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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재의 緬甸 통신④ 폐쇄적 미얀마의 '깐깐한 비자' 왜?

1962년 군부쿠데타 이후 비자에 엄격한 서류와 심사 ...영국 식민지 경험도 작용

1. 30일 무비자...미얀마 가기 쉬워진 시대

 

2018년부터 미얀마는 한국인과 일부 선진국 국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여행하기 쉬운 국가가 됐다. 30일 체류에 대해서 (특섬지점 종료가 예고된) 한시적이지만 무비자 정책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얀마 땅에 밟기 위해서는 서울 한남동 미얀마 대사관을 방문해 여행비자를 받아야 했다. 2014년부터는 온라인 e-Visa 서비스를 통해 대사관에 방문하지 않고도 비자를 얻을 수 있었지만 50달러(약 5만 9635 원) 정도의 비자수수료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항공권을 사서 가기만 하면 된다. 덕분에 최근 2년간 미얀마의 불교 유적지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관광산업 육성을 통해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켜 보려는 아웅산 수치 정부의 개방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미얀마는 1962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반세기가 넘는기간 동안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군부가 정권을 독식한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해왔다. 그 사이에 각종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 문제와 마약 관련 국제문제 때문에 서구국가들의 경제 제재를 받아야 했다. 미얀마는 북한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미얀마의 현대사는 한국의 현대사와 비슷한 맥락이 있다. 영국의 식민지(1895~1948)를 거쳐 의회민주주의 시대(1948~1962)를 거쳤고, 이후는 군부독재와 다시 민주화 시기를 횡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인이라면 미얀마의 현대사에 대해 감을 잡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독립 이후의 정치도 한국의 정치사와 비교해보면 얼추 비슷한 대목이 많다. 

 

2. 미얀마의 폐쇄성은 어떻게 비롯됐을까?

 

특히 1950년대 당시 미얀마 경제의 개방성은 지금 관점으로도 꽤나 놀랄만한 수준이었다. 우선, 아시아 최대의 쌀수출국 지위를 줄곧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쌀을 지원했을 정도이기도 했다.

 

당연히 아시아에서 경제력 순위도 꽤 높아서 1960년대 싱가포르의 독립을 이끌었던 리콴유(李光耀) 수상이 "10년 안에 버마(미얀마의 이전 명칭)만큼 잘 살게 해주겠다"라는 정치적 공약을 내세울 정도로 아시아 사회에서 높은 지명도를 얻고 있었다.

 

이에 따른 국제사회의 위상도 높았다. 아시아 최초의 UN 사무총장(1961~1971)이 바로 당시 버마 출신의 우 탄트(1909–1974)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당시 이 나라의 엘리트들은 영국식민지 아래서 공부했기 때문에 영어가 유창했고, 게다가 서구열강과 일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에 '세계평화'라는 명분을 지닌 UN의 리더로 활동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버마의 고유성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군부가 1962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차근차근 대부분의 생산시설을 국유화하고 국제감각이 뛰어난 엘리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자본과 기업인은 물론이고 해외 각국의 특파원 역시 순차적으로 쫓겨났고 그렇게 197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얀마는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고립주의 정책을 펼치며 소수민족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미얀마 국가만들기"에 힘쓴 것이다. 자연스레 엄격한 비자정책을 실시했고, 그 사이에 미얀마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미얀마의 국익이 해가되지 않는 엄격한 사전심사를 통해 선별적인 방문만이 허가됐던 것이다.

 

 

3. 미얀마 “우리는 이중의 식민지를 거쳤다”

 

일부 학자들은 이같은 폐쇄성이 지독했던 영국의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19세기 초반부터 미얀마에 진출했던 영국제국은 3단계에 걸쳐 차근차근 이곳을 식민지화했다. 전성기에도 불과 1만여 명의 영국인이 관료나 사업가로 거주했을 뿐이었다.

 

당시 조선과 미얀마의 인구는 엇비슷했는데 식민지 조선에 50만 명 넘는 일본인이 거주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해외영토가 많은 영국인에게 미얀마는 그리 중요한 식민지는 아니었던 탓이다.

 

이같은 영국인을 대신해 식민지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던게 실상은 먼저 영국의 식민지가 됐던 인도인이었고, 당시 인도인들은 물밀듯이 이곳으로 몰려와 쌀농장을 경영하고 고리대금업으로 경제권을 싹쓸이했던 것이다.

 

이런 경험탓에 미얀마는 "우리는 영국과 인도에 이중의 식민지 고통을 겪었다"고 지금까지도 분통을 터뜨릴 정도다. 외국인의 침탈에 따른 경제권 박탈에 대한 한이 컸던 탓인지 군부독재 시절에 외국인을 죄다 몰아내자는 지독한 폐쇄정책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크게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4. 깐깐한 비자심사...계획적인 거주 계획이 필요

 

아무리 일부 선진국에 대한 무비자 정책을 도입했다고는 하나 미얀마는 지금도 외국인에 대한 깐깐한 비자정책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미얀마 비자는 크게 1)관광비자 2)비즈니스비자 3)소셜비자 4)명상비자 5)외교비자 등으로 나뉘는데, 30일 한정 관광비자를 제외하고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서류와 심사를 거쳐야 한다. 게다가 체류일 수도 짧고 비용도 만만치가 않다. 예를 들어 1년 비즈니스 비자의 신청비용이 대략 80만~90만원 까지 나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1년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70일 싱글비자, 3개월, 6개월을 거쳐서 1년 멀티비자(복수 입국허용)를 순차적으로 얻어야만 한다. 그 사이에 민감한 사건이나 논란이 없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조건이 된다. 또 이같은 비자를 발급하는 곳도 해외 대사관을 통해서만 엄격하게 제한이 된다.

 

이같은 번거로움 때문에 지금도 많은 교민들이 장기비자를 모색하기보다는 단기비자를 1~2달마다 한 번씩 국경 너머 잠시 비자트립을 다녀오는 것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기적인 사업추진과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비자 취득에 대한 명확한 플랜을 세우고 처음부터 '장기비자' 취득을 목표로 삼는게 낫다.

 

특히 해외전산망이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탓에 장기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서울소재 대사관이나 방콕의 대사관을 따로 이용하지 말고, 1곳의 미얀마 대사관을 집중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조건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호재는?
기자 출신으로 현재 싱가포르와 미얀마에서 아시아학을 공부하며 현지 시장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태국의 탁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캄보디아의 삼랑시 등 동남아 대표 정치인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관련 책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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