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양수의 Xin chào
[배양수의 Xin chào22] 호찌민시 박물관, 웨딩드레스와 항전의 기억이 만나다
호찌민시 중심부를 걷다 보면, 오토바이와 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현대적 풍경 사이에서 문득 시간이 멈춘 듯한 회색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오늘날 호찌민시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이 건물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남부 지역의 권력과 행정을 상징하던 공간이었다. 189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처음에는 남부 지역의 산물과 상업적 성과를 전시하기 위한 상업박물관으로 계획되었으나, 완공 이후 인도차이나 총독부 부총독 관저로 사용되었고, 1911년부터는 남부 총독(Dinh Thống đốc Nam Kì) 관저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바오다이 정권 시기에는 자롱궁(Dinh Gia Long)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특히 응오딩지엠 정권 때 일어난 쿠데타(1963년 11월) 때 이 건물과 외부로 연결된 지하 터널로 지엠 대통령과 동생 응오딩뉴가 피신했던 일로 유명하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에는 다시 박물관 기능을 회복해 현재의 호찌민시 박물관이 되었다. 이처럼 이 건물은 단순한 관광명소가 아니라, 프랑스 식민 지배와 전쟁, 정권 교체와 통일 그리고 현대 도시의 일상까지 겹겹이 품고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이 건물의 첫 인상은 매우 아름답다. 회색 외벽(초기에는 흰색), 균형 잡힌 정면, 유럽식 기둥, 넓은 계단과 회랑은 프랑스 식민지 건축 특유의 장중함과 우아함을 보여준다. 오늘날 이곳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장소이자, 현지 신혼부부들이 웨딩 촬영을 위해 찾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하얀 웨딩드레스와 검은 턱시도를 입은 신혼부부가 계단 위에 서면, 이 건물은 마치 유럽의 궁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단순한 미학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식민지 권력은 건축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지배 질서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려 했다. 높은 천장, 웅장한 입구, 넓은 정원, 대칭적인 구조는 모두 권력의 언어였다. 오늘 우리가 감탄하는 건축적 아름다움 안에는 한때 식민 지배의 위계와 억압을 상징하던 기억이 함께 숨어 있다. 호찌민시, 곧 과거의 사이공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지배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던 도시였다. 프랑스는 사이공을 행정, 상업, 군사, 문화의 중심지로 재편했고, 넓은 대로와 성당, 우체국, 관저, 법원 등 서구식 건축물들을 배치했다. 이러한 건물들은 단순한 도시 기반 시설이 아니라, 식민 권력이 도시를 어떻게 조직하고 통치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적 장치였다. 호찌민시 박물관 건물 역시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건물은 오래된 아름다운 건축물이면서 동시에, 외부 권력이 한 도시를 자신의 질서에 맞게 설계하고 장식한 흔적이다. 건축적으로도 이 건물은 매우 흥미롭다. 삼각 박공과 고전주의적 정면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떠올리게 하며, 원래 대홀 입구에는 상업의 신 헤르메스 조각상이 양쪽에 서 있었다. 헤르메스는 상업을 수호하는 신으로, 이 건물이 처음에는 상업박물관으로 계획되었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전체적인 장식의 중심은 유럽 고전주의 양식이지만, 건물 네 면의 지붕 처마 장식에는 코브라, 악어, 잉어와 같은 토착 동물 부조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프랑스 건축가들이 프랑스적 요소와 인도차이나적 요소를 결합하려 한 초기 실험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건물은 순수한 유럽식 건축물이 아니라, 식민지 사이공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유럽의 권위와 현지의 이미지를 결합한 혼종적 건축물이었다.((Kiến trúc Pháp - Đông Dương dấu tích "Sài Gòn – Hôn ngọc Viễn Đông, 97-98.) 건물 내부의 중심에는 크고 웅장한 ‘I’자 형태의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대홀의 시각적 중심을 이루며, 접견식이나 전시회, 회의 같은 공식 행사를 장중하게 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아치형 구조와 코린트식 기둥, 채광용 유리는 권위와 우아함을 동시에 연출했다. 건물 뒤편에는 넓은 정원이 있었고, 높은 지대에 자리한 건물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는 관저의 품격을 한층 강조했다. 과거에는 벽돌 담장과 철책, 생울타리, 육중한 경비실도 있었으나, 1940년대 이후 일부 시설은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원래의 직육면체형 입구는 평지붕 현관과 발코니가 있는 형태로 바뀌었고, 헤르메스 신상과 경비실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건물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그 모습 역시 시간 속에서 변해 온 것이다. 이 건물이 자리한 부지도 오래된 기억을 품고 있다. 프랑스가 들어오기 전 이 지역은 ‘꺼이 다 꼼 시장’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그 이름은 줄기가 굽은 오래된 반얀나무에서 유래했다. 이 시장에서는 북, 의장용 양산, 말안장과 굴레, 과거 급제자들이 쓰던 모자 등이 거래되었다. 현재도 건물 앞 공원에는 커다란 반얀나무가 남아 있어, 도시의 더 오래된 시간을 증언하는 자연의 흔적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공간의 역사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아래에는 프랑스 이전의 지역 생활사와 시장의 기억도 함께 깔려 있다. 