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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원의 동티모르워치9] 나무에 걸어놓은 약속 ‘타라 반두’

관습법 루릭은 ‘고등한 차원의 환경 철학’...태극의 한가운데를 채우다

 

동티모르 최고봉 라멜라우산(2,963m). 내가 처음 이 산에 오를 때 길잡이를 맡은 현지인이 산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왜 여기서 기도를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곳(Lulik)입니다. 신성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예를 갖추는 겁니다.“

 

그제야 주변이 다르게 보였다.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나무 기둥, 그 위에 묶인 야자잎과 붉은 천. 관광객 눈에는 이색적인 장식품이었을 것이 필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으로 다가왔다.

 

조상의 영이 지켜보는 영역. 신성하다는 뜻 그래서 금지의 뜻을 함께 갖는 루릭의 대표 상징이 ‘타라 반두(Tara Bandu)’다. 테툼어로 ‘타라(Tara)’는 ‘매달다’, ‘반두(Bandu)’는 ‘금지’를 뜻한다. 금지의 약속을 나무에 걸어 놓고 특정 활동을 하지 않기로 금기하는 관습법이다.

 

성스럽다는 것 ‘루릭’이란 무엇인가. 동티모르에 살면서 오랫동안 이 질문을 품고 살았다. 누군가 루릭이라 이야기를 내게 묻곤 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신성한 것이라서 금기시 되는 것 같다’는 밋밋한 답을 했다. 그러던 중 동티모르의 대표 인류학자 조시 트린다데(Josh Trindade)와 토론한 기회가 있었다.

 

“동티모르의 고유한 정신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그의 답은 의외였다. “한국의 것에 하나를 더하면 됩니다.”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그가 설명했다. “한국의 태극기를 보세요. 음과 양이 우주를 이룹니다. 동티모르도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음양의 한가운데에 루릭이 있다고 믿습니다. 음양을 통제하고 균형을 잡는 중심축.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것이 동티모르의 정신유산입니다.”

 

순간 루릭에 대한 혼돈이 사라졌다. 동티모르인에게 루릭은 ‘금기’나 ‘미신’ 그 이상의 의미였다.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형이상학적 원리였다. 그리고 타라 반두는 이 루릭을 현실 세계에 적용하는 관습이다.

 

필자가 로스팔로스 인근 마을에서 목격한 타라 반두 의식에서는 물소가 제물로 바쳐졌고, 여러 씨족의 대표들이 모여 맹세를 나누었다.

 

“앞으로 5년간 이 숲에서는 나무를 베지 않겠다.”

 

이것이 왜 법보다 강력한가. 라멜라우 산 입구에서 길잡이가 보여준 그 경건함이 답이다. 타라 반두를 어기는 것은 단순히 마을 규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성스러움을 모독하는 것이다. 음양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금기사항을 어기면 가축이 병들고, 농사가 망하고, 가족에게 불행이 닥친다고 믿는다.

 

 

위반이 발견되면 리아 나인이 마을 회의를 소집한다. 위반자는 물소나 돼지를 헌납하고, 공동체 앞에서 사과하며, 깨진 균형을 회복하는 정화 의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절차까지 갈 필요가 없다. 영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강력한 억제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02년 독립 이후 경찰과 법원이 생겼지만, 외딴 산골까지 법의 손이 닿기엔 예산도 인력도 부족했다. 루릭에 대한 경외심이 이 공백을 메웠다.

 

해외 환경학자들이 동티모르로 몰려드는 의외의 이유도 있다. 그들은 타라 반두를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라 부른다. 21세기 환경 위기의 해법을 수백 년 전 전통에서 찾는다는 역설이다.

 

영국의 해양보존 NGO 블루벤처스(Blue Ventures)는 타라 반두를 “지역사회 보존의 대담한 새 모델(a bold new model for community conservation)”이라 평가했다. 아타우루섬에서 타라 반두를 활용해 13개의 지역관리해양보호구역(LMMA)을 설립하고 산호초 생태계를 보전하는 활동를 한다.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은 타라 반두를 ‘상향식 환경 평화구축(bottom-up environmental peacebuilding)’의 모범 사례로 분석했다. 정부가 위에서 내려보내는 규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약속이라는 점이 핵심이었다.

 

서구의 환경 보호 모델은 법을 만들고, 감시하고, 처벌한다. 개발도상국에서 이 모델은 종종 실패한다. 예산이 부족하고, 감시 인력이 없고, 부패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타라 반두는 이 모든 문제를 우회한다. 법적 처벌 대신 영적 처벌, 외부 감시 대신 공동체의 자기 감시, 정부 예산 대신 전통 의례.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 타라 반두는 서구식 환경 규제를 압도한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다른 전제에서 시작한다. 서구의 환경 보호는 ‘인간이 자연을 관리한다’고 생각하지만 타라 반두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과 맺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세계관에 기반한다. 조시 트린다데의 표현대로, 음양의 한가운데에 루릭이 있어 균형을 잡는 것이다. 이것이 해외 환경학자들이 타라 반두를 ‘고등한 차원의 환경 철학’이라 부르는 이유다.

 

디지털 전환과 녹색 경제가 화두인 시대, 나무에 걸어 놓은 환경보호를 위한 약속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음과 양, 그리고 그 한가운데의 루릭.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개발과 보존,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동티모르의 숙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라멜라우 산 입구에서는 누군가 걸음을 멈추고 기도를 올릴 것이다. 신성한 땅에 들어가기 전, 루릭에 예를 갖추며. 이 작은 의례가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조시 트린다데는 관습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태극의 한가운데를 잃은 것이라며 통곡할 듯하다.

 

글쓴이=최창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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