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남프엉(Nam Phương) 황후와 바오다이(Bảo Đại) 황제의 한국어본이 베트남에서 나왔다. 바오다이 황제와 남프엉 황후는 베트남 근현대사의 마지막 군주제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들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 자료집 『남프엉 황후와 바오다이 황제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어본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베트남 여성출판사(Vietnam Women’s Publishing House)에서 출간된 연구 기반 역사서다.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후였던 남프엉 황후의 삶과 시대를 깊이 있게 추적한 작품이다. 이 책은 단순한 전기나 역사 서술을 넘어, 실제 역사 현장을 찾아가며 수집한 자료와 인터뷰, 문헌 조사 등을 토대로 구성된 현장 기반 역사 탐구 기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두 저자인 빙다오(Vĩnh Đào)와 응우옌 티 타잉 투이(Nguyễn Thị Thanh Thúy)는 베트남과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직접 방문하며 약 3년에 걸쳐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검증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연구 과정을 통해 이 책은 베트남 왕조의 마지막 시기를 대표하는 두 인물, 바오다이 황제와 남프엉 황후의 실제 삶과 역사적 의미를
바오다이(Bảo Đại) 황제와 남프엉(Nam Phương) 황후는 베트남 근현대사의 마지막 군주제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 부부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 자료집 『남프엉 황후와 바오다이 황제의 발자취를 따라』 한국어본이 출간되었다. 특히 남프엉 황후는 응우웬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의 황후이자, 베트남 역사상 생전에 공식적으로 책봉된 두 번째 황후였다. 황후의 본명은 잔 마리엣 응웬티란(Jeanne Mariette Nguyễn Thị Lan)이며, 사이공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베트남 남부의 부유한 가톨릭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서구식 교육과 교양을 쌓으며 성장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정치적 격변 속에서 바오다이 황제는 퇴위를 선언한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는 약 143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막을 내렸다. 이후 남프엉 황후는 다섯 자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남부의 칸 지역에서 생활하다가 이후 프랑스 중부의 작은 마을 샤브리냑으로 이주해 조용한 삶을 살았다. 특히 그녀의 말년은 매우 은둔적인 삶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권력은 본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위임된 것이지만, 그것이 사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때 사회는 빠르게 병들어 간다. 특히 행정 권력이 법과 제도를 빌미로 국민을 통제하는 위치에 설 때, 그 힘은 정의의 수단이 아니라 착취의 장치로 변질되기 쉽다. 역사는 이러한 사례를 반복적으로 보여 왔다. 베트남 학자 또안아잉(Toàn Ánh)이 1970년에 펴낸 『부패와 뇌물의 예술』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가 실려 있다. “부패는 후진 민족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끼치는 가장 음험하고도 치명적인 재앙이다. 중국은 부패로 인해 결국 공산 세력의 손에 나라를 빼앗겼다. 공금을 착복하고 직권을 남용하는 행위가 중국 국민당을 패배하게 했으며, 한국에서도 이승만 정부가 바로 이러한 부패 문제로 인해 흔들리다가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그는 부패를 단순한 개인의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구조적 병폐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이야기도 아니지만, 읽다 보면 낯설기보다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군수
2002년 가을, 2002 부산 아시안게임(9.29~10.14)이 도시를 뜨겁게 달궜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열린 대형 국제 스포츠 행사였다. 부산은 들썩였고, 대학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는 교수와 학생 모두가 서포터즈로 나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베트남 서포터즈’가 되었고, 미디어센터에서 베트남 기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내 역할은 단순했다. 셔틀버스를 놓친 기자를 경기장까지 태워다 주고, 통역을 돕고, 길을 안내하는 일. 그러나 대회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베트남 선수단 일정이 줄어들자, 기자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누군가는 부산 명소를 찾았고, 누군가는 조기 귀국을 택했다. 그 무렵, 후이토(HUY THỌ)라는 이름의 기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베트남 유력 일간지 뚜오이째(Tuổi Trẻ) 소속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조용하고 성실한 인상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잠시 ‘기자’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김해의 한 소금공장에서 하루 노동자로 일했다. 다음은 그가 직접 체험한 내용을 일인칭으로 서술한 기사 일부이다. 원문에는 외국인 기자의 음차 표기 특성상 한국인 인물 이름이 다소 혼재되어 있으나, 당시 현장의 기록을 존중해
