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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피플] 김창범 대사 “‘CSCS’는 10년 후 대비 ‘전략+문화’ 플랫폼”

올 7월 주 인도네시아 대사 퇴임, 서울 보문동에 ‘연구소’ 설립 ‘시선집중’

 

김창범 전 인도네시아 대사(60)는 올 7월 말 주 인도네시아 대사를 마지막으로 39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했다.

 

기자는 퇴임 전인 6월 25일 서울대학교 VIP연구사업단에서 주최한 ‘줌(Zoom) 온라인 화상회의’(웹비나, Webinar: 웹+세미나) 인도네시아 현지 특별 강연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그를 코로나19 시대 일상이 된 ‘비대면’으로 처음 만난 것. 이번에는 ‘대면’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3개월여 만에 오프라인에서 만난 그는 달변이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감춘다’는 탁월한 ‘외교관’의 면모도 살짝 드러나기도 했지만 소탈하고 솔직했다.

 

 

은퇴 이후 그는 고려대 인근 성북구 보문동에 ‘CSCS(전략문화연구센터, Center for Strategic & Cultural Studies)’를 세워 인도네시아를 포함 본격 ‘아세안 연구’를 시작했다. 10년 이후를 내다보겠다는 ‘전략과 문화의 플랫폼’이다.

 

스스로 “외교관의 옷을 벗었지만 ‘준 외교관’으로 아세안 이해 확산을 노력 중”이라는 그를 보문역과 신설역 중간에 있는 BM 빌딩 5층 CSCS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 고교 동창 최진욱 원장과 ‘CSCS’ 한반도전략+아세안미래 의기투합

 

김창범 대사는 “지난해 고교 동창인 최진욱 제14대 통일연구원 원장과 각자 전문분야인 통일과 외교안보를 위한 ‘통일과 외교안보’ 플랫폼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귀임을 예상해 맞춰 ‘CSCS’ 같이 세우기로 했는데 코로나19로 귀국이 늦어졌다. 센터의 주축은 최진욱 원장과 김 대사다. 김 대사는 CSCS 고문이다.

 

 

그의 행보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대학교수나 연구소 연구위원이 아닌 ‘작은 연구소’를 직접 만들어 하겠다는 것은 드물다”고 말할 정도였다.

 

CSCS의 새로운 출발 모토로 ‘문화’와 ‘전략’을 추구하는 점도 두 사람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작은 연구소를 지향하며 남이 주목하지 않은 ‘틈새’를 찾아내고 ‘10년 이후’를 대비하겠다는 것이 비전이다.

 

“아세안 국가에서는 ‘한류’ 등으로 젊은이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뜨겁다. 이에 비해 한국 내의 아세안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부족하고 낮은 수준이다. 양 국민의 상호인식이 균형 잡히지 않고 비대칭적이다. 인식의 간극을 좁혀야 한다. 한-아세안 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인식과 정보의 비대칭성이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령 최근 온라인 공간을 뜨겁게 달구었던 ‘필리핀 인플루엔서의 타투’ 논란에 대하여 그는 “그 논란에는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경멸, 멸시가 보여졌다. 이런 몰이해는 지양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 원장은 ‘한반도전략포럼’, 저는 ‘아세안미래포럼’을 맡아 기존의 포럼이나 모임에서 채워주지 못한 것을 만들고 싶다. 통일도 문화로, 맥락으로 접근하고, 대 아세안 외교도 문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업그레이드하자는 것이 센터의 출발점이다”고 센터를 소개했다.

 

■ “앞으로 10~15년간, 아세안에 ‘연구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아세안을 포함한 지역연구(Regional Studies)가 국내에서 아직 미흡한 게 현실이다. 국책연구기관과 대형연구소들이 아세안의 연구 커뮤니티와 교류를 하지만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협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단발성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연구소 간 교류도 4강(미중러일) 중심에서 탈피할 시점이 되었다. 이 같은 ‘아세안을 보는 한국의 인식’도 센터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우리가 필요한 관점’만으로 접근하는 ‘우’는 피해야 한다. 문화의 관점이 중요한 이유이다. 상대국가에 대해 문화, 역사, 맥락, 풍습과 언어 등의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외교와 경제 사안도 현장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가 다른 공직 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은 연구소’를 만든 진짜 이유가 이것이었다. 센터는 프로젝트 한두 개 정도는 해야 하겠지만, 외부 프로젝트에 치어 ‘정작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상황은 피할’ 생각이다.

