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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의 눈] “신도는 제천의 고속” 발칵, 교수직도 박탈

김정기 교수가 쓴 일본이야기 6 한반도-일본열도 중간다리 쓰시마의 진실

 

쓰시마의 복점이 ‘제천(祭天)의 고속(古俗)’을 사상적으로 동반한다고 이전 이야기가 짚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먼저 제천의 고속이 일본 신도에 사상적으로 일본 신도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신도가 천황제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천황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메이지 시대 쿠메 쿠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란 역사학자가 “신도는 제천의 고속”이라는 글을 써 신도 계를 발칵 뒤집혀 놓았다. 이것이 도쿄제국대학 역사학 교수인 쿠메의 유명한 필화사건이다. 그는 ‘신도’를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교수직을 쫓겨나는데, 여기서 ‘신도’란 교파신도나 민간신도가 아니라 국가신도인 것이다.

 

국가신도란 뒤에 다시 조명할 기회가 있을 터이지만 간단히 말해 신도국가화 정책에 의해 신사신도 등 종교를 재편성하고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아라비토카미])으로 하는 천황제 지배의 사상적 지주이었다. 이런 종교정책 아래 “신도는 제천의 고속”이라는 ‘이단’이 용납될 리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 어쩌랴. 신도가 제천의 고속에 유래한다는 것은 진리 중의 진리인 것을. 이 진리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중간다리 격인 쓰시마가 발원하고 있다. 그러니 쿠메 발언은 논리적으로는 뒤집힐 수도, 뒤집혀서도 안 되는 것이다.

 

쿠메는 이와쿠라 유럽사절단[岩倉遣欧使節団]을 수행해 그 일기체 기록[日錄]인 <특명전권대사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米毆回覽実記)를 저술해 유명해진, 한학에 밝은 역사학자이다. 그는 제국대학 역사학 교수로서 정부로부터 의뢰한 국가의 정식 편년사를 편찬하는 임시편년사 담당 편찬위원이기도 하다.

 

그는 ‘고증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 실증사학자’로 간주되고 있었다(島薗進, 2010, 45). 게다가 그는 일선동조론을 적극적으로 펴 식민통치에 기여한 관학자이다. 그런데도 1892년 3월 4일 문부성은 필경 쿠메에 비직(非職: 사실상 파면) 처분을 내려 그는 도쿄대학에 쫓겨나고 말았다.

 

천황제의 함의

 

쓰시마 남단 쓰쓰에는 다카미무스비(高御魂) 신사가 들어서 있다. 제신은 타카미무스히노카미(高皇産巢日神)으로 되어 있다.

 

타카미무스히노카미란 어떤 신인가? 이 신은 <고사기>에 의하면 천지개벽 때 천황가의 하늘나라 고향인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天御中主神)와 카무무스비노카미(神皇産霊神) 함께 창조[造化] 삼신 중 한 신이며, 천손강림을 명한 천황가의 조상신이다. 이 신의 별명이 타카기노카미(高木神)인데, 다카기[높은 나무]가 함유하는 바와 같이 높은 나무에 내리는 무격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신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가 쓰시마에 들어서 있는가라는 의문이 인다. 시바료타로는 이 신이 쓰시마에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 의문을 풀고 있다(2008, 211~212). <일본서기> 현종(顕宗[켄슈-]) 3년 여름 4월 조에 태양신[日神(히노카미)이 어떤 자[우라베일 것이다]에 지펴 “우리 조상[我が祖] 타카미무스비노타마(高皇産霊)에 이와레(磐余: 야마토 토이치군(大和十日郡)의 밭을 바쳐라”고 하는 탁선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이에 따라 쓰시마의 하현(시모아가타)의 아타이(直: 고대 왜왕조의 지체 높은 문벌 성의 하나-글쓴이)가 이 신을 야마토에 분사했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고사기>에서 말하는 천황가의 조상신은 본래 쓰시마에 있었다고.

 

여기서 보다 중요한 의문이 인다. 천황가의 조상신이 어떤 연고로 한반도와 마주하는 쓰시마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시바가 말해 준 것은 해답인 듯 아닌 듯 매우 아리송한 암유(暗喩)처럼 들린다.

