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지명은 읽기가 어렵다. 한문으로 표기된 지명은 거의 모두 훈독(訓読)으로 읽는다. 물론 수도 도쿄(東京)나 고도(古都) 교토(京都)와 같이 음독(音読)으로 읽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라 할 수 있다. 일본어 훈독은 비유적으로 견주면 예컨대 慶州라고 쓰고는 이를 ‘경주’가 아니라 ‘서라벌’이라고 읽는 식이다. 외부인은 이를 알 도리가 없다. 일본 매스컴의 사건-사고 담당 종사자들도 지명사전에 의존할 정도라고 하니 그 난해한 오명은 알 만하다. 한반도를 마주하는 쓰시마를 기점으로 전개되는 북 규슈 일원에는 한반도와 인연 있는 지명이 많이 눈에 띈다. 우선 ‘쓰시마’부터 한국어에 유래하는 이름인데, ‘쓰’는 ‘두’, ‘시마’는 ‘섬’으로 두 말을 조합하면 ‘두 섬’이 된다. 예부터 남북으로 갈라진 섬의 지형을 묘사하는 표기이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섬 이키(壱岐)에는 ‘후레(触)’라는 고아자(小字: 가장 작은 단위의 마을)라는 마을이 99개나 있으니 섬 전체가 후레에 다름 아니다. 이 ‘후레’는 한국어 ‘부루·후루’가 진화해서 ‘바루·후레’로 된 것이지만 본래 서라벌’의 ‘벌’에서 온 것이다. 북 규슈는 한반도 남부와 지리적으로 일의대수(一衣帶水)의
한국어나 일본어는 이른바 교착어(膠着語)또는 부착어(附着語)라고 한다. 이는 언어의 한 유형으로 실질적 의미를 갖는 말이나 어간에 기능어나 접사를 붙여 여러 가지 문법적 범주를 나타내는 언어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주격에 ‘나는’, ‘나에’, ‘나의’, ‘나를’과 같이 어미 ‘나’에 조사가 붙어 뜻을 더하거나 품사를 바꾸는 접사가 단어가 이루어지는 첨가적 성격을 띤 언어이다. 중국어와 같이 어근이 그대로 한 단위가 되는 언어를 고립어, 영어나 독일어와 같이 단어의 굴절이 내부적 변화로 표시되는 언어를 굴절어와 비교가 된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어순이 같고, 교착어라는 성격이 같은 언어다. 이런 성격은 조사가 붙는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본어 は, に, の, を는 ‘는’, ‘에’, ‘의’, ‘를’에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한국어 ‘나는’과 ‘내가’와 같이 미묘한 뉘앙스를 갖는 ‘는’과 ‘가’라는 조사의 경우도 일본어 は와 が의 경우와 신기하게도 의미는 일치한다. 예컨대 “나는 학교에 간다”와 “내가 학교에 간다”를 견주어 보면, 전자 즉 ‘나는’의 경우 “너는 어디에 가는가?” 라고 물을 때 답이며, 후자 즉, ‘나=내가’의 경우 “누가 학
지금까지 쓰시마-이키로 번진 일본 이야기를 엮어 보았는데, 지금부터 주제별로 ‘일본 엿보기’를 해볼까 한다. 먼저 일본인이 쓰는 언어, 즉 일본어를 서사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쓰시마-이키는 일본어 서사에도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것은 이 적은 섬에는 일본어의 조어(祖語)를 이룬 한국어의 형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쓰시마’라는 지명부터가 한국어에 유래한다. 그것은 한국어 ‘두 섬’이 ‘쓰시마’로 표기된 것이라고. 즉 ‘쓰’는 ‘둘’에서, ‘시마’는 ‘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일 전문가들이 두루 인정한다. 이것은 ‘섬(島)’-->‘시마(島)’ 또는 ‘절(寺)’-->‘테라(寺)’로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받침 말을 하기 어려운 일본인의 구강구조에서 한 음절이 두 음절로 된 말에 다름이 아니다. 또한 이키에는 후레(触)라는 이름을 가진 고장이 99군데나 된다. 이 작은 섬에 그 많은 후레가 있다니, 그것은 섬 전체가 후레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후레에 대해 <나가사키현의 역사산보>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키의 농촌 단위는 ‘후레(触)’라고 불린다. 이것은 조선어인 푸리=푸루[村]의 뜻인 외래어라는 설과, 또