 

 

그가 보기에 한국에서 아세안에 대해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연구를 하는 곳은 많지 않다. 아세안도 ‘한-메콩’ 등 소지역, 국가별 ‘맞춤형’ 전략으로 가야 한다. 아세안 국가의 상이한 정치, 경제 발전 수준, 상대국의 수요와의 접점을 연구하며 다양한 맥락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10~15년간 ‘움직이고 진화해가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제가 가진 네트워크가 유용할 때, 기운이 왕성할 때, 지적인 근육이 필요할 때 이 일을 해야 한다. 특강과 책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미래의 10~15년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할 소중한 시기다.”

 

그가 관심을 쏟는 아세안 연구 또한 “구심점이 되는 지역 허브가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자카르타와 싱가포르, 방콕 등에 연구플랫폼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언급한 연구플랫폼은 일본이 지원하고 있는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conomic Research Institute ASEAN and East Asia)’가 롤모델이다. 자카르타에 위치한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는 일본 경제통상산업성에서 지원한다. 2008년 창립된 이래 이제는 ‘아세안의 싱크탱크’로 자리잡고 있다.

 

 

“만약 자카르타에 우리 주도의 연구플랫폼이 있다면 한국 학자들도 현지 학자들과 ‘공동프로젝트’를 현지에서 진행할 수 있다. 아세안의 연구진들이 한-아세안의 공동관심사를 연구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마련된다. 아세안의 연구 커뮤니티와의 현지 접점이 생긴다. 아세안의 미래를 함께 설계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지향하는 ‘신남방정책’에도 도움이 된다. 한국의 개인 또는 국책연구소는 현지와의 공동프로젝트를 하기 어려운 여건이다. 데이터가 축적될 수 없는 환경이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아세안 장학생 양성에 더욱 힘을 써야 한다. 10년에 1만 명을 목표로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

 

■ “연구를 위해 한국 찾아올 ‘떠있는 항공모함’ 같은 연구허브가 있으면 좋겠다”

 

연구 또한 공급자 관점(한국이 원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하고 싶은 것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공급자인 한국이 제시하고 이식하는 식의 연구보다 상대의 니즈가 우선이다. 각국의 ‘싱크탱크’와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는 “일본의 경우 펀드를 만들어 ‘현지 파트너’ 연구 비용까지 보장해준다. 일본의 연구비는 한국의 경우 동남아지역 연구비의 3배 수준이다. 한국의 경우 현지 파트너 지원은 꿈도 못 꾼다. 지원도 턱없이 적다”고 말했다.

 

‘떠있는 항공모함’은 그가 설명한 ‘한국 연구플랫폼 허브’ 개념이다. 한국과의 ‘인연’을 자연스럽게 연구로 이어지게 하는 시스템이다.

 

그는 “아세안 연구원들이 ‘안식년’을 한국 연구센터에서 보낼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아세안 현지 파트너들이 쉽게 한국을 계속 찾아올 수 있는 연구플랫폼, ‘떠 있는 항공모함’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현실은 팍팍하다. 아세안 연구원들은 한국에서 연구를 하는 것도 어렵고, 자리도 마땅치 않다. 한국 정부가 주는 국가적인 장학제도 또한 적다. 아세안 연구원들의 시니어 펠로우십 지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그의 희망사항이다.

 

“아세안 각국 인재들이 한국 연구센터로 찾아와 ‘연구 파트너’와 함께 결과물을 내주었으면 바란다. 역으로 아세안에 설립된 연구센터에서 공동프로젝트를 만들어냈으면 좋겠다. 여기에 한국 진출기업도 많이 후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20년 이후엔 아세안 국가에서 한국 유학경험이 있는 장관들이 여러 명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세안 국가와 한국의 교역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 베트남이 가장 많으며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순이다. 여기에다 경제 잠재력이 무한한 미얀마도 주목 대상이다.

