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이야기에서 히모로기(神籬)라는 무당의 당집이 쓰시마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탄탄한 종교적 유대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 못지않은 종교적 유대가 쓰시마의 복점(卜占)이다. “쓰시마에 웬 복점?” 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쓰시마의 복점은 전통이 깊다. 게다가 이 복점이 한반도에 유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점과 히모로기는 둘 다 일본 고신도(古神道)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게다가 한반도가 고향이라는 점에서 마치 샴쌍둥이와도 같다. 쓰시마의 복점이 한반도, 특히 신라에 유래한다고 이야기를 전개한 사람은 일본의 ‘국민작가’로 칭송되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다. 그는 비교적 한국을 이해하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단편 소설 <고향을 어이 잊으리오>(故郷忘じがたく候)를 읽어보면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남원에서 왜군에 잡혀 간 도공 심수관이 일본 땅에서 겪은 역경을 잘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쓴 또 다른 소설 <화신>(花神)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인공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는 일본 육군을 창설한 인물로 야스쿠니 신사 앞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소설에서 오오무라는 앞으로 독도가 한일 간에 문제가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서먹서먹한 관계를 풀거나, 심지어 원수지간도 화해한다고 믿는다. 비록 적대적인 관계일지라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에게 경의를 표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가족을 위로해야 한다는 관용을 갖고 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부인 아니 유도요노(66, 본명 끄리스띠아니 헤라와띠) 여사가 지난 6월 1일 싱가포르 국립대병원에서 4개월동안 혈액암으로 투병 중 타계했다. 싱가포르 국립대병원에서 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대사관, 자카르타 할림공항, 찌께아스 자택 등 아니 여사의 시신이 운구되는 지점에는 주요 인사들이 직접 조문을 나와 고인을 배웅했다. ■ 초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 딸 ‘정적’ 간 화합 선물 초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 딸로서 한국과 인연이 깊은 ‘지한파’ 영부인이었던 아니 여사는 세상을 떠나면서 정적 간 화합을 선물로 남겼다. 지난 2일 예상을 뒤엎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카르타 깔리바따 영웅묘지에서 열린 고 아니 여사의 안장식에는 투쟁민주당 총재이며 전 대통령인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 여사가 참석했다. 정치 지형을 바꾸는 매우 놀라운 사건이다. 안장식에는 조꼬 위도
지난달 5일 ‘라마단(Ramadan)’으로 출발해 이달 9일 ‘르바란(Lebaran)’ 연휴로 막을 내린 한 달 여 시간이 흘렀습니다. 전세계 이슬람권에 연중 가장 중요한 기간으로 인식되는 라마단과 르바란이 마무리되면서 2억 2000만여 명 인도네시아 무슬림(이슬람 신자)들도 속속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는 약 2000만명 무슬림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말레이시아, 이슬람교가 국교인 브루나이 등 이웃한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상당 부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아랍어로 ‘무더운 달’을 의미하는 라마단은 금식의 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슬람 달력상의 아홉 번째 달에 해당하는 라마단은 해가 떠있는 동안 음식을 피하고 기도를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기입니다. 무슬림의 5대 계율 중 하나인 라마단이 선포되면 무슬림들은 ‘푸아사(Puasa, 금식)’에 돌입합니다. 이에 따라 무슬림들이 일출부터 일몰까지 원칙적으로 음식과 물을 입에 대지 않는 모습이 일상적으로 관찰됩니다. 여기에 해가 진 후에는 평소보다 푸짐한 할랄(Halal) 먹거리를 앞에 두고 삼삼오오 ‘부카 푸아사(Buka Puasa, 금식을 깸)’를 즐기는 광경이 여기저기
이전 이야기들에서 알 수 있듯이 쓰시마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쓰시마 남단 쓰쓰 마을의 적미가 그렇고 소토산의 성황당 돌단이 또한 그렇다. 이번 이야기가 다루는 ‘히모로기(神籬)’는 더욱 생생하게 숨쉰다. 히모로기란 무엇인가. 일본의 권위 있는 코지엔(広辞苑) 사전에 의하면 “옛날 신령이 묵고 있다고 생각되는 산-숲-노목등 둘레에 상록수[常磐木]를 심어 울타리를 두룬 신성한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일본인이 정의한 ‘히모로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추적하기 위해 일본의 에도(江戶)시대[1603~1867] 후기 걸출한 고증학자 토-테이칸(藤貞幹, 1732~1792)이 남긴 저서에 주목해 보자. 그가 지은 <쇼코오하츠>(衝口發)란 책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내용을 터뜨리고 있다. “개벽 후에 위로는 ‘스사노오 신(素戔鳴尊), 아래로는 오오나무치 신(大己貴命: 이즈모(出雲) 대사의 주신인 대국주신의 다른 이름-지은이)로부터일이 시작되었으니 사물과 언어가 모두 한속(韓俗)이라”라고. 다시 말하면 언어와 종교[불교와 무교]를 포함한 모든 “문물이 한속(韓俗)의 여풍(餘風)이었던 고로”라고
