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펼친 책의 한 구절을 자기 삶에 비추어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현재의 선택과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문화적 실천이다.
이 풍습의 중심에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국민문학, 『쭈엔 끼에우(Truyện Kiều)』가 있다. 한국에서는 흔히 『끼에우전』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단순한 고전 소설을 넘어, 베트남 사회에서 문학·윤리·종교·민속 신앙이 겹치는 독특한 문화적 지위를 차지해 왔다.
■ 『끼에우전』, 투이 끼에우라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
『끼에우전』은 베트남의 시인이자 관료였던 응웬주(Nguyễn Du, 1965~1820)가 지은 운문소설이다. 총 3,254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베트남 고유의 정형시인 6·8구체(lục bát) 형식을 사용한다. 한 연이 6음절 행과 8음절 행이 짝을 이루고, 요운과 각운을 동시에 맞추는 고도의 운율 체계를 지닌다. 단순히 길이가 긴 작품이 아니라, 언어적·음악적 완성도가 극히 높은 시가 문학인 셈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투이 끼에우(Thúy Kiều)’라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간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수차례의 이별과 고난, 배신과 좌절을 겪은 뒤, 긴 우회를 거쳐 마침내 삶의 균형을 되찾는 이야기다. 이 서사는 개인의 운명과 사회 구조, 도덕적 선택과 업보(業報)를 함께 다루며, 유교·불교·민간신앙이 자연스럽게 혼합된 세계관을 드러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끼에우전』은 단순한 문학작품을 넘어선다. 이 책은 “읽는 책”이자 “외우는 책”, 나아가 “삶을 해석하는 틀”로 기능해 왔다. 베트남에서는 『끼에우전』의 구절을 인용해 대화를 나누고, 인생의 국면을 설명하며, 중요한 선택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관습이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끼에우전』으로 점을 치는 풍습을 ‘보이 끼에우(Bói Kiều)’라고 한다.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현재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를 떠올린 뒤 책을 무작위로 펼친다. 그리고 선택된 쪽이나 행에 적힌 구절을 읽고, 그 의미를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 해석한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미래 사건을 구체적으로 “맞히는” 예언적 점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이 끼에우는 길흉을 단정하기보다는, 현재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해석학적 점복에 가깝다. 구절 속 상징, 인물의 처지, 정서적 톤을 통해 질문자의 상태를 비추어 보고, 선택의 방향과 마음가짐을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끼에우 점은 운명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게 해준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문학 텍스트가 거울처럼 작동하는 셈이다.
■ 『시인, 강을 건너다』에 나타난 책점의 장면
이러한 풍습은 문학작품 속에서도 생생하게 묘사된다. 『시인, 강을 건너다(2015)』에는 『끼에우전』으로 점을 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정에 봉은 '끼에우전' 책을 들고 조용히 집 앞으로 나갔다.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붉은 전등 불빛 아래에서 봉은 경건하게 합장한 두 손 사이에 책을 쥐고 빌었다. “사해 대왕님, 각연 스님, 취교 선녀님께 빕니다.”
이 말은 도카 씨의 부인 즉, 봉의 할머니가 끼에우전 책으로 점을 칠 때 빌며 하는 말이었다. 정말 신기한 것은 프랑스어를 몰랐고, 한자는 물론 베트남어 글자는 더욱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끼에우전' 전체 내용을 능숙하게 모두 외웠다. 책 앞쪽부터 순서대로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고 뒤쪽부터 거꾸로 외울 수도 있었다. 어떤 부분을 가리키면 그 부분을 정확하게 외웠다. 게다가 독특한 것은 도카 부인이 '끼에우전'으로 점을 잘 보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누구네 집이든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손들과 관련된 일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녀는 끼에우전 을 들고 가서 점을 쳤다. 봉은 할머니의 장엄하고 경건한 얼굴과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인쇄된 것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책을 펼쳐 봉의 얼굴에 대고는 읽어달라고 했다.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이다. 책으로 점을 치려는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홀수 쪽이냐, 짝수 쪽이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봉아!”
합장하고 나서, 봉은 '끼에우전'을 펴고 왼쪽 페이지를 보았다.
“후사를 이을 수가 없으니 / 이를 악물고 헤어지려 하오.”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봉은 눈을 깜박이며 다시 읽었다. '끼에우전'의 1,954번째 행으로 “이를 악물고 헤어지려 하오. Cắn răng bẻ một chữ đồng làm hai”라는 구절이었다.(직역하면, 이를 악물고, 한가지 동(同)자를 둘로 나눈다는 의미: 필자주) 지난 설에 니에우 비에우 선생이 리푹 씨에게 한 말대로 영험이 있는 것인가? 봉은 아버지와 니에우 비에우 선생 사이의 대화가 생각났다.
“'끼에우전'을 쓴 응웬주 선생은 정말 재능 있는 분이야. 우리 함께 생각해 보세. 여기 이 구절 ‘이를 악물고 헤어지려 하오.’라는 구절 말일세. 이 구절은 정확히 1,954번째 행이잖아. 자네 집에 일이 생길 것이네. 어쩌면 온 나라에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올해가 갑오년이고, 양력으로 1954년이지. 올해는 이별, 이산의 해야. 틀림없다네. 이 난리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고 그리고 끝이 날 걸세. 그러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닐 걸세. 내가 점괘를 보고, 음양을 보고, 별자리를 보아도 모두 둘로 나뉘거나 분리되는 형국일세.”]
1954년은 베트남이 프랑스를 물리쳤지만,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는 해인 것이다.
■ 왜 하필 『끼에우전』인가...식민지 경험, 전쟁, 이산 등 역사적 경험과 공명
베트남에는 다른 고전이나 경전도 많다. 그런데도 『끼에우전』이 점서로 자리 잡은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작품 전체가 운명–고난–선택–보상이라는 구조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을 펼치더라도, 인간 삶의 국면과 연결될 수 있는 서사적·정서적 맥락이 존재한다.
둘째, 주인공 끼에우의 삶은 베트남 민중이 겪어온 역사적 경험과 깊이 공명한다. 식민지 경험, 전쟁, 이산, 인내, 그리고 끝내 삶을 이어가야 했던 개인들의 기억이 끼에우의 운명에 겹쳐 읽힌다. 그래서 『끼에우전』은 개인의 점괘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기억을 담은 텍스트가 된다.
셋째, 이 작품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직접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유교적 윤리, 불교적 업보 사상, 민간신앙의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 다양한 계층과 지역에서 폭넓게 수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포괄성이 『끼에우전』을 ‘국민적 점서’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 문학이 점서(占書)가 될 때... 위로이자 경고, 동시에 삶을 해석하는 언어
소설책으로 점을 친다는 사실은, 현대적 감각으로 보면 미신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이 끼에우를 단순한 점술로 치부하는 것은 이 문화의 핵심을 놓치는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언의 정확성이 아니라 해석의 과정이다.
보이 끼에우는 독자가 텍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다. 질문자는 우연히 선택된 구절을 자기 삶과 연결 지으며,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게 된다. 이는 현대 문학이 말하는 ‘열린 텍스트’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결국 베트남에서 『끼에우전』으로 점을 친다는 것은, 미래를 미리 아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를 깊이 이해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문학은 여기서 위로이자 경고이며, 동시에 삶을 해석하는 언어가 된다.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배양수 yangsoobae@gmail.com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