 

■ 인도네시아와의 인연, 근무 중 목격한 두 번의 대선...현장서 ‘평화적 정권교체’ 목격

 

그는 2003년 인도네시아에 참사관으로 발령받아 2년을 근무했다. 이후 13년 만인 2018년 대사로 부임해 2년 반을 근무하며 인도네시아와 두 번째 인연을 맺었다.

 

김 대사는 “인도네시아를 떠나기 전에 두 번 다 공교롭게 큰 사건을 체험했다. 첫 번 째 근무를 마무리하는 시점인 2004년 12월 17만 명의 인도네시아인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를 겪었다. 아체 현장에 달려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올해 봄에는 대사 귀임을 앞두고 코로나19 사태를 맞았다. 인도네시아를 잊지 말라고 하는 메시지인가 보죠”라고 웃었다.

 

보통 대사들의 귀임 때는 ‘이임 리셉션’ 행사를 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의 확산세로 ‘고강도 사회적인 격리’가 시행되어 제대로 된 퇴임 행사를 할 수 없었다. 대신 사이버 이임 면담과 웨비나 등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행복한 외교관”이었다고 소개했다. 특히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 중 하나가 ‘아세안의 리더’인 인도네시아 근무라고 주저 없이 꼽았다.

 

그는 “저는 외교관으로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두 번 근무했다. 대사관 직원 출신이 인도네시아에 대사로 온 것은 제가 최초일 것이다. 그리고 2번 근무 기간 중에 매번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고 특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2004년 참사관으로 근무할 때 직접 투표를 통한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현장에 있었다. 메가와띠(Megawati Sukarno Putri, 2001/7/23~ 2004/10/20, 3년 3개월) 대통령에서 유도요노(Susilo Bambang Yudhoyono)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테러 빈발, 쓰나미 상처가 깊었던 시절이었다. 2019년에는 대사로 조코 위도도(Joko Widido, 2014/10/20~ 현재 현직) 대통령이 재선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2억 6500만 명으로 세계 4위의 인구,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 길목에 방파제로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전략적 요충지다. 첫 부임 때 도입된 직접 투표가 16년 후에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로 자리잡은 모습을 보는 것도 기뻤다고 말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남북단일팀 응원, 조코위 대통령 남북대사 동시면담 등도 기억에 남는 인도네시아의 추억이다.

 

■ 코로나19 사태 속에 다져진 우정, 그리고 ‘신남방정책’의 정착

 

 

김 대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서도 한-인도네시아의 ‘우정’이 더욱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발빠르게 인도네시아를 우선지원 파트너로 지정하고 진단키트 등 방역물품을 지원한 것은 ‘K-방역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방호복을 인도네시아와 공동생산하는 과정에서도 김 대사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조코위 대통령은 김 대사 임기 중 2018년 9월, 2019년 11월,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대사로서 두 번의 인도네시아 대통령 한국 방문을 함께한 것은 큰 영예다. 특히 한 나라 정상이 국빈 방문으로 창덕궁에서 공식 환영 행사를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난해 11월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를 찾은 조코위 대통령은 감천마을을 찾아 한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맛과 멋을 즐겼다. 그리고 그 방문 때 역사적인 ‘한-인도네시아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CEPA,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 체결을 선언했다”고 말했다.

 

어느새 돌아온 ‘대사 김창범’은 “한국은 정권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신남방정책’을 이어가야 한다. 제가 거기에 작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의지를 전했다.

 

여기서 그는 주 인도네시아 대사 시절에 남북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했다. 다름 아닌 201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열린(8월 18일~9월 2일) 아시안게임이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4월 27일, 판문점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와 관련하여 회담 3일 후인 4월 30일 조코위 대통령이 안광일 주 인도네시아 북한 대사와 저를 함께 대통령궁으로 초청했다. 남북한 대사를 초청하여 판문점 정상회담 결과를 브리핑받은 것은 인도네시아가 유일하다.”

