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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전현직 대통령 균열 심화, ‘왕조 전쟁’으로 번지나

두테르테 전 대통령, 봉봉 현 대통령 향해 “마약 중독자” 막말로 균열, 가문 싸움으로 치달아

 

1월 28일 마닐라 리잘공원 끝에 위치한 퀴리노 그랜드스탠드 광장.

낮부터 대형 스피커에서는 행사의 흥을 돋우는 음악이 연신 흘러 나오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크고 작은 필리핀 국기를 흔들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연예인과 가수들은 번갈아가며  노래와 행사 분위기를 북돋았다. 밤이 되자 스탠드에 차려진 대형 무대는 조명 불빛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입장한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은 웃는 얼굴로 마이크를 잡았다. 편협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새로운 필리핀을 만들자고 말했다. 연설 말미에는 큰소리로 ‘바공 필리피나스(신 필리핀)’를 외치며 새로운 필리핀을 알리는 비전을 선포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인권 대통령의 선포식이기도 했다.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겸 교육부장관은 봉봉 대통령이 오기 전 자리를 떠났다.

 

 

같은 날,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1400킬로미터 떨어진 다바오 시에서는 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기도 집회가 열렸다.

공교롭게도 마닐라의 리잘공원과 같은 이름을 지닌 리잘공원 옆 광장이었다. 마닐라와 마찬가지로 기도회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웠다. 수천 명의 참석자들이 손에 깃발을 흔들었고 댄서들이 축제 분위기를 이어 나갔다. 마닐라를 의식한 행사처럼 비춰졌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인파를 헤치고 입장했다. 이어서 ‘바공 필리피나스’를 뒤로 하고 1400킬로미터를 날아온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가 무대 위로 올라 왔다. 연단 뒤 대형 화면에는 ‘대담하게 발걸음을 옮기자’라는 구호와 함께 주먹을 불끈 쥔 그림이 파란 조명에 밝게 빛났다.

 

사라의 연설에 이어 남동생인 세바스티안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이 봉봉의 사임을 촉구하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이어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마이크를 넘겨 받았다. 연설 도중에 군중을 자극하는 특유의 막말을 쏟아냈다. “우리 봉봉 대통령 멋지다. 군인 여러분들 특히 말라카낭(대통령궁)에 계신 분들은 알 것이다. 대통령은 마약에 취해 있다!”

 

 

이때 사라 두테르테가 웃는 장면이 포착됐다. 실제 웃었는지, 그렇게 보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설령 웃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버지의 막말에 동의한 웃음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적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사라는 2028년 대선 출마가 확실시 된다.

 

라파엘라 데이비드 아쿠바얀당 대표는 이날 열린 두 집회를 가리켜 “지배 엘리트들의 왕조 전쟁”이라고 불렀다.

 

두테르테는 4월 11일에도 자신이 최초로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을 마약 중독자로 부른 사람이라고 자랑했다.

 

‘왕조 전쟁’은 리자 아라네타 마르코스 영부인이 18일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격화됐다. 리자는 다바오 집회에서 봉봉 대통령을 마약 중독자로 비난한 것을 참을 수 없었다며 사라의 반응에 불만을 나타냈다.

 

“사라는 선을 넘었다. 정부에서 급여를 받는 부통령이라면 우리와 함께 해야 한다. 로니 로브레도조차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로니 로브레도는 두테르테가 대통령일 때 부통령이었으며, 지난 대선에서 봉봉에게 패했다.

 

하지만, 리자는 남편이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할 거라고 했다. 대선 전 여론조사에서 사라가 1위를 했는데, 사라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고 봉봉 마르코스와 연합해서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했다. 사라의 지지율이 더해지면서 봉봉은 쉽게 대통령이 됐다. 필리핀에서는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봉봉은 사라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쉽게 보복을 할 수 없다.  

 

 

실제로 마약 중독자로 비난을 받은 봉봉은 두테르테와 사라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 왔다. 지난 주 봉봉은 두 가문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자 “복잡하다”고 토로했다.

 

두 가문의 균열은 2022년 대선 직후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사라는 국방부 장관을 원했지만 마르코스는 사라를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미국을 배척하고 중국과 가깝게 지냈다. 두테르테는 지난 해 7월 중국과 영유권 분쟁으로 다투고 있는 와중에서도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봉봉 대통령은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올해 4월 11일 워싱턴에서 바이든을 만났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의 사촌이자 2028년 대선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는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과 사라의 불화도 컸다. 사라가 사용한 기밀정보기금 내역의 투명성과 합법성에 문제가 제기되었고, 2024년 예산으로 6억 5천만 페소(155억원)를 요청했지만 하원에서 거부했다. 마틴 하원의장은 두테르테 측근인 글로리아 마카파갈-아로요 하원의원을 강등시키고 사라의 부통령직과 교육장관직을 박탈하려는 시도를 했다.

 

 

두테르테의 심기는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봉봉의 태도에서 더욱 불편해졌다. 두테르테가 대통령 재직시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수천 명이 사망한 것에 대해 봉봉대통령은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를 완전 거부하지 않고 개인적인 신분으로 입국을 허용했다. 두테르테는 다바오 시가 있는 민다나오 섬의 독립을 주장하며 맞불을 놓았고 봉봉은 절대 불가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봉봉 마르코스는 두테르테가 마약 중독자라고 비난했을 때 펜타닐 복용 때문에 헛소리하는 것 같다며 대응하긴 했지만 다소 중립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리자 마르코스와 마르코스의 사촌은 두테르테 가문을 공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두테르테와 아들은 마르코스를 공격하고 있고, 사라 두테르테는 다소 한발 떨어져 있다.

 

지난 대선에서 두 가문이 협력한 것이 적과의 동침이었는지 아직 확실치 않지만 균열은 많이 벌어진 상태다. 2028년 대선에서 두 가문의 왕조 전쟁은 불가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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