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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원의 동티모르워치8] 테툼어사전, 말을 모아 나라를 세우다

테툼어 이중언어 사전 135년...사전 편찬 역사는 동티모르 정체성 역사
필자가 고려대에 테툼어 사전편찬 제안...네이버 후원 수교 20주년 결실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의 교정은 흡사 바벨탑과 같았다. 나이 든 교수들은 포르투갈어로, 젊은 교수들은 테툼어로 강의했다. 학생들끼리는 저마다 출신 고향의 언어로 수다를 떨었다. 쉬는 시간에 그들 옆에 서서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다. 머리가 멍했다.

 

테툼어에서 단어는 ‘리아푸안(liafuan)’이다. 목소리(lia)에서 맺힌 열매(fuan)라는 뜻이다. 동티모르인들은 말이란 목소리가 익어 맺힌 열매, 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자양분으로 이해했다. 그 열매들을 모아 체계화한 것이 사전이다. 1889년부터 오늘까지, 135년에 걸친 테툼어 사전 편찬의 역사는 곧 동티모르 정체성의 역사다.

 

 

최초의 테툼어 이중언어 사전은 포르투갈 선교사 실바 신부가 마카오에서 출간한 『포르투갈어-테툼어 사전』(1889)이다. 1877년 티모르에 첫발을 디딘 후 12년 만의 쾌거였다. 이후 라파엘 다스 도레스가 『테툼어-포르투갈어 사전』(1907)을 리스본에서 출간했다. 식민 통치와 선교를 위한 도구였지만, 역설적으로 테툼어가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순간이었다.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 후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강제병합 1년 만에 『인도네시아어-테툼어 사전』(1976)을 출간했다. 언어 동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산속 게릴라들과 가톨릭교회는 검열을 피해 테툼어를 썼다. 점령자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테툼어는 저항의 암호가 되었다.

 

영어권에서는 호주군 출신 클리프 모리스가 테툼어-영어 사전(1984)을 편찬했고, 제프리 헐 교수가 『표준 테툼어-영어 사전』(1999)으로 약 2만 단어를 체계화했다. 이 사전은 어원과 문법적 용례를 정리하여 테툼어를 구어에서 문어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기존 테툼어 사전들은 대부분 단어와 뜻을 1:1로 대응시킨 용어집 형태였다. 예문이 거의 없었다. 필자는 2015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 사전 편찬을 제안했다. 동남아시아 동쪽 끝, 사용자 약 100만 명에 불과한 언어를 위해 한국의 사전학 전문가들이 손을 내밀었다. 네이버 문화재단이 재정을 지원했다.

 

목표는 ‘사전학적 미시구조’를 갖춘 사전이었다. 미시구조란 표제어의 발음, 품사, 문법 범주, 용례, 의미 분화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사전의 뼈대다. 테툼어 동사의 타동사 파생 접사, 시제 표시어(sei, ona 등)의 용법을 한국어 문법 체계와 정밀하게 대조했다. 동티모르국립대 말모이팀이 현지에서 표제어에 부합하는 예문을 작성했다.

 

한-동티모르 수교 20주년인 2022년에 첫 번째 결실이 나왔다. 9,914개 표제어를 수록한 테툼어-한국어 방향 사전이다. 2025년에는 9,386개 표제어의 한국어-테툼어 방향 사전이 뒤를 이었다. 한국어-테툼어 사전은 테툼어-한국어 사전보다 분량이 2배 많았다. 한국어의 섬세함을 테툼어로 표현하는 것이 예상보다 더 어려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

 

 

 

이 두 권의 사전은 공용어도 업무어도 아닌 외국어 최초로 미시구조를 갖춘 테툼어 이중언어 사전이다. 네이버 사전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테툼어에는 ‘우리’를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다. ‘Ami’는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가리키고, ‘Ita’는 상대방까지 포함한다. 흥미롭게도 ‘Ita’의 또 다른 뜻은 ‘당신’이다. 외국인은 ‘Ita’의 영역에 머문다. 함께 있되, 결국은 ‘타자’인 존재. 예외가 있다. 테툼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다. 서툰 발음에도 웃음이 번지고, 낯선 이방인에게 ‘Ami’의 문이 열린다. 사전은 그 문을 열게 하는 지적 토대다.

 

동티모르에는 ‘리아나인(lia-na'in)’이라는 전통이 있다. ‘말의 주인’, 공동체의 구술 전통을 보존하는 원로를 일컫는다. 135년간 여러 나라가 편찬한 사전들이 모여 테툼어의 새로운 ‘리아나인’이 되었다. 한국이 그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작은 자부심이다.

 

글쓴이=최창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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