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전문학의 대표작 ‘춘향전’이 베트남의 민담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베트남 민속학자 응웬동찌가 수집하여 출판한 『베트남 민담집』에 「춘향낭자전」이 나오면서, 이 놀라운 사실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베트남판 춘향전’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한–베 문학 교류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한국과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국 문화를 매개로 한 ‘동문(同文)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한자를 공통의 문자로 사용했고, 유교적 정치 질서와 문학 관념을 공유했다. 또한 두 나라는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라는 비슷한 경험을 겪으며 근대에 진입했다. 이러한 조건은 문학과 사상이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이른바 ‘동문 문화권’은 단순히 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전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방식, 문학이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역할, 그리고 서사가 윤리적 판단을 담아야 한다는 인식까지 공유했던 문화적 토대를 가리킨다. 이러한 공통의 인식 위에서 한 나라의 이야기와 시가 다른 나라로 옮겨 가는 일은 결코 낯선 일이 아니었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은 더 이상 낯선 나라가 아니다. 수십만 명의 결혼이주민, 노동자, 유학생이 이미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되었다. 베트남은 주요 교역국이자 전략적 협력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베트남을 안다”라는 우리의 인식은 여전히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문제는 무지 그 자체라기보다, 제한된 지식과 체험이 어느새 ‘이해’라는 이름으로 굳어질 때 발생한다. 최근 베트남의 사회-문화를 소개한다는 일부 서적과 교육 자료를 살펴보면, 단순한 사실 착오를 넘어 인식의 틀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이는 개별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국 사회에서 출판물과 교육 자료를 통해 재생산되는 베트남 인식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 제도와 헌법을 ‘부분 인용’으로 이해하는 방식 ― 국가를 가장 쉽게 단순화하는 방법 자주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는 베트남의 정치-법 제도를 일부 조항만 인용해 국가의 성격을 단정하는 서술 방식이다. 예를 들어 베트남 헌법을 한국 헌법과 비교하면서, 베트남에는 ‘국민주권’ 개념이 없고 영토 관련 조항만 강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경
요즘 금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그래서 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국 사회에서 ‘금모으기’는 흔히 1997년 외환위기 국면에서의 국민적 연대-가정의 금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아 국가 부채를 갚겠다는 집단적 결단-로 기억된다. 위기는 개인의 삶을 옥죄었지만, 그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은 공동체적이었다. 그러나 이 서사는 한국만의 독점적 경험은 아니다. 베트남은 독립의 문턱에서 이미 ‘금모으기’를 국가 건설의 실천으로 제도화했다. 1945년 가을, 독립 직후의 베트남이 선택한 길은 화폐 정책이나 외채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와 자발적 기여를 동력으로 삼는 ‘황금주간(Tuần lễ vàng)’이었다. ■ 보응웬잡 장군 칙령 '황금주간' 공포...독립 직후의 절박함과 선택 1945년 9월, 베트남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가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식량난이 심각했고, 북부에는 외국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무장과 재정은 취약했다. 이때 임시 정부는 구호와 재정의 동시 해법을 모색했다. 하노이 오페라하우스에서 기아 구제 운동을 발족하고, 남부에서 쌀을 북부로 수송하는 조치가 병행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국가 독립을 위한 기금을 제도적으로 마련한다. 19
1960년대 말, 한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을 먼 나라의 전쟁이 아닌 ‘우리의 전쟁’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였다. 해외 파병이 이루어지고 전쟁 소식이 매일 흘러 들어오던 분위기였다. 당시에 출판된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발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이공의 동물원에 가면 커다란 우리 속에 개 한 마리를 구경시키고 있다. 개가 동물원의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모든 외국 사람에게는 우습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베트남에서 개가 구경거리가 될이만큼 귀한 짐승이 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역설(逆說)의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야간에 몰래 잠행하기 마련인 게릴라의 행동에 개처럼 방해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게릴라의 비밀 행동대나 그 앞잡이들은 공격 이전에 개를 잡아 죽이기 마련이다. 또는 개를 잡아 죽이라고 마을 사람에게 통고하기도 한다. 그 통고는 바로 그 마을의 습격 예고로 받아들여진다. 어느 마을에서 개 그슬리는 냄새가 나면 그날 밤에는 총성이 잇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이같이 하여 개는 베트남에서 사양 동물(斜陽動物)이 되어 왔다. 二차 대전의 끝이 베트남 게릴라의 시작이고 보면 二 二년간의 기나