 

그는 안 대사의 “김 대사가 먼저 하라”라는 제안에 브리핑을 자연스럽게 먼저 시작했다. 조코위 대통령은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남북 정상을 초대하고 싶다”는 의향을 그 자리에서 밝혔다.

 

안광일 대사와 김 대사는 아시아게임 현장에서 공동응원을 함께 하기도 했다. “외교관으로서 안 대사는 대화를 할 수 있는 파트너였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는 안 대사와 서로 편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 외교사에서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외교관 김창범’

 

그렇다면 ‘외교관 김창범’은 어떤 비사(祕史)를 갖고 있을까. 알고 보니 그는 ‘역사적인 현장’을 지킨 ‘밀사(密使)’이자 특급 외교관이었다.

 

대표적인 비사는 소련과의 수교 교섭 실무창구로 활약한 것과 인도네시아와 한국 관계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1987년 여름에서 1990년 8월까지 주일대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에 소련 영사단이 파견되는 과정에서 물밑교섭 실무창구를 맡았다. 그 후 2년여 동안 일본 도쿄의 한국과 소련 대사관이 창구가 되어 한-소련간 수교 교섭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1990년 모스크바에 대한민국 영사처가 설립되고, 그 해 9월 30일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그는 “냉전 상황에서 소련은 1984년 LA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88서울올림픽’ 소련 참석은 세계가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소련 영사단이 ‘88서울올림픽’ 기간 중 한국에 머물렀고 이것이 한-소련 관계 개선에도 도움을 주었다. 일본에서 마치 비밀공작원처럼 소련 외교관과 만나면서 협상을 했다. 시간을 지나서 보니 개인적으로 남다른 경험이었다. 소련과의 수교협상은 제 인생 항로를 바꿨다”고 회고했다.

 

한-인도네시아 관계가 ‘한단계’ 도약하는 데 그의 숨은 노력이 일조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 시절 대통령 의전비서관을 맡아 2008~2012년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그 당시 그가 ‘이명박-유도요노’ 양국 대통령간 중간다리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명박 대통령과 유도요노 대통령이 2008년 11월 G20 제1차 정상회의(미국 워싱턴 DC)를 나란히 참석하고 브라질을 순방한 계기에 브라질리아 시내 호텔에서 부부동반으로 오붓하게 티 타임을 갖게 된 데는 김 대사의 숨은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도요노 대통령의 의전수석과 외교보좌관이 모두 김 대사의 오랜 친구였던 덕분으로 쉽게 부부동반으로 편안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후 두 정상은 다자 정상회의 계기마다 따로 회담도 갖고, 회의 중 휴식 시간에도 편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유도요노 당시 대통령 시절에 한국의 T 50 고등훈련기 최초 해외 수출과 포스코 제철 진출 등이 이뤄졌다.

 

■ ‘한류’ 브랜드파워가 역사 이래 최고...식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

 

K-POP 등 한류 때문에 한국으로 오고 싶은 전 세계 젊은이들이 많다. 가령 넷플릭스(Netflix)의 드라마 인기순위에 ‘이태원 클라스’와 ‘킹덤’ ‘사랑의 불시착’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 같은 한국드라마가 각국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2019년 버스로 자바섬을 횡단하는 공공외교 프로젝트(또꼬 낭 자와: Teko Nang Jawa)를 할 때 한식 K-FOOD 트럭도 함께 다녔다. 인도네시아 한식업 협의회와 협력하여 당시 인도네시아에 뜨고 있던 떡볶이를 푸드트럭의 주 메뉴로 삼아 집중 홍보하기로 하였다. 바로 직전에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 1호 매장을 연 한국 떡볶이 뷔페 ‘두끼’식당이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것에 착안했다. 현재 두끼는 인도네시아에 5호점을 오픈했다. 떡볶이, 매운 불닭볶음면 등의 인기로 농산물 수출도 늘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한류’ 브랜드파워가 현재 최고다. 인도네시아 1위 전자상거래 기업 ‘토코피디아(Tokopedia)’ 모델로 방탄소년단(BTS), 동남아시아 전역을 커버하는 플랫폼 ‘쇼피(Shopee)’는 블랙핑크가 모델이다. 한류가 절호의 찬스를 맞았다”고 말했다.

