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혁명-미중 경쟁-기후위기-디지털 경제 전환과 아세안 미래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산하 헨더슨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미래를 넘어:2050년 세계를 위한 네 가지 시나리오(Beyond Tomorrow: Four Scenarios for the World of 2050)” 보고서는 단순한 미래예측 보고서가 아니다. 향후 25년간 세계를 흔들 100여 개 메가트렌드를 종합 분석해 인류가 직면할 “AI 풍요, 기후연합, 분열된 진영(두쪽 진영), 디지털 적자생존 네 가지 시나리오” 중심으로 네 가지 미래 질서를 제시한 일종의 전략 지도에 가깝다. 이 보고서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하나의 미래를 단정적으로 예측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반된 네 개의 현실적 시나리오를 동시에 제시하며 “어떤 미래가 오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국가와 기업, 지역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네 가지 시나리오가 모두 아세안의 미래와 직결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아세안은 AI 혁명, 공급망 재편, 미중 경쟁, 기후위기, 디지털 경제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교차하는 세계의 전략적 접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올해 4월 초 사이공에서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건축물』이라는 책을 펴낸 쩐히우푹띠엔(Trần Hưu Phúc Tiến) 씨를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가 “여기 가까운 곳에 한국인이 세운 팔각정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1989년 5월쯤에 그곳을 지나다가 본적이 있었지만, 당시는 아주 낡은 상태였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다시 찾아갔다. 호찌민시 5구, 훙브엉·스반하잉-응우옌찌타잉 대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오래된 공원 하나가 있다. 오늘날 이곳은 호아빙(Hòa Bình, 평화)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공원 안에는 짙은 푸른빛을 띤 낡은 팔각정이 서 있다. 많은 시민이 그 앞을 지나가고, 때로는 그늘에 앉아 더위를 피한다. 그러나 이 정자가 왜 그 자리에 세워졌는지,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또 그 안에 어떤 시대의 기억이 스며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정자의 이름은 딩호아빙(Đình Hòa Bình)이다. 한자로는 ‘平和亭’, 한국어로는 ‘평화정’이다. 이름 그대로 ‘평화’를 뜻하는 정자다. 하지만, 이 평화라는 말은 단순하지 않다. 이 건축물은 1972년, 베트남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기에 세워졌다. 당시 사이공시는 전쟁의 긴장 속에 있
베트남 작가 트엉하의 장편소설 『완벽한 위장』이 배양수 번역으로 한국 독자들을 만난다. 원제는 『Vỏ bọc hoàn hảo』로, 제목 그대로 인간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완벽한 외피’와 그 아래 감춰진 상처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도서출판 다해, 신국판 320페이지)이다. 작가 트엉하(Thương Hà)는 1981년생으로 현재 하노이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그녀는 “문학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내는 힘이다.”라고 말한다. 출간 작품으로는, 『한 길』, 『유랑』, 『PTSD의 사람』, 『불온한 변경』, 『NALIS - 운명에 밀려』, 『지우의 어둠』, 『불멸의 원혼들』, 『원한의 사랑』, 『대가』, 『가자 지구의 잔해』 등이 있다. ■ 상처와 침묵, 그리고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에 대하여 이 소설은 겉으로는 성공한 기업인이자 존경받는 인물로 살아가는 부이이엔과, 그의 아들 응이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부이이엔은 전쟁과 결핍,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지나오며 사회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삶을 구축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쌓아 올린 명예와 성공은 진정한 치유의 결과라기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감추기 위한 또 다른 장막에 가깝다
최근 국제사회는 다시 호르무즈 해협을 주목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군사행동 이후 중동 긴장이 고조되며 국제 유가와 액화천연가스(LNG) 가격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번 위기의 진짜 파장은 단순한 에너지 가격 상승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4월 16일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느리게 진행되는 비극(A slow-motion tragedy)”이라는 사설에서 “호르무즈 봉쇄와 엘니뇨가 겹칠 경우 글로벌 식량위기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동남아시아는 그 충격의 최전선 가운데 하나다. 많은 사람들은 식량안보를 곧 쌀 부족 문제로 이해한다. 그러나 오늘날 아세안 식량안보의 핵심은 훨씬 복합적이다. 쌀은 아세안 전체로 보면 여전히 자급권이지만, 비료-밀-사료-에너지-물류가 동시에 흔들리는 복합 공급망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우선 호르무즈 해협은 단순한 원유 수송로가 아니다. 2024년 기준 세계 비료 교역의 최대 30%, LNG의 약 20%, 원유 교역의 약 27%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 천연가스는 암모니아-요소 비료 생산의 핵심 원료이고, 걸프 지역 황(sulfur)은 인산비료 생산에 필수적이다. 