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는 지금 공위기(interregnum)에 놓여 있다. 팍스아메리카의 균열은 분명해졌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과도기에는 규칙이 느슨해지고 힘의 논리가 전면에 등장한다. 약소국과 중견국이 다수인 아세안에게 이는 가장 불안한 환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세안은 과연 원칙과 현실을 함께 반영한 ‘조용한 외교’를 계속할 수 있을까. 아세안 외교는 오랫동안 비간섭, 합의, 점진성을 핵심 원칙으로 하는 아세안 방식(ASEAN Way)을 중시해 왔다. 요란한 성명이나 공개적 충돌을 피하고, 비공식 접촉과 시간을 통한 해결을 선호했다. 이는 이상주의라기보다 현실주의였다. 체제도, 국력도, 전략적 이해도 다른 국가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 최소한의 안정과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이다. 미-중 전략 경쟁이 구조화되고, 국제규범의 구속력은 약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세안의 원칙은 점점 ‘신중함’이 아니라 ‘모호함’, ‘조용함’이 아니라 ‘침묵’으로 읽히고 있다. 남중국해, 미얀마 사태 등에서 반복된 무력감은 아세안 방식 자체에 대한 회의를 키운다. 원칙을 지키려다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로 비칠 위험
요즘 나는 아침에 뉴스를 볼 때 동남아 기사뿐 아니라 중남미 뉴스에도 눈길이 간다. 아세안 소식이야 오래된 습관이지만, 중남미까지 챙겨보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12월 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서(NSS)에서 미국은 중남미가 속한 ‘서반구(Western Hemisphere)’를 최우선 전략 공간으로 명시했다. 국내외 언론은 이를 두고 ‘트럼프판 먼로주의’, 혹은 ‘트럼프식 먼로주의 추론’이라고 해석했다. 19세기 초, 미국이 아직 유럽 열강에 비해 힘이 약하던 시절, 중남미에 발을 들이려는 유럽 식민 강국들에게 “이곳에 오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 먼로주의였다. 이후 미국이 강대국이 된 뒤,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에는 그 경고에 ‘행동’이 더해졌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겠다는, 이른바 ‘루즈벨트 추론’이다. 그렇게 중남미는 미국의 ‘뒷마당(backyard)’으로 굳어졌다. 이 맥락을 이해하면, 미국이 1959년 혁명 이후 공산국가가 된 쿠바를 지금까지도 장기간 경제제재해 온 이유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 세계대전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으로 기록된다.
2026년 벽두, 세계는 또 한 번 기존 국제정치의 문법이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은 1월 3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를 공습한 뒤 니콜라스 마두로(Nicolas Maduro) 대통령을 미국으로 압송했다. 참수작전이었다. 지난해 말 베네수엘라 유조선을 나포했을 때만 해도, 한 국가의 현직 대통령을 치외법권적으로 체포-구금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이는 트럼프식 ‘던로주의’(Dunlawism, 먼로주의를 빗댄 말)의 본격적 발현이다. 전통적 고립주의도,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도 아닌, 힘에 기반한 적극적 중남미 개입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현대판 먼로주의 추론(corollary)이라 부른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장면은 아니다. 1990년 1월, 미국은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를 마약 범죄 혐의로 체포하기 위해 파나마에 지상군을 투입한 바 있다. 그래서 언론은 평행이론을 꺼내든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차원이 다르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힘의 정치가 국제질서를 압도하는 ‘정글의 법칙’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중국의 대만 무력 위협, 남중국해 무력 시
12월 28일, 미얀마 총선을 하루 앞두고 이 글을 쓰는 일은 솔직히 말해 조금은 모험이다. 대부분의 평가는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쏟아진다. 틀릴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 현장에서 오래 일하며 늘 아쉬웠던 점은, 미리 생각하고, 미리 기록하지 못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래서 총선 전날이지만,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쓴다. 요즘 국내외에는 미얀마 전문가가 넘쳐난다. 유튜브만 켜도 ‘미얀마 총선 전망’ 영상이 줄줄이 뜬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전문가라기보다, 전문가의 언어를 보통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통역자에 가깝다. ■ 미얀마와의 몇 가지 기억 미얀마와의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1999년,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 때였다. 당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뜻밖의 지시를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미얀마 군부의 최고지도자 탄쉐와 양자회담을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미국과 유럽 지도자들이 외면하던 시절, 아시아 민주화의 상징이던 김대중 대통령이 그를 만난다는 건 탄쉐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결정에는 김대중 대통령 특유의 외교 철학이 담겨 있었다. 왕따시키기보다 대화를 통해 변화를 유도한다. 북한을
서정인 전 주아세안 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을 역임한 아세안 10개국과 인연을 갖고 있다. 특히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2023년 외교부 은퇴 후에도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전문가 및 저명인사(ARF EEP) 및 아세안동아시아경제연구소(ERIA) 한국이사로서 아세안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세안익스프레스는 현재 유엔기념공원관리처장을 맡고 있는 서정인 주 아세안대사를 새 칼럼 필진으로 초빙했다. 한국 주요 아세안 외교에서 직접 발로 뛰었던 현장 경험과 넓은 안목으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주는 그의 인사이트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 2010년 태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나는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분쟁 지역을 직접 찾은 적이 있다. 지도 위에서는 가느다란 선 하나에 불과했지만, 현장은 달랐다. 붉은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길, 간간이 보이는 철조망, 그리고 “여기까지가 태국입니다”라는 군인의 짧은 말. 그 선은 종이 위의 경계가 아니라, 역사와
서정인 전 주아세안 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을 역임한 아세안 10개국과 인연을 갖고 있다. 특히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2023년 외교부 은퇴 후에도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전문가 및 저명인사(ARF EEP) 및 아세안동아시아경제연구소(ERIA) 한국이사로서 아세안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세안익스프레스는 현재 유엔기념공원관리처장을 맡고 있는 서정인 주 아세안대사를 새 칼럼 필진으로 초빙했다. 한국 주요 아세안 외교에서 직접 발로 뛰었던 현장 경험과 넓은 안목으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주는 그의 인사이트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 중남미에서 함께 근무하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동료가 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를 다녀오더니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동남아는 오토바이, 중국은 자전거, 중남미는 자동차가 압도적이잖아요. 도대체 왜 이럴까요?” 그 질문에 나도 잠시 멈췄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인도네시아와 태국
서정인 전 주아세안 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을 역임한 아세안 10개국과 인연을 갖고 있다. 특히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2023년 외교부 은퇴 후에도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전문가 및 저명인사(ARF EEP) 및 아세안동아시아경제연구소(ERIA) 한국이사로서 아세안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세안익스프레스는 현재 유엔기념공원관리처장을 맡고 있는 서정인 주 아세안대사를 새 칼럼 필진으로 초빙했다. 한국 주요 아세안 외교에서 직접 발로 뛰었던 현장 경험과 넓은 안목으로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주는 그의 인사이트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 한 해가 노루꼬리만큼 짧아가고 있는 12월 5일 필리핀에 한-아세안 포럼 참석차 왔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이맘 때 날씨는 참 좋다. 11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건기 특유의 선선한 공기가 아침저녁으로 바틱 긴팔을 꺼내 입게 만든다. 새벽 공기마저 온화하지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닐라 베이(Manila Bay)의 어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