이 건물의 기능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이곳 뒤뜰에서 남부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는 의식이 열렸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는 베트남공화국 정부의 총리 관저로 사용되었고, 이후 응우옌 왕조를 창건한 황제의 이름을 따 자롱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2년에는 인근 독립궁이 폭격으로 크게 파손되면서 이 건물이 임시 대통령궁으로 사용되었다. 1963년 쿠데타 이후에는 국가원수 관저가 되었고, 이어 최고법원 청사로도 쓰였다. 그리고 1975년 4월 이후, 베트남 통일과 함께 이 건물은 다시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한 건물이 상업박물관, 부총독관저, 총독관저, 총리 관저, 자롱궁, 임시 대통령궁, 국가원수 관저, 최고법원 그리고 박물관으로 바뀌어 온 과정은 베트남 현대사의 굴곡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호찌민시 박물관은 사이공, 자딩, 그리고 현재의 호찌민시에 이르는 도시의 역사를 전시한다. 전시는 지리, 생활문화, 산업, 교역, 전통예술, 공동체의 삶을 다루는 동시에,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선 항전과 미국과의 전쟁, 통일 이후의 변화까지 보여준다. 특히 항불·항미 투쟁 관련 전시는 베트남이 자신의 현대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여기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도시민의 삶과 청년들의 참여, 지역 공동체의 희생, 독립과 통일을 향한 집단적 의지의 이야기로 제시된다. 총, 군복, 사진, 문서, 지하 활동의 흔적과 선전 자료들은 베트남 현대사를 외부 세력에 의해 규정된 역사가 아니라, 외부 세력에 맞서 주권을 회복해 온 역사로 구성한다. 물론 박물관의 전시는 언제나 중립적인 창이 아니다. 박물관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공동체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호찌민시 박물관 역시 베트남 국가 서사의 틀 안에서 식민 지배와 전쟁의 기억을 배열한다. 식민 지배의 경험은 단순한 피해의 기억으로 머물지 않고, 저항과 독립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전쟁의 상처는 패배나 고통의 기록만이 아니라, 승리와 회복의 서사로 재구성된다. 중요한 것은 한때 식민 권력의 공간이었던 건물이 이제는 그 권력을 넘어선 역사를 말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공간의 정치성을 생각하게 한다. 건물은 물리적으로는 과거의 형태를 유지하지만, 그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지배자의 행정 공간이었던 곳이 시민을 위한 박물관이 되고, 권력의 위엄을 드러내던 계단이 관광객과 신혼부부의 사진 배경이 된다. 공간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 공간에 부여되는 의미가 바뀐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용도 변경이 아니라, 도시가 자신의 과거를 현재의 삶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호찌민시 박물관은 바로 그 변화를 조용히 증언한다. 이곳에서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박물관 안팎의 풍경이 동시에 펼쳐질 때이다. 한쪽에서는 관람객들이 항전의 기록을 바라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혼부부가 새출발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는다. 결혼사진은 개인의 미래를 향한 약속을 기록하는 이미지이고, 박물관은 공동체의 과거를 보존하고 해석하는 공간이다. 개인의 미래와 공동체의 과거가 같은 건물 안에서 만나는 셈이다. 신혼부부에게 이곳은 아름다운 사진을 남길 수 있는 장소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진 속에는 의식하지 못한 채 도시의 긴 역사도 함께 들어간다. 웨딩드레스의 흰빛 뒤에는 식민지 건축의 외벽과 전쟁의 기억이 조용히 자리한다. 호찌민시 박물관의 의미는 바로 이 복합성에 있다. 식민지 건축물을 단지 아름다운 관광 자원으로만 소비한다면, 그 건물에 담긴 지배와 폭력의 기억은 낭만적 배경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반대로 식민지의 상처만을 강조한다면, 현재 시민들이 그 공간을 새롭게 사용하고 살아가는 활력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 박물관은 그 두 시선 사이에 놓여 있다. 식민지의 흔적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폐허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과거의 건물을 보존하되, 그 안에 베트남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도시의 역사를 채워 넣는다. 그리고 그 바깥에서는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산책하며 결혼을 기념한다. 따라서 호찌민시 박물관을 방문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감상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도시가 겪은 지배와 저항, 상처와 회복, 기억과 일상의 관계를 읽는 일이다. 이 건물은 총독부와 관저, 궁전과 법원, 박물관이라는 여러 이름을 거치며 베트남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품어 왔다. 오늘날 그 앞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젊은 부부의 모습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동시에 역사의 전유를 보여준다. 과거의 권력 공간은 더 이상 지배자의 관저가 아니라 시민의 박물관이자 삶의 배경이 되었다. 호찌민시 박물관은 그래서 묻는다. 과거의 권력은 어떻게 현재의 풍경이 되는가. 고통의 역사는 어떻게 시민의 공간으로 바뀌는가. 그리고 한 도시는 어떻게 상처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가. 이곳에서 역사는 전시실 안에만 있지 않다. 계단 위의 웨딩드레스에도, 건물 외벽을 비추는 햇살에도, 그 앞을 지나가는 오늘의 시민들 속에도 함께 남아 있다. 배양수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