 

이것은 귀복 제사를 주재한다는 북방 아시아의 처지에서, 천황가가 쓰시마의 복점사[卜部(우라베)]들이 쓰시마 산에서 제사 지냈던 ‘천(天)’을 상징하는 신들을 조상신으로 가로챈 것인가, 아니면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 씨가 말하듯이 고대 천황가가 기마민족의 수장으로서 북방에서 그 제천의 습속을 받아들여 오면서 쓰시마를 거쳐 남하하고 본토로 들어왔다는 것을 점검하고 위와 같이 되었는가, 어느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다만 고대의 천은 높은 하늘도 깊은 바다도 나라의 영역으로 삼는 20세기보다도 훨씬 넓었음에 틀림없다. 쓰시마의 천이 훨씬 넓은 북아시아의 창공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모양새이다(위 책, 212).

 

시바는 천황가가 쓰시마의 토속신을 가로 채 조상신[다카미무스히노카미]으로 만들었든, 에가미 나미오 교수가 주장하듯 북방기마민족의 수장이 직접 남하해 일본을 정벌했든, “쓰시마의 천이 넓은 북아시아 창공에 연결되어 있다” 일갈한다. 이는 천황가의 고향이 북아시아, 특히 조선에 다름 아니라고 그의 어법으로 말한 것이다. 에가미 나오미는 도쿄대 교수로 일본군국 주의 패망한 전후 기마민족 정복설을 주장해 역사학계에 파문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천황가의 고향이 한반도”라는 말이 단순한 ‘설’을 넘어 ‘명제’로 뒷받침한 것이 쓰시마 섬이다. 그 유력한 증거가 하현 코후나코시(小船越) 부근에 들어선 아마테루신사(阿麻氐留神社)이다. 제신은 아메노테루미타마(天照魂) 또는 아메노히노카미(天日神)라 한다.

 

물론 이 경우 ‘아마테루(阿麻氐留)’는 아테지(当て字: 한자 본래 듯과 관계없이 그 음이나 훈을 빌려 쓰는 말–글쓴이)이기에 아마테루(天照)를 표기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모셔진 아마테루오미카미(天照大神, 이하 ‘천조대신’)과 매우 유사하게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시바는 여기서 또한 “천황가의 조상신으로서 이세신궁에 모셔진 천조대신과 같은 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쓰시마 고래(古來)의 속신인 오히데리사마[태양신]인가” 짐짓 의문을 제기하고는, “그러나 <고사기>의 타카마라하라(高天原)의 창조 삼신 중 한 위가 쓰시마 남단 쓰쓰에 있다”고 일깨운다(위 책, 211). 다시 말하면 쓰시마의 아마테루 신사의 제신은 천조대신에 다름 아니라고 짚은 것이다.

 

시바는 이런 어법[짐짓 의문을 제기하고는 자신이 의도한 말을 하는 어조]으로 천황가에 대해서 말을 이어 간다. 그는 “고대 쓰시마에 천(天)의 사상과 골복이 상륙하자 천은 텐이라고도 텐그리라고도 부르지 않고 아마·아메라고 하는 재래의 말로 되고 만다” (위 책, 210, 강조–글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시에 당시 쓰시마의 복점사[우라베(卜部)]들은 골복에 부속하여 전해진 천상신[아마츠노카미(天つ神)]의 사상과 신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천상신은 일본국토에 토착한 지상신[쿠니츠노카미(国つ神)]과는 달리 관념성이 강한 존재라 할 수 있다. ‘타카마가하라(高天原)’를 고향[祖地]로 하는 이 일군의 특이한 신들은 <고사기> <일본서기>에 의해 천손민족의 직계라는 천황가의 조상신 군으로서 독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안에서 쓰시마 만은 이례적으로 천상신들이 토착신으로서 섬 안에 얼마든지 여기저기 제사를 받고 있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천상신을 고신도(古神道)에 받아들인 것은 쓰시마가 먼저인가, 천황가가 먼저인가 잘 모르겠다(위 책, 210~211).

 

그러나 시바는 이어 “이것에 대한 의문은 몇 해 전 이 섬에 온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씨가 느끼고 그의 저서 <일본신화>에서 선구적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일깨운다. “그 때 쓰시마 사가 나가토메 히사에 씨가 우에다 씨와 함께 섬 안을 걸으면서 그 의문을 함께 나누었다”고.