우연히 펼친 책의 한 구절을 자기 삶에 비추어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현재의 선택과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문화적 실천이다. 이 풍습의 중심에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국민문학, 『쭈엔 끼에우(Truyện Kiều)』가 있다. 한국에서는 흔히 『끼에우전』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단순한 고전 소설을 넘어, 베트남 사회에서 문학·윤리·종교·민속 신앙이 겹치는 독특한 문화적 지위를 차지해 왔다. ■ 『끼에우전』, 투이 끼에우라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 『끼에우전』은 베트남의 시인이자 관료였던 응웬주(Nguyễn Du, 1965~1820)가 지은 운문소설이다. 총 3,254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베트남 고유의 정형시인 6·8구체(lục bát) 형식을 사용한다. 한 연이 6음절 행과 8음절 행이 짝을 이루고, 요운과 각운을 동시에 맞추는 고도의 운율 체계를 지닌다. 단순히 길이가 긴 작품이 아니라, 언어적·음악적 완성도가 극히 높은 시가 문학인 셈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투이 끼에우(Thúy Kiều)’라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간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수차례의 이별과 고난, 배신과 좌절을 겪은 뒤, 긴 우회를 거쳐 마침내 삶의 균형을 되찾는
베트남에는 집안에 상을 당하면 결혼을 미루는 관습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부모상을 당했을 때는 특히 엄격하여, 전통적으로는 삼년상(三年喪)에 준하는 장기간의 애도 기간에는 혼인을 비롯한 모든 경사를 삼가는 것이 마땅한 도리로 여겨졌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규범이 아니라, 죽은 이를 충분히 애도하지 않은 채 산 자의 기쁨을 앞세우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사고방식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규범은 언제나 현실의 조건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 관습이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낸다. 이미 결혼식을 앞둔 청년에게 삼 년에 가까운 시간은 지나치게 길다. 특히 혼인이 개인의 선택을 넘어 가문과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결혼의 지연은 개인의 삶 전반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건이 된다. 이 지점에서 베트남 사회가 선택해 온 하나의 우회로가 바로 ‘급속결혼’이다. 이 관행은 베트남어로 “cưới chạy tang”(상을 피해 급히 치르는 결혼), 또는 “cưới gấp khi có tang”(상중에 급히 치르는 결혼)과 같이 표현된다. 표현 자체가 말해주듯, 이는 축복된 출발이라기보다 피할 수 없는
한국 고전문학의 대표작 ‘춘향전’이 베트남의 민담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베트남 민속학자 응웬동찌가 수집하여 출판한 『베트남 민담집』에 「춘향낭자전」이 나오면서, 이 놀라운 사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베트남판 춘향전’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한–베 문학 교류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한국과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국 문화를 매개로 한 ‘동문(同文)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한자를 공통의 문자로 사용했고, 유교적 정치 질서와 문학 관념을 공유했다. 또한 두 나라는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라는 비슷한 경험을 겪으며 근대에 진입했다. 이러한 조건은 문학과 사상이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이른바 ‘동문 문화권’은 단순히 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전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방식, 문학이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역할, 그리고 서사가 윤리적 판단을 담아야 한다는 인식까지 공유했던 문화적 토대를 가리킨다. 이러한 공통의 인식 위에서 한 나라의 이야기와 시가 다른 나라로 옮겨 가는 일은 결코 낯선 일이 아니었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은 더 이상 낯선 나라가 아니다. 수십만 명의 결혼이주민, 노동자, 유학생이 이미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되었다. 베트남은 주요 교역국이자 전략적 협력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베트남을 안다”라는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문제는 무지 그 자체라기보다, 제한된 지식과 체험이 어느새 ‘이해’라는 이름으로 굳어질 때 발생한다. 최근 베트남의 사회-문화를 소개한다는 일부 서적과 교육 자료를 살펴보면, 단순한 사실 착오를 넘어 인식의 틀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이는 개별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국 사회에서 출판물과 교육 자료를 통해 재생산되는 베트남 인식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 제도와 헌법을 ‘부분 인용’으로 이해하는 방식 ― 국가를 가장 쉽게 단순화하는 방법 자주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는 베트남의 정치-법 제도를 일부 조항만 인용해 국가의 성격을 단정하는 서술 방식이다. 예를 들어 베트남 헌법을 한국 헌법과 비교하면서, 베트남에는 ‘국민주권’ 개념이 없고 영토 관련 조항만 강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경
