇 개’로 젊은이의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이 먹히는 시기였다. 소설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차이나 총독이 “시엠립에서 발견되고, 발견될 모든 유적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한다”고 포고하자 클로드가 학술원장(프랑스 극동학원장)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호랑이 가죽 역시 국가의 사적이겠으나 호랑이 가죽을 얻으려면 호랑이 굴로 뛰어드는 만용도 무릅써야 할 것임을 충고하는 바입니다.”

 

이런 분위기 덕에 아내 클라라와 50여 명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말로의 구명운동을 할 수 있었고, 후에 문화부 장관이 되는 데도 문제가 되지 않은 듯하다.

 

소설을 위한 소설은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소설 같은 삶을 산 앙드레 말로. 드골은 그가 “인간 정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알기를 원하고 알게 해주는 데 가장 뛰어난 적임자”라고 했다. 말로는 이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글쓴이=조성진 아세안익스프레스 객원기자 csji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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