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아세안은 이미 에너지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중동에서 들어온 원유를 한국 정유사가 고도 정제해 휘발유-경유-항공유로 만들고, 이를 동남아로 수출하는 구조는 일상적인 경제 흐름이 되었다. 실제로 한국은 연간 수백억 달러 규모의 석유제품을 수출하는 정유 강국이며, 그 주요 시장 중 하나가 아세안이다.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은 한국 정유제품의 안정적인 수요처다. 이 점에서 한국과 아세안은 이미 하나의 에너지 가치사슬 안에 있다. 그러나 지금 이 구조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 봉쇄 상황은 이 공급망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논의되던 리스크가 현실이 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과 아세안의 에너지 공급망은 이미 연결되어 있지만, 그 연결이 동일한 병목(초크포인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동 원유는 호르무즈를 지나 인도양을 거쳐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 동북아와 동남아로 이동한다. 즉 지금의 공급망은 시장 기반 ‘공동 번영 구조’인 동시에 ‘공동 취약 구조’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한국의 원유 도입이 줄어들고 정유 생산이 감소하면, 아세안으로의 석유제품 수
2013년, 딜리의 프레지덴치 니콜라우 로바투 국제공항. 한국으로 떠나는 동티모르 청년 한 명을 배웅하기 위해 가족 열 명, 때로는 스무 명이 청사 앞을 메웠다. 같은 구도, 다른 표정으로 셔터가 거듭 눌렸다. 청년이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가족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활주로가 보이는 자리에 서서 기체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풍경은 1960~70년대 김포공항을 떠나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 건설 현장으로 향하던 한국 노동자들의 사진과 50년의 시차를 두고 겹쳐졌다. 가족과 국가를 한 사람의 어깨에 실어 보내며 말없이 환송하는 공동체의 정서가, 다른 언어와 다른 피부색을 입고 거기에 있었다. 2008년 한-동티모르 고용허가제(EPS) 양해각서가 체결된 이래, 딜리 공항의 같은 장면은 한 세대의 집단적 초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티모르 해외 노동의 흐름은 크게 영국-한국-호주-포르투갈 네 갈래로 나뉜다. 영국에는 포르투갈 국적 취득권을 활용해 옥스퍼드-피터버러-북아일랜드 던개넌 등의 육류가공-물류 현장으로 진출한 1만 6000~1만 9000명이 머무르며, 던개넌은 인구 대비 동티모르인 밀집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
아세안과 동남아를 생태학적 접근, 문명사적 접근 그리고 지정학적 접근으로 보아야한다. 먼저 "생태학적 접근"이다. 동남아는 아열대에 속하는 덥고 습한 기후대다. 같은 기후대라고 하더라도 대륙 동남아와 해양 동남아에 따라 우기와 건기가 다르다. 이는 산악지대와 해양을 끼고 있는지 여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대륙동남아는 중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해 해양동남아보다 대륙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주로 농경 문화가 중심이다 보니 해양동남아보다 더 폐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손바닥을 하늘로 보고 펼치면 5개 손가락 사이가 주요 강이 흐르고 손가락 하나 하나가 높은 산맥으로 보면 된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대륙동남아의 인적교류나 문화는 남북으로 이동하였고, 동서로는 산과 강에 막혀 상대적으로 이동이 쉽지 않았다. 해양동남아는 수많은 섬들로 구성돼 바다가 늘 열린 공간이었다. 동서양의 중간 위치와 몬순풍으로 인해 16세기 서양 제국의 동남아 진출 이전 이슬람 상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상업활동을 했다. 동남아 2000년 역사상 당대 제국주의 세력들이 동남아에서만 생산되는 향식료를 독점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진출을 한 것도 동남아 생태가 가져다준 이러한 생산물 때문이
에르메라(Ermera)의 새벽은 커피 향으로 시작된다.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등성이에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할 무렵, 농부들은 이미 붉게 익은 커피 체리를 손으로 하나씩 따고 있다. 농약도 없고, 비료도 없다. 수십 년 된 커피나무가 야생에 가깝게 자란 숲 속에서, 인간의 손길은 수확의 순간에 닿는다. 이 장면은 소순다 열도 동쪽 끝, 인구 약 142만명의 작은 섬나라 동티모르의 현재다. 동티모르 커피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글로벌 커피 기업들과 세계 각지의 스페셜티 로스터들이 오래전부터 이곳 원두를 수입해왔음에도, 이 나라 이름은 커피 산지로서 좀처럼 대중에게 각인되지 않았다. 잘 보관된 커피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동티모르의 커피 역사는 19세기 포르투갈 식민 통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주요 수출품이던 백단향 자원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갈되자, 포르투갈은 대체 작물을 모색했다. 옥수수와 사탕수수를 비롯한 여러 작물을 시도했지만, 척박한 고산 토양에서 끝내 살아남은 것은 커피뿐이었다. 특히 수도 딜리 남서쪽에 위치한 에르메라 지구가 커피 재배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서늘한 고지대 기후, 화산