요즘 금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그래서 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국 사회에서 ‘금모으기’는 흔히 1997년 외환위기 국면에서의 국민적 연대-가정의 금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아 국가 부채를 갚겠다는 집단적 결단-로 기억된다. 위기는 개인의 삶을 옥죄었지만, 그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은 공동체적이었다. 그러나 이 서사는 한국만의 독점적 경험은 아니다. 베트남은 독립의 문턱에서 이미 ‘금모으기’를 국가 건설의 실천으로 제도화했다. 1945년 가을, 독립 직후의 베트남이 선택한 길은 화폐 정책이나 외채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와 자발적 기여를 동력으로 삼는 ‘황금주간(Tuần lễ vàng)’이었다. ■ 보응웬잡 장군 칙령 '황금주간' 공포...독립 직후의 절박함과 선택 1945년 9월, 베트남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가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식량난이 심각했고, 북부에는 외국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무장과 재정은 취약했다. 이때 임시 정부는 구호와 재정의 동시 해법을 모색했다. 하노이 오페라하우스에서 기아 구제 운동을 발족하고, 남부에서 쌀을 북부로 수송하는 조치가 병행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국가 독립을 위한 기금을 제도적으로 마련한다. 19
껀터(Cần Thơ)시는 메콩델타(Mekong Delta)의 심장도시다. 호찌민시에서 남쪽으로 약 170km 떨어진 곳에 있는 메콩델타 지역의 중심 도시다. 100여 년 전에는 서남부 지역의 수도라는 의미로 ‘떠이도(Tây Đô, 西都)’라 불리기도 했다. 껀터는 농산물과 과일,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후는 열대 몬순기후로 연중 고온다습하다. 연평균 기온은 약 28℃, 연간 일조시간은 2,249시간에 이른다. 농업에 매우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우기에는 홍수가 잦아 전에는 시 전체 면적의 절반 가량이 침수되기도 했다. ■ ‘껀터’라는 이름에 담긴 네 가지 이야기 껀터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응웬아잉(응웬 왕조의 태조)이 왕위에 오르기 전, 배에 타고 이 지역에 저녁 무렵 도착했을 때의 일화에서 비롯된 설이다. 강 양쪽에 배들이 즐비하게 정박해 있고, 등불 아래에서 노래와 시 낭송 소리가 들려오는 풍경에 감탄하여 이 강을 ‘껌티쟝(Cầm thi giang, 琴詩江)’이라 불렀는데, 이 ‘껌티’가 발음 변화로 ‘껀터’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둘째는 과거 강변에 자우껀(rau cần)과 자우텀(rau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다. 해마다 반복되는 띠의 순환이지만, 유독 새해를 앞두고 사람들은 자신의 띠, 가족의 띠 그리고 다가올 해의 의미를 다시 떠올린다. 띠는 흔히 ‘전통’ 혹은 ‘미신’으로 가볍게 소비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띠는 한 사회가 인간관계와 삶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리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 장치다. 특히 같은 십이지(十二支) 체계를 공유하는 한국과 베트남은, 유사한 틀 속에서 매우 다른 방식으로 띠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 십이지의 상징, 한국과 베트남서 다르게 작동하는가? 한국과 베트남은 모두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축·인·묘로 이어지는 십이지 체계를 공유한다. 다만 한국의 토끼띠는 베트남에서는 고양이 띠로, 소띠는 물소 띠로 대응하는 등 일부 차이가 존재한다. 그 외의 동물들은 기본적인 대응 관계를 공유하지만, 각 동물에 부여되는 상징과 민속적 해석에서는 문화적 변주가 나타난다. 십이지 체계는 단순한 동물 분류가 아니라, 음력을 기반으로 한 시간 인식 체계이자 자연 질서를 인간 삶에 대응시키는 세계관이다. 해와 달, 계절의 순환, 인간의 생애를 하나의 구조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십이지는 ‘시간
호찌민시 1구 응웬주 거리. 오늘도 이곳, 대한민국 총영사관에는 비자와 민원, 기업 상담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이 건물이 베트남과 한국을 잇는 공식 외교 공간이라는 사실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 건물의 과거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한때 베트남 마지막 황후, 남프엉 황후의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 한–베 관계는 한 채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신문 사료를 통한 신시대 국모, 남프엉 황후』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레티빙 여사는 응웬흐우하오(남프엉 황후의 아버지)와 혼인한 이후, 부부는 주로 사이공 응웬주 거리의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이 저택은 훗날 대한민국 외교 공관(현 주호찌민시 대한민국 총영사관) 건물로 사용된 곳이다.” (Lương Hoài Trọng Tính, 2023, p.17) 남프엉 황후가 되기 전, 그녀의 이름은 잔(Jean) 마리엣 응웬티란이었다. 그녀는 황궁이 아니라, 사이공의 한 저택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집이 바로 오늘날 한국 외교관들이 근무하고 있는 응웬주 거리의 건물이다. 이 집은 황실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당시 사이공 상류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