쓰시마 섬이 일본인의 주식인 쌀을 한반도에서 전한 고장이라는 것은 이 전 이야기에서 알았다. 이번 이야기는 쓰시마가 일본인의 주식인 쌀을 넘어 그들이 정신적인 양식으로 삼는 종교적 신앙, 즉 신도(天道)를 낳은 고장이라는 것을 핵심 줄거리로 한다. 게다가 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도의 고향 역시 한반도라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신도가 일본에 고유한 종교라고, ‘국민적 상식’이 통한다. 이는 신도를 가업으로 하는 신도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도 그런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든 것 역시 쓰시마 섬이다. 이것은 ‘종교반란’이라고 할만하다. 이번에는 쓰시마 남단 쓰쓰 마을의 소토산(卒土山)을 산책하기로 하는데, 그것은 소토가 그 종교반란의 호루라기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쓰시마에는 덴도(天道)신앙이라는 토속 신앙이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이 하현 쓰쓰(豆酘)와 상현 사고(佐護)에 남아 있는 적석탑(積石塔)의 모습이다. 두 곳 모두 텐도산(天道山)이라고 부르는 영험한 산이 있다. 특히 쓰쓰의 텐도산 기슭의 성지를 소토산(卒土山)이라 한다. 소토산의 ‘소토’는 한반도의 옛 마한 사람들이 성스러운 금족지로 여긴 소
지난 4월 17일 인도네시아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보이는 국회와 지방의회 의원 후보들이 다수 출마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유세기간 당시 자카르타와 수도권 도로변에 세워진 입간판에 중국계로 보이는 후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여성 권익과 다원주의를 표방한 신생 정당 인도네시아연합당(Partai Solidaritas Indonesia)의 공동설립자 그레이스 나탈리 당대표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유명한 텔레비전 아나운서 출신이다. ■ 인도네시아 인구 2억 6000만 명 가운데 대략 3% ‘780만 명’ 추산 인도네시아 화인(華人 또는 화교(華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로 십중팔구 ‘재리에 밝은 화상’을 꼽을 수 있다. 화인이 화교와 다른 점은 중국 국적이 아닌 중국계라는 점이다. 화교는 중국 국적을 가진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는 중국인이다. 화인들이 인도네시아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인도네시아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화인의 인구수를 파악하기도 힘들고 공식적인 통계도 없지만, 통상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 2억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과 더불어 동남아시아 해양부를 구성하는 인도네시아는 산림, 광물, 천연가스 등 자연 자원이 풍부한 나라로 이름이 높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브라질, 베트남, 콜롬비아에 이은 세계 4위 커피 생산대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 동안 한국에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산 커피가 주로 소개돼 온 까닭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인도네시아어로 ‘kopi(꼬삐)’로 불리는 커피는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천연자원으로 손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실제 자바와 만델링, 토라자, 가요 마운틴 등 인도네시아 커피는 오랜 동안 지구촌 커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인도네시아 커피의 유래는 네덜란드에서 처음 커피 나무가 이식된 17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예멘의 모카항을 거쳐 베니스 상인들을 중심으로 유통되던 커피의 맛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제적 가치에 주목한 유럽 국가들은 발아 능력을 갖춘 볶지 않은 상태의 커피 나무를 확보하는데 혈안이 됐습니다. 16세기 초 이래 예멘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마침내 네덜란드 상인들이 몇 그루의 커피 묘목을 빼돌렸습니다. 이후 네덜란드는 상업
쓰시마를 통해 일본열도로 전해진 한반도 문물 중 중요한 것이 논농사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쌀은 국민의 주식이다. 우리는 이전 이야기에서 일본인이 자랑하는 자포니카 품종의 원종이 실은 낙동강 하구에서 일군 고대 한국 쌀이라고 일깨웠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은 한반도에 대한 콤플렉스에서일까 한반도 논농사의 일본 전래를 한사코 부정한다. 그것은 ‘대륙’ 문화의 일본 전래를 인정하면서도 ‘한반도’는 아예 제쳐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를 거쳐”로 표현하는데서 드러난다. 논농사의 경우 남방전래설도 주장하는가 하면 북방전래설을 인정하면서도 중국 양쯔강의 직래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남방전래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의 이름난 민속학자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 1875~1962)를 들 수 있다. 그는 <해상의 길>(海上の道, 1960)이라는 저술에서 일본쌀이 남방에서 왔다면서, 논농사가 남중국에서 출발해 대만, 오키나와 남부의 야에산 군도(八重山群島)의 이리오모테 섬[西表島], 이어 오키나와(沖縄)를 거치고, 다시 남부제도를 거쳐, 사쓰마(薩摩) 곧, 규슈남부 쪽으로 상륙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논농사가 남중국해를 거쳐 일본에 들어 왔다는 남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