 

실제 아세안에서는 15~20년 전 만해도 J-POP이 인기였다. 이제는 한류로 인해 한국을 대하는 태도도 호감과 동경으로 바뀌었다.

 

“동남아 대부분 나라에서 ‘한류’의 열기가 뜨겁다. 식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뜨거운 아세안에 ‘문화’로 접근해야 한다. 풍습. 언어, 감성과 ‘사람 중심’ 으로 접근해야 지속가능한 발전의 주춧돌을 쌓게 된다.”

 

■ 미중 무역갈등-패권경쟁, 한-아세안 미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코로나19와 함께 전세계를 강타한 미-중 무역갈등, 글로벌 패권경쟁에 대해 물었다. 그는 “아세안의 발화점은 남중국해”라고 지목했다.

 

 

“미-중간 패권경쟁이 동남아시아에서도 본격화되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로 대표되는 중국의 공세적 접근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발화점은 남중국해다. 미-중간 갈등은 아세안에게 ‘불편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외교 현장에서 경쟁의 불꽃이 튀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아세안은 ‘아세안의 중심성’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아세안은 자신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 정상회의(East Asia Summit)’를 활용하려고 한다. 미국과 중국의 접근에 대해 아세안은 내부적으로 통합된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인도-태평양에 대한 아세안의 관점’이란 자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이를 실행하고자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나 단합된 대응을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가령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중국에 기울어져 있고, 미얀마도 중국이 구애 중이다. 이런 점에서 내부 조율을 거쳐 통합된 입장을 내고 압박을 헤쳐나가는 것은 어려운 과제”라고 진단했다.

 

얽히고 설킨 문제를 한칼에 풀어내는 쾌도난마(快刀亂麻), 자유자재 ‘달변’인 그의 목소리에 절로 빠져들어갔다. 동시에 ‘왜 인도네시아에서 그가 인기가 있는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지진 현장에 달려와 한민 구출을 같이 염려하고, ‘인도네시아 한인 이주 100주년사’ 발간을 위해 발벗고 후원하는 그의 ‘진정성’이 통해서였을 것이다.

 

 

참사관으로 근무했다가 인도네시아에 대사로 다시 부임하는 ‘인연’을 넘어, 무엇이든 동포의 눈으로, 현지인들의 눈으로 다가간 소탈하고 인간적인 그의 ‘진심’이 통한 것으로 믿고 싶다.

 

2017년 11월 신남방정책을 발표하면서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양국을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아세안 10개 나라 중 유일한 관계다.

 

그는 지난 6월 퇴임 웹비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도네시아 2년 반 대사 생활 동안 한인동포와 현지인들의 열정과 성원에 감사한다. 아세안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 한-아세안을 위해 자양분이 되어 달라.”

 

이번 인터뷰 내내 그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

 

김창범 전 주인도네시아 대사는?

 

전직 외교관으로 현재 전략문화연구센터 고문을 맡고 있다. 1981년부터 2020년까지 외교부에 근무하면서 한반도 평화, 한미동맹, 유럽연합과 아세안과의 관계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2012년부터 3년간 주 벨기에-유럽연합(EU) 대사로 재직하였으며, 2018~2020년 2년 6개월간 주 인도네시아 대사로 근무하였다.

 

외교부 본부 근무 기간 중에는 안보정책 과장, 북미3 과장, 혁신인사기획관, 그리고 한반도 평화교섭본부 초대 평화체제 기획단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부터 4년 3개월간 대통령 의전비서관을 지내며, 각종 정상회의와 해외 순방 및 대통령 일정을 담당했다.

 

2015년부터 2년간 서울시 국제관계 자문대사로도 재직한 바 있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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