지금까지 이야기를 되돌아보면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떠있는 조그만 섬 쓰시마가 예로부터 한일 두 나라 간 문물 교류의 가교로서 중요한 몫을 해온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교류라고 하지만 고대 쓰시마는 일본열도가 한반도로부터 문물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창구이었다. 이번 이야기는 쓰시마가 그 이상 문화공동체를 탄생시킨 모태라는 점을 일깨우고자 한다. 재일작가이자 한일고대사 연구가인 김달수는 쓰시마 섬을 두고 ‘반은 조선, 반은 일본’(金達寿, 1986, 229)이라고 말한다. 그 만큼 쓰시마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서 서로 나누는 점이 많은 섬이다. 글쓴이는 이번 이야기에서 이 점을 자세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이 문화공동체는 쓰시마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와 북 규슈가 형성하는 지형이다. 이 지형에 사는 가야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제사를 나누면서 삶을 영위해 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말을 함께 썼다는 점이다. 물론 글쓴이를 포함한 현대인은 고대를 산 적이 없다. 그러나 현대 일본어와 한국어를 견주면 이를 연역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우선 현대 두 나라 언어 사이에는 수많은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예
희한한 일이다. 18세기 초엽 쓰시마 번주 소(宗)씨의 한 대조선 외교를 담당했던 유학자가 지금 아베 정권의 대한 외교정책을 꾸짖고 있다. 그가 이 섬에서 활약한, 조선어에 능통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이다. 카미가이토 겐이치(上垣外憲一)는 “조선과의 평등을 존중하고 힘에 의한 위압을 부정하는 호-슈의 외교사상이 메이지 일본의 국책과는 도저히 상용될 수 없었다” 면서 그 꾸지람을 이렇게 사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때문이야말로 호-슈는 실로 우리시대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일로전쟁의 승리가 경제전쟁의 승리로 바꿔치기한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값싼 일본우월감에 우리들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지금, 또한 무력을 대신한 금력에 의한 위압외교에 일본이 의존할지도 모르는 위험도 느낄 수 있는 지금, 호-슈 사상의 의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上垣外憲一, 1989, 8~9). 물론 위에서 든 카미가이토의 저서는 아베정권이 들어서기 훨씬 전 1989년에 나왔다. 그러나 그가 20세기 초엽 메이지 일본이 노일전쟁[1904~5]의 승리에 취한 ‘값싼 일본우월감’에 대한 경고는 지금 아베가 자행한 대한 수출규제, 즉 ‘무력
우리는 쓰시마-이키 라는 작은 섬에 신사로서 명성이 높은 시키나이샤(式內社)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엔기시키>(延喜式) 신명장에는 쓰시마에 29사, 이키에 24사의 시키나이샤가 기록되어 있다. 이전 이야기에서 보듯이 전체 2861사의 시키나이샤가 모신 제신은 3132좌에 이른다. 이 신들은 ‘메이진’(名神, 또는 明神, 이후 ‘명신’)으로 불리며, 이 신들을 모신 신사는 ‘명신대사(名神大社)’가 된다. 명신이란 영험을 나타낸 신의 뜻으로 조야의 숭경을 받는 신을 말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명신은 쓰시마를 통해 한반도에서 건너간 신[海神(와다츠미 신)]들의 웃어른 격이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쓰시마의 명신대사에 얽힌 줄거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명신대사는 신사의 품격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나? ■ 일본은 신의 나라…팔백만 신과 함께 산다 일본은 신의 나라라고 할만하다. 열도 곳곳에 가지가지 신들이 묵고 있는 신의 나라이다. 이 신들은 열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신사는 물론이고, 산의 숲[모리(森])이나 바위 또는 나무에 깃들이기도, 사람들에 지피기도 한다. 이렇게 곳곳에 두루 묵고 있는 일본신의 편재현상을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