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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원의 동티모르 워치 2] 포르투갈 이전의 주인, 리우라이 ‘땅을 초월한 자’

1912년 카블락 산의 비극을 넘어 아세안의 미래로....

 

2025년 10월 26일, 제47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동티모르가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공식 승인됐다. 가입 신청 후 무려 14년만의 승인이었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과 호주 북부 다윈 사이에 위치한, 강원도 크기의의 동티모르(수도 딜리Dili)는 인구 142만명에 1인당 GDP가 약 1,500달러에 불과한 동남아시아 최빈국이다.

 

동티모르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싸여있는 나라 중 하나다. 과연 어떤 나라이고, 어떻게 아세안에 가입할 수 있었을까? 왜 이렇게 가입에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아세안익스프레스는 2008년부터 14년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를 역임한 최창원 교수를 특별 칼럼니스트로 초빙한다. 그는 앞으로 동티모르의 역사와,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등 비하인드 스토리를 쉽게 술술 풀어낼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주]

 

 

1225년, 송나라 천주항(泉州港) 해상무역 감독관 조여괄(趙汝适, Zhao Rukuo)은 아랍과 동남아 상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제번지(諸蕃志, Zhu Fan Zhi)』에 기록했다. 그가 직접 가보지 못한 먼 섬 ‘디우(底勿)’에서는 백단향이 난다고 했다. 2세기 뒤인 1436년, 정화 함대의 군인 비신(費信, Fei Xin)은 『성사승람(星槎勝覽, Xingcha Shenglan)』에서 이 섬에 열두 개의 항구가 있으며 각 항구마다 추장이 다스린다고 적었다.

 

1522년 마젤란 함대(Ferdinand Magellan)의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는 티모르 남부 해안에서 ‘네 명의 형제가 이 섬의 왕’이라는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네 왕국명은 오에비(Oebich, Wehali로 추정), 릭사나(Lichsana), 수아이(Suai), 카바나자(Cabanaza, 현재의 Kamanasa)다. 또한 그는 필리핀의 큰 섬인 루손(Luzon) 상인들이 배에 백단향을 싣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현지인들은 이 추장들을 ‘리우라이(Liurai)’라 불렀다. 테툼어(Tetum)로 ‘리우(liu)’는 ‘초월하다’, ‘라이(rai)’는 ‘땅’을 뜻한다. 땅을 초월하는 자, 즉 왕이다. 티모르 섬에는 수십 개의 소왕국이 있었고, 각 소왕국의 리우라이는 백단향 교역권을 쥐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왕국은 웨할리(Wehali)였다. 웨할리의 최고 지도자는 ‘마로막 오안(Maromak Oan)’, 즉 ‘신의 아들’이라 불렸다. 이 칭호는 의례적 권위에 가까웠고, 실제 통치는 리우라이들이 담당했다. 백단향은 이들 권력의 원천이었다.

 

 

■ 저항의 기억, 식민정책에 봉기 3,000명 사망...‘왕들의 시대’ 막내려

 

1515년 포르투갈이 도착한 뒤에도 리우라이 체제는 4세기 가까이 유지되었다. 포르투갈은 직접 통치 대신 리우라이를 통한 간접 지배를 택했다.

 

그러나 1910년 포르투갈 본국에서 공화정이 수립되자 식민 정책이 강경해졌다. 인두세와 강제노역이 부과되었고, 이에 맞서 마누파히(Manufahi) 왕국의 리우라이 돔 보벤투라(Dom Boaventura)가 1911년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알라스(Alas), 카일라코(Cailaco), 라이메안(Raimean) 등 인근 왕국들과 연합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모든 왕국이 함께하지는 않았다. 수루(Suru) 왕국의 리우라이 나이카우(Naicau)는 포르투갈 편에 섰고, 보벤투라가 아이나로 주둔지를 공격할 때 포르투갈군에 이를 알렸다.

 

1912년 8월, 건기의 카블락(Cablak) 산.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능선에 약 12,000명이 포위되어 있었다. 물은 떨어졌고, 아래에서는 포르투갈군의 포성이 울렸다. 며칠간의 교전 끝에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보벤투라는 항복 후 아타우로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리우라이는 더 이상 전통적 계승이 아닌 식민 당국의 임명으로 선출되었다. 왕들의 시대는 끝났다.

 

 

■ 남은 것들...저항박물관에 걸린 돔 보벤투라-게릴라의 사진

 

2014년 7월, 나는 동티모르의 최고봉 라멜라우산(2,963m) 인근 마을에서 우마 루릭(Uma Lulik)을 처음 방문했다. 지붕에는 물소 뿔이 장식되어 있었고, 내부로 들어가도 되냐고 묻자 마을 장로가 되물었다.

 

“허락을 받았습니까?” 우마 루릭은 씨족의 신성한 집이다. 조상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며, ‘우마 나인(Uma Nain)’이라 불리는 씨족 장로가 대대로 관리하며 강력한 씨족 체제를 유지한다.

 

동티모르국립대 한국학센터가 있는 경제학부 건물 앞, 그 좌측에 자리한 저항박물관(Arquivo & Museu da Resistência Timorense)에는 돔 보벤투라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인도네시아 점령기 저항 지도자들 사진 옆에 나란히. 1912년의 리우라이와 1975년 이후의 게릴라들이 같은 벽에 걸려 있다는 것.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백 년의 시간 사이에 저항의 언어는 달라졌지만, 질문은 같았다.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 리우라이의 후손들은 이제 산속 요새가 아닌 아세안이라는 식탁에 앉아 다시금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글쓴이=최창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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