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인의 아세안ABC
[서정인의 아세안 ABC 37] 심장부와 주변부의 귀환...한국은?
오늘날 국제질서는 흔히 미국과 중국의 경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이란을 둘러싼 중동의 충돌까지 함께 보면 세계는 단순한 미-중 경쟁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경쟁으로 재편되고 있다. 마이클 베클리와 할 브랜즈는 포린어페어지 2026년 7·8월호 "Heartland vs. Rimland"에서 이러한 변화를 20세기 초 매킨더의 '심장부(Heartland)'와 스파이크먼의 '주변부(Rimland)' 이론으로 설명한다. ■ 매킨더와 스파이크먼, 다시 읽는 지정학 영국의 지정학자 핼퍼드 매킨더는 유라시아 내륙을 장악하는 세력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미국의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은 유라시아를 둘러싼 서유럽, 중동, 남아시아, 동아시아의 연안지대, 즉 주변부를 장악하는 세력이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냉전기 미국의 NATO, 한미동맹, 미일동맹은 바로 이 주변부 전략의 산물이었다. 베클리와 브랜즈는 이러한 지정학이 오늘날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했다고 진단한다. ■ 느슨하지만 연결된 새로운 심장부 오늘날의 심장부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으로 구성된 느슨한 수정주의 연대다. 이들은 체제와 이념은 다르지만 미국 중심 국제질서를 약화시키려는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란은 드론을, 북한은 포탄과 병력을 지원했고, 중국은 기계류와 이중용도 기술을 제공했다. 공식 동맹은 아니지만 서로의 전략적 부담을 나누는 거래적 연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 영토에서 공급망으로 확장된 경쟁 21세기 지정학은 더 이상 영토와 군사력만의 경쟁이 아니다. 반도체, 인공지능, 희토류, 배터리, 해저케이블, 디지털 결제망, 금융과 공급망까지 새로운 전략 공간이 되었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유라시아를 연결하고, 남중국해에서는 해양력을 확대하며, 디지털 실크로드를 통해 통신과 데이터, AI 생태계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세계화는 국가 간 의존을 높였지만, 동시에 그 의존 자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 강하지만 분열된 주변부 흥미로운 점은 저자들이 미국과 동맹국의 힘이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 한국, 호주 등은 세계 최대 시장과 금융망,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심장부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하다. 그러나 문제는 힘이 아니라 결속이다. 유럽은 러시아를, 일본과 필리핀은 중국을, 한국은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경계한다. ASEAN과 인도, 중동 국가들은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유지한다. 심장부는 약하지만 목표가 분명하고, 주변부는 강하지만 전략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핵심 진단이다. ■ 새로운 주변부 전략 저자들은 새로운 주변부 전략으로 군사적 억지력 강화, 방산 공동생산, 공급망 다변화, 기술연합, 경제적 강압에 대한 공동대응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국가를 하나의 진영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핵심광물·방산·사이버안보 등 분야별로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이 유연하게 협력하는 '소다자 협력(minilateralism)'이다. ■ 한국, 전략적 산업국가의 역할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은 단순한 한미동맹의 전초기지가 아니다. 반도체, 배터리, 조선, 원전, 방산, AI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핵심 산업국가다. 한국의 전략은 '탈중국'이 아니라 '위험분산'이어야 한다.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유지하되 핵심광물과 공급망은 미국, 일본, 호주, 유럽, ASEAN 등으로 다변화하는 것이 현실적인 해법이다. ■ ASEAN, 누구의 주변부도 아니다 ASEAN은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주변부에 위치한다. 말라카해협과 남중국해는 세계 해상교통의 핵심 요충지다. 그러나 ASEAN은 미국 편도, 중국 편도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ASEAN이 강조하는 ASEAN 중심성(ASEAN Centrality)과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나온 생존전략이다. 중국의 투자와 미국의 안보를 모두 활용하면서 특정 국가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균형외교가 ASEAN의 기본 노선이다. ■ 한국과 ASEAN의 공동 과제 한국과 ASEAN이 함께 추구해야 할 방향도 분명하다. 반도체와 배터리, 디지털 전환, 식량·에너지 안보, 핵심광물, 전력망, 원전 등에서 협력을 확대해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과 기술, 시장을 다변화해 전략적 자율성을 높이는 데 있다. ■ 힘보다 중요한 것은 전략 베클리와 브랜즈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심장부는 원하는 질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주변부는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힘을 하나의 전략으로 결집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21세기 국제질서는 영토보다 네트워크, 군사력보다 기술과 공급망, 그리고 경제력보다 신뢰와 제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연결하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한국과 ASEAN 역시 '미국이냐 중국이냐'라는 이분법을 넘어, 전략적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협력 네트워크를 넓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국 앞으로의 세계질서는 누가 더 강한가가 아니라, 누가 더 잘 연결되고 더 잘 협력하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