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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재의 緬甸 통신<11> 윈난성 출신 중국인 사업가와의 대화-1

중국 젊은이들의 활발한 동남아 진출... 화교네트워크 기반 단기간에 식수보급 정착

 

현재 미얀마 양곤에 살고 있는 필자는 약 2주간의 꽤나 엄격한 도심 폐쇄(lockdown) 상황을 겪었다.

 

시내의 모든 식당이 영업을 멈추고 거의 유일한 식량공급원이던 슈퍼마켓까지 문을 닫으니 별 수 없이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얀마의 락다운(도시폐쇄)이 여느 대도시의 그것과 유별나게 다른 점이라면 사회기반시설의 불안정으로 상당히 빈번한 단전과 인터넷 끊김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이 집에서 전력을 소모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예고 없이 전력이 끊긴 양곤의 어두운 밤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력이 끊기면 인터넷도, 냉장고도, 컴퓨터와 에어컨도 모두가 멈춘다. 밖에 나돌아 다닐 수도 없는 환경에서, 한번 끊기면 보통 5시간을 넘기는 단전상황을 겪어보니 더이상 시내에 살아야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양곤 외곽으로의 이사를 결정했다. 

 

1. 양곤에 도착한 윈난(雲南)성 출신 사업가

 

유(劉)씨 성을 지닌 중국인 사업가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필자는 2012년에 처음 미얀마 양곤을 취재한 경험이 있었는데, 당시 모 대표님의 제안으로 중국과의 교역으로 한창 활기를 띄던 북쪽의 만달레이에 가게 된 것이다.

 

만달레이는 미얀마 이전 왕조의 수도로 한국으로 치면 북쪽의 ‘평양’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양곤은 부산 정도의 위치와 흡사하다). 당시 10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버스를 이용했는데, 그 버스 안에서 나보다 서너살 어린 마(馬) 씨 성의 화교(버마인)을 만난 것이다.

 

당시 화교들은 버마 군부정치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해외를 오다녔는데, 그는 타이완에서 대학을 마쳤던 탓에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표현이 가능했다. 그렇게 만나 인연을 이어오던 그가 내게 유 대표를 소개한 것이다. 

 

“이봐, 친구, 당신은 언제쯤 양곤에 오나?”

 

“미안해, 나는 당분간은 사업상 수도 냇피도에 머물러야 해. 내가 유 대표를 소개해줄테니 그 친구에게 신세 좀 지고 있으라고. 무척이나 합리적이고 사업 수완도 괜찮은 친구이니 섭섭하게 대하진 않을거야. 대신 그 친구는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니 고생 좀 할 거야.”

 

물론 필자도 중국어 기본회화 정도는 하지만 심도깊은 대화를 나눌 수준은 안된다. 그래도 요즘엔 스마트폰에 장착된 구글번역기로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하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갈까말까를 망설였지만, 결정적으로 '한 달 50만 원 돈에 하루 3끼를 제공한다'는 말에 혹해 바로 짐을 챙겨 양곤 외곽으로 떠난 것이다(이전 숙소는 방값만 한 달에 65만 원이었고, 인근 식당이 폐쇄되자 혼자 해먹는 밥에 질려 있었다). 

 

삽십대 끝자락인 유 대표의 인상은 전형적인 중국의 내륙지방 사람이었다. 1990년대 중국 바둑의 1인자 마샤오춘이 생각나는 구수한 표정에 깡마른 체형을 갖고 있었다. 그의 고향은 중국 윈난성의 중심도시 쿤밍(昆明)이라고 했고 양곤에서 사업을 한 지는 만 3년이 되었다. 

 

미얀마에 살다보면 세 부류의 중국인들을 만날 수가 있다.  첫째는 아주 오랫동안 이 곳에서 살아온 화교들, 둘째는 1950년 중국의 국공 내전 이후 공산당의 지배를 피해 상대적으로 느슨한 중국-미얀마 국경을 넘은 국민당계열의 군인과 민간인들, 그리고 마지막에 바로 2000년대 이후 미얀마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사업상의 기회를 좇아 미얀마를 찾은 중국인들이다.