국제비료협회(IFA)에 따르면 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벤치에 비스듬히 앉은 한 사내의 동상이 있다. 한국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큰 봉우리, 횡보 염상섭이다. 그의 등 뒤 세 개의 큰 바위에는 굵은 한글이 새겨져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문장 앞을 지날 때마다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최근, 딜리에서 돌아온 뒤로는 한 가지 상상을 더하게 되었다. 만약 이 바위와 이 글귀를,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 한복판에 똑같이 세운다면 어떨까. 그곳을 지나는 동티모르 사람은 이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까. 아마도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언어로 책을 읽지?” 이 되물음 속에 동티모르 독서문화의 모든 문제가 기반이 들어 있다. 필자는 딜리 내 여러 도서관을 찾아본 적이 있다.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도서관은 장서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용자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책은 있는데 사람이 없는, 묘하게 적막한 공간이었다. 반면 시내 중심의 사나나 구스마오 독서실(Xanana Gusmão Reading Room)과 UNTL 캠퍼스 안의 ‘우마 아메리카(Uma Amerika)’는 달랐다. 학생과 청년들이 책상마다 앉아 자료를 펼치고 있었고, 공간은 살아
“문학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내는 힘이다.” 베트남 작가 트엉하의 장편소설 『가자 지구의 잔해』가 배양수 번역으로 나왔다. 원제는 『Mảnh vụn Gaza』이다. 이 작품(도서출판 다해, 신국판 179페이지)은 전쟁의 폐허를 배경으로 하지만, 단순한 전쟁소설에 머무르지 않는다. 총성과 폭격의 기록 너머에 남겨진 아이들, 침묵하는 여성들, 잃어버린 가족, 그리고 사랑받고자 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따라가며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상처를 응시한다. 작가 트엉하(Thương Hà)는 1981년생으로 현재 하노이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그녀는 “문학은 사랑을 통해 인간을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내는 힘이다.”라고 말한다. 출간 작품으로는, 『한 길』, 『유랑』, 『PTSD의 사람』, 『불온한 변경』, 『NALIS - 운명에 밀려』, 『지우의 어둠』, 『불멸의 원혼들』, 『원한의 사랑』, 『대가』, 『완벽한 위장』 등이 있다. ■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기억과 온기 소설의 시간은 2077년, 공간은 가자 지구다. 뜨거운 햇볕 아래 폐허가 된 거리를 달리는 오프로드 차량, 무너진 건물과 생명의 흔적이 사라진 거리, 그 안에서 임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 존립을 건 두 개의 거대한 쓰나미가 충돌하는 해안가에 서 있다. 하나는 1964년부터 1974년 사이에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 무려 954만 명의 대규모 은퇴 파도다. 전체 인구의 약 18~19%를 차지하는 이 거대한 세대가 2024년부터 2035년까지 순차적으로 법정 은퇴 연령인 60세에 진입한다. 다른 하나는 청년들이 내몰리고 있는 일자리 절벽이다. 다 함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자. 우리는 이미 쓰라린 실패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2016년, 정년을 55세에서 60세로 연장했을 때 무엇이 일어났는가. 기업의 인건비는 폭증했고, 청년 고용은 뚜렷하게 쪼그라들었다. 한국은행의 냉혹한 분석은 이를 숫자로 여실히 증명한다. 고령 근로자 1명이 늘어날 때마다 청년 근로자는 평균 0.4명에서 1.5명씩 사라졌다. 특히 임금 체계가 경직된 대기업과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 이 ‘청년 일자리 잠식 효과’는 참혹할 정도로 두드러졌다. 이는 단순한 인과관계가 아니다. 기성세대의 기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청년의 진입로를 원천 차단한 ‘구조적 잠식’이었음을 뜻한다. 하물며 저성장・고물가・양극화로 그 어느 때보다 숨 막히는 2026년, 우리는 이 잘못
독립의 영웅이 권력을 맡게 될 때, 그 앞에는 늘 두 갈래 길이 놓였다.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는 길과, 자신이 세운 제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길이다. 6월 21일 쿠알라룸푸르에서 별세한 프란시스쿠 구테흐스(Francisco Guterres) '루올로(Lú-Olo 투쟁시절 가명)' 전 대통령은 후자를 택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식민과 전쟁을 딛고 헌정을 세워본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그의 죽음을 먼 나라의 소식으로만 흘려보낼 수 없게 한다. 루올로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24년의 독립 투쟁 저항이 아니라, 그 저항을 끝낸 뒤의 선택이다. 본래 그는 1973년 고향 오수(Ossu)의 학교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던 교사였다. 그러나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과 함께 산으로 들어간 뒤, 그는 동료 지도자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누군가는 해외에서 외교 전선을 폈고 사나나 구스망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이 점령기 도중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지만, 루올로는 끝까지 적의 손에 떨어지지 않고 야전에 남았다. 그는 24년의 전쟁을 산속에서 살아남은 단 네 명의 프레틸린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명령과 결단, 생존과 전투가 그의 언어였다.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