 

시바는 나가토메 씨를 치켜세운다. 그가 서해안 키사카(木阪)의 와다쓰미 신사(海神神社)의 사가(社家, 세습 신관가) 출신이라면서 “섬 안에 신도유적지에 밝고 게다가 우익 사상화한 메이지 후의 국가신도의 해독에서 면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라고. 이는 쓰시마 섬이 천황가보다 먼저 천상신을 고신도에 받아들인 것을 그가 에두른 어법으로 뒷받침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바는 천황가에 대해서 이런 에두른 어법으로 짐짓 의문을 제기하지만 곧 자신이 하고픈 말을 놓치지 않고 있다. 물론 시바는 소설가이기에 이런 에두른 어법 표현을 개인적 취향으로 즐긴다고 굳이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일까.

 

일본 천황은 패전 뒤 마련된 ‘맥아더 헌법’아래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되어 있다. 현재 군국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쇼와(昭和) 시대(1926~1989)는 지나갔고 그의 아들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헤이세이(平成) 시대(1989~2019)도 올해로 저물었다. 다시 그의 아들 나루히토(德仁) 천황이 올해 즉위해 레이와(令和) 시대가 왔다고 일본열도가 떠들썩하다.

 

천황, 우익정치 상징

 

그러나 일본 헌법아래 천황은 실권 없는 국민통합의 상징이라 했지만 일본의 현실 정치에서 천황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물론 그의 아비와는 달리 특히 아키히토 천황의 경우 자신이 백제 무녕 왕의 후손이라든가 또는 전쟁의 참화를 일깨우고 평화를 호소하는 그의 인성은 돋보인다. 그러나 천황 개인의 인성적 품위와는 상관없이 그는 여전히 일본 우익 정치의 축으로 군림하는 측면을 놓칠 수 없다.

 

 

예컨대 1979년에 성립된 원호법(元戶法)은 신사본청(神社本庁)과 같은 극우단체의 정치활동으로 제정된 것이다. 이 신사본청의 실상에 대해 미국 하버드 대학의 케네스 루프(Kenneth J. Rouff)는 상징 천황제란 전후 천황의 정치적 기능을 중심적으로 설계한 군주제인데, 그것이 정착하는 가운데 “종교적 동기를 배경으로 항상 천황의 정치적 기능을 주장한 것이 신사본청이었다”고 짚었다. “신사본청은 국민 다수가 합의하고 있는 상징 천황제보다도 천황의 정치적 기능을 강화하려는 정치운동의 대표 격”이라면서 원호법안의 성립을 위해 지방의회를 부추기는 운동에 대해서 “77년서 79년에 걸쳐 신사본청 본부는 마치 작전지휘실(a war room) 같았다(Rouff, 2001, 194)”고.

 

여기서 말하는 원호법이란 메이지, 다이쇼, 쇼와 등 천황의 치세를 헤아리는 햇수에 군주의 연호를 넣는 방식[쇼와○○년]을 법제화한 것이다. 그 본질은 군주의 연호가 개인 삶의 햇수를 대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올해 2019년 태어난 일본 어린이는 평생 ‘레이와 1년 생’을 동반해야 한다. 출생신고에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으니. 또 다른 예로 어떤 일본인 저자가 올해 책을 출간한다면 출판사는 ‘레이와 1년’ 간으로 적어야 한다.

 

과연 일본 국민은 천황의 신민으로만 그들 삶의 틀이 결정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기뻐하는 것일까, 무의식적인 천황의 관성력에 끌려간 것일까. 그나마 시바와 같이 에둘러나마 천황가에 대해 자기 말을 하는 ‘국민작가’가 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참고문헌

 

司馬遼太郞, <街道をうゆく> 13편, 「壱岐·対馬の道」, 朝日新聞出版, 2008

 

島薗進. <國家神道と日本人> [岩波新書 1259], 岩波書店, 2010

 

Kenneth J. Rouff. <The People’s Emperor: Democracy and the Japanese Monarchy, 1945~1995>, Mass. Cambridge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1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다.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일본천황, 그는 누구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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