 

앞서 소개한 馬 사장은 첫 번째 부류고, 劉 사장은 세 번째 부류다. 

 

그런데 이 세가지 모두 공통으로 뚜렷한 특징은 윈난성 출신들이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마치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대부분 산동성 출신인 것과 일맥 상통한다.

 

한때는 뚜렷히 국경도 그어져 있지 않았고, 윈난성 입장에서는 미얀마는 바다로 통하는 최단루트이기 때문에 아주 많은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남쪽인 라오스-태국-미얀마와의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劉씨도 그런 사례였다. 주위 사업가들이 윈난성에 머물지 않고 인근 동남아로 진출하니 그도 덩달아 미얀마로 이주해 사업을 확장하게 된 것이다.

 

2. 류 대표의 물 사업과 글로벌 확장 야심

 

숙소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열악했다.

 

양곤 시내의 외국인 숙소 방값이 평균 물가 대비 비싼 이유는 각종 생활설비의 추가 설치비용 때문이다. 우선 방방마다 에어컨이 필요하고 전압이 무척 불안정하기 때문에 전압을 콘트롤하는 전기시설을 주인이 따로 해야 한다.

 

물탱크와 배관 및 펌프 역시도 보통의 미얀마 가정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물정화 필터’다. 수돗물을 틀면 이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지를 알 수 없는 수준의 물이 수시로 나오기 때문이다. 샤워는 물론이고 빨래가 가능한지 여부가 걱정될 정도의 불투명한 물이 나오는데, 외국인 전용 숙소에는 필터를 설치해 바로 이 심각한 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역시 이 집은 그런 체계적 설비를 갖춘 집은 아니었다. 첫날부터 물 색깔이 마음에 걸려 머리를 감지 못했을 정도였다. 양치는 당연히 식수로 해결했다. 다행인 점은 이 집이 바로 그 식수를 파는 사업체라 식수는 충분하다는 점이었다.

 

한국에도 사무실마다 배치된 그 파란 배달식수통과 정확히 일치한다. 양곤의 중산층이라면 거의 모두가 한 통에 700~800원 정도 하는 이 식수를 배달해 먹는다. 3통을 배달하면 2000원의 가격에 1~2주는 쓸 수 있으니 나쁜 가격은 아니다.  

 

널찍한 100평대의 마당과 단독주택을 활용해 주변에 식수통을 공급하는 사업체를 꾸리고 있었고, 그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홀로 2층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2층에 남는 방 하나를 지인의 소개를 받고 온 내게 내어준 것이다.

 

“왜 하필이면 물 사업을 택했죠?”

 

“글쎄요. 딱히 이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3년 전에 처음 미얀마에 올 때 중국 공장을 따라 왔거든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중국계 제조단지가 있어요. 그래서 사업 기회를 알아보니 마침 식수보급이 가장 급해보이기에 제가 이 동네에서 먼저 시작한 셈이 됐어요. 지금은 대략 2만 명의 고객을 확보했습니다. 현재 쌀과 식용류 식품부자재로 영역을 넓혀하고 있기도 하고요. 앞으로 이 사업을 미얀마를 너머 동남아 주요 도시로 확장하는 게 비전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2만 명의 고객을 확보했다니 사업 수완이 꽤나 좋은 친구인 듯 싶다. 게다가 미얀마에서 영어와 현지어를 하나도 모르고 중국어로만 사업을 확장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업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이 친구의 미얀마어는 초급 수준에 그치는 것 같다.

 

무엇보다 화교네트워크에 기반해 사업을 시작했고, 둘째로 현지 인력을 충분히 고용해 물을 배달하는 사업구조이다보니 특별하게 높은 수준의 언어 능력대신 초기 투자자본이 중요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흥미가 생겨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들어보고 싶었다. 중국의 경제발전의 가장 큰 혜택을 본 30대 젊은 사업가는 어떤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꿈은 어떤 모습일 지 궁금해졌다. (계속)

 

정호재는?
기자 출신으로 현재 싱가포르와 미얀마에서 아시아학을 공부하며 현지 시장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태국의 탁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캄보디아의 삼랑시 등 동남아 대표 정치인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관련 책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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