최근 호르무즈 해협에서 벌어지는 봉쇄와 ‘역봉쇄’ 상황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국제질서의 근간인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 원칙을 다시 흔들고 있다. 이란이 통행료를 내는 선박만 통과시키겠다고 하고, 미국이 이를 군사·경제적으로 압박하는 구도는 명분을 떠나 결과적으로 동일하다. 국제항로의 자유로운 이용이라는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과 이란 모두 유엔해양법협약을 비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원칙인 항행의 자유만큼은 사실상 국제관습법으로 존중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그 최소한의 합의마저 흔들리고 있다. ■ 남중국해: 이미 진행된 ‘조용한 굳히기’ 문제는 이 흐름이 남중국해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그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4.15 로이터는 위성분석업체인 '반토르'를 인용해 중국이 필리핀과 해상영유권 분쟁 중인 '스카보로 솔(Scaboroug Shoal)' 암초에 선박을 배치하고 부유식 장벽을 설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이른바 ‘9단선(U자형 9개 점을 이은 선)’을 통해 남중국해의 약 90%에 대해 역사적 권리를 권원으로 사실상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2012년
딜리(Dili)의 아우디안(Audian) 거리를 처음 걷는 사람은 잠시 헷갈린다. 간판의 한자, 처마에 매달린 붉은 등, 유리창에 덕지덕지 붙은 세일 스티커. 이것이 동티모르의 수도인지, 아니면 중국 남부 어느 소도시의 변두리 골목인지. 선반마다 플라스틱 생활용품이 빼곡히 쌓인 가게 안에서 중국어가 오간다. 주인은 손님에게 테툼어로 가격을 말하고, 돌아서면 동료에게 그들만의 언어인 객가어(중국 광동성 동부·복건성 서부·장시성 남부) 방언으로 속삭인다. 필자가 동티모르에 거주하는 기간내내 해가 갈수록 중국계 가게는 늘었다. 티모르 현지인들의 소규모 상점은 줄었다. 그러던 어느날, 필자가 살던 동네에서 멀지 않은 중국인 운영 상가 하나가 불에 탔다. 밤사이 연기가 피어올랐고, 다음날 새벽 검게 그을린 간판만 남아 있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말이 많았다. 현지인과 관계가 나빠진 것이 화근이 됐다는 얘기가 설왕설래했다. 누가 불을 질렀다는 명확한 결론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화재는 내게 단순한 사고 이상의 무언가를 알려 주었다. 상권을 잠식해 가는 중국인을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불편한 시선, 그 눈빛이 연기 속에 스며 있는 것 같았다.
최근 맥킨지글로벌연구소가 내놓은 ‘지정학과 글로벌 교역의 기하학: 2026년 업데이트(Geopolitics and the Geometry of Global Trade: 2026 Update)’는 오늘의 세계 무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준다. 보고서의 첫 문장은 통념을 깨뜨린다. 2025년 세계 무역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경제 성장보다 더 빠르게 늘었다. 다만 그 무역은 예전처럼 “효율(efficiency)”만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더 가까운 지정학적 파트너를 향해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미-중 무역은 약 30% 줄었고, 미국은 중국산 공백의 약 3분의 2를 다른 나라 수입으로 메웠다. 중국은 완제품보다 중간재와 자본재 수출을 늘리며 “세계의 공장”에서 “공장의 공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의 또 다른 축은 AI(인공지능)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무역 증가의 약 3분의 1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장비 같은 AI 관련 품목이 이끌었다. AI 관련 교역은 전 세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약 40% 가까운 성장세를 보였다. 반대로 에너지 자원 교역 가치는 줄었다. 이제 세계 무역의 주인공은 원유와 벌크 화물이 아니라 칩, 서버, 네트워크 장비
호치민시 중심지 시립대극장(오페라하우스) 옆에 카라벨 호텔이 있다. 콘티넨털 호텔과 마주하고 있다. 대표적인 5성급 역사적 랜드마크 호텔이다. 역사적-사회문화적 의미가 커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이 지역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호텔은 1957년 공사를 시작하여 1959년 12월 24일 준공 및 개장되었다. 카티나 퐁시에(Catinat Foncier)사, 에어프랑스, 베트남 천주교 등 삼자가 공동 투자하여 건립되었다. 설계는 베트남 건축가 응웬반화(Nguyễn Văn Hòa)가 맡았다. 당시 최신식 이탈리아산 대리석, 방탄유리, 최첨단 에어컨 및 독립 발전기 시스템 등을 도입한 현대적 건축물이었다. 호텔 이름을 카라벨로 지은 것은 당시 호텔 소유주의 한 축인 에어프랑스가 1959년 운항을 시작한 제트 여객기 ‘쉬드 아비아시옹 카라벨(Sud Aviation Caravelle)’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호텔 1층 동커이 거리 방향에는 지금도 에어프랑스 사무실이 있다. 거의 항상 문이 닫혀있지만, 에어프랑스 간판이 여전히 걸려 있다. 주 중 한두 번 잠깐씩 문을 연다. 내가 처음 방문한 1988년에도 사무실이 있었다. 재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