껀터(Cần Thơ)시는 메콩델타(Mekong Delta)의 심장도시다. 호찌민시에서 남쪽으로 약 170km 떨어진 곳에 있는 메콩델타 지역의 중심 도시다. 100여 년 전에는 서남부 지역의 수도라는 의미로 ‘떠이도(Tây Đô, 西都)’라 불리기도 했다. 껀터는 농산물과 과일,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후는 열대 몬순기후로 연중 고온다습하다. 연평균 기온은 약 28℃, 연간 일조시간은 2,249시간에 이른다. 농업에 매우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우기에는 홍수가 잦아 전에는 시 전체 면적의 절반 가량이 침수되기도 했다. ■ ‘껀터’라는 이름에 담긴 네 가지 이야기 껀터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응웬아잉(응웬 왕조의 태조)이 왕위에 오르기 전, 배에 타고 이 지역에 저녁 무렵 도착했을 때의 일화에서 비롯된 설이다. 강 양쪽에 배들이 즐비하게 정박해 있고, 등불 아래에서 노래와 시 낭송 소리가 들려오는 풍경에 감탄하여 이 강을 ‘껌티쟝(Cầm thi giang, 琴詩江)’이라 불렀는데, 이 ‘껌티’가 발음 변화로 ‘껀터’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둘째는 과거 강변에 자우껀(rau cần)과 자우텀(rau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다. 해마다 반복되는 띠의 순환이지만, 유독 새해를 앞두고 사람들은 자신의 띠, 가족의 띠 그리고 다가올 해의 의미를 다시 떠올린다. 띠는 흔히 ‘전통’ 혹은 ‘미신’으로 가볍게 소비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띠는 한 사회가 인간관계와 삶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리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 장치다. 특히 같은 십이지(十二支) 체계를 공유하는 한국과 베트남은, 유사한 틀 속에서 매우 다른 방식으로 띠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 십이지의 상징, 한국과 베트남서 다르게 작동하는가? 한국과 베트남은 모두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축·인·묘로 이어지는 십이지 체계를 공유한다. 다만 한국의 토끼띠는 베트남에서는 고양이 띠로, 소띠는 물소 띠로 대응하는 등 일부 차이가 존재한다. 그 외의 동물들은 기본적인 대응 관계를 공유하지만, 각 동물에 부여되는 상징과 민속적 해석에서는 문화적 변주가 나타난다. 십이지 체계는 단순한 동물 분류가 아니라, 음력을 기반으로 한 시간 인식 체계이자 자연 질서를 인간 삶에 대응시키는 세계관이다. 해와 달, 계절의 순환, 인간의 생애를 하나의 구조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십이지는 ‘시간
호찌민시 1구 응웬주 거리. 오늘도 이곳, 대한민국 총영사관에는 비자와 민원, 기업 상담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이 건물이 베트남과 한국을 잇는 공식 외교 공간이라는 사실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 건물의 과거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한때 베트남 마지막 황후, 남프엉 황후의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 한–베 관계는 한 채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신문 사료를 통한 신시대 국모, 남프엉 황후』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레티빙 여사는 응웬흐우하오(남프엉 황후의 아버지)와 혼인한 이후, 부부는 주로 사이공 응웬주 거리의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이 저택은 훗날 대한민국 외교 공관(현 주호찌민시 대한민국 총영사관) 건물로 사용된 곳이다.” (Lương Hoài Trọng Tính, 2023, p.17) 남프엉 황후가 되기 전, 그녀의 이름은 잔(Jean) 마리엣 응웬티란이었다. 그녀는 황궁이 아니라, 사이공의 한 저택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집이 바로 오늘날 한국 외교관들이 근무하고 있는 응웬주 거리의 건물이다. 이 집은 황실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당시 사이공 상류 사회의 중심부에 자리
1988년 10월 19일 저녁, 우리 일행은 사이공 시내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거리인 동커이 거리로 향했다. 전쟁의 흔적과 식민지 시대의 건축 그리고 막 열리기 시작한 개방의 기운이 뒤섞여 있던 그 거리 끝에 ‘맥심(Maxim)’이라 불리던 레스토랑이 있었다. 지금의 호찌민시 1군을 떠올리면 화려한 도시 이미지가 먼저 연상되지만, 당시만 해도 동커이는 아직 과거와 현재가 조심스럽게 겹치는 공간이었다. 그날 우리는 송용등(호주 교포, 로바나 대표) 씨를 따라 맥심으로 들어섰다.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앞장섰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입장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무대 위에서 연주를 이끌던 밴드 마스터가 송용등 씨를 알아보더니, 지휘를 멈추고는 객석을 향해 몸을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한 것이다. 그것은 의례적인 서비스 차원의 인사가 아니었다. 분명히 ‘아는 사람’을 향한, 그리고 존중이 담긴 반응이었다. 이윽고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첫 곡은 ‘아리랑’이었다. 이국의 밤, 베트남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의 선율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가요들이 연주되었다. 조용필의 노래가 흘러나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