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한국과 동티모르 사이에 두 개의 다리가 놓였다. 10월 9일 한글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원이 한국어-테툼어 사전을 출간했다. 고려대 사전학센터와 동티모르국립대 집필진이 함께 완성한 두 번째 사전이다. 17일 뒤, 동티모르는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승인됐다. 제도의 다리와 언어의 다리가 같은 달에 완성된 셈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인은 동티모르에서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할까? 동티모르 딜리 공항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곧 하나의 벽과 마주친다. 현지인과의 소통이다. 회의실에서 영어로 합의한 내용이 현장에 가면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이민의 역사가 오래된 중국인들은 이미 테툼어로 농담까지 주고받고, 미국대사는 부임 전 테툼어 연수를 마치고 동티모르인들과 직접 소통한다. 한국인은 의례 영어 통역사에 기댄다. 그러는 사이 업무 실행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우리는 동티모르가 조금씩 더 깊은 동반자가 되고 있다는 걸 잘 인식하지 못한다. 2024년 동티모르 중앙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해외 노동자들의 송금액은 2억 4,480만 달러(약 3,612억 240만 원)로 비석유 GDP의 12~13%를 차지한다. 한국발 송금은 전체의 22%인 5,380
2010년 동티모르국립대학교(UNTL). ‘리더십의 단계와 성격’을 강의하던 날,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내 논리에 정면으로 맞섰다. 반박은 날카로웠고 눈빛은 형형했다. 설전은 종강 벨이 울려서야 멈췄다. 그날 밤, 누군가 자취방 대문을 두드렸다. 낮의 그 학생이었다. 땀에 젖은 채 숨을 고르는 모습에 항의인가 싶어 긴장했으나, 짐작은 빗나갔다. “교수님, 수업 시간엔 제 생각을 다 전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 반대 의견을 가졌는지 설명드리고, 교수님 견해를 다시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우리는 현관 돗자리에 마주 앉아 어둠이 내릴 때까지 대화했다. 권위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왜’를 묻는 그 청년. 시간이 흘러 그 순간이 동티모르 민주주의와 만난 날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 세계언론자유지수 아세안 중 1위...숫자가 증명한 야성 그 학생의 당돌함은 우연이 아니었다. 2025년 국경없는기자회(RSF)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동티모르는 180개국 중 39위를 기록했다. 아세안국가 중에 차순위는 태국(85위), 말레이시아(88). 한국은 61위였다. 동티모르의 순위는 전년도 20위에서 크게 하락하긴 했음에도 동남아 1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정치 환경,
딜리(Dili)의 태양은 뜨겁고,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동티모르국립대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의 바닷가에는 푸른 바다를 뒤로 한 채 그냥 서 있는 청년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었다. 활기 넘쳐야 할 청년기, 하지만 그저 서 있는 모습. 어딘가에 막힌 활기, 가슴에 자리한 막막함의 상징이다. 동티모르 정치는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에 맞서 정글로 들어갔던 이른바 ‘75세대’가 여전히 이끌고 있다. 샤나나 구스망, 마리 알카티리, 조제 하무스-오르타. 이 이름들은 정치인이라기보다 살아있는 신화에 가깝다. 그들이 권좌에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24년간의 무장 저항과 독립 쟁취라는 역사적 정당성, 국민 대다수가 부여하는 신뢰, 그리고 아직 그 무게를 대체할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후속 세대의 현실이 맞물려 있다. 다만 영웅들의 시대가 너무 길어질 때, 국가가 도약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현지에서 통용되는 ‘마운 보트(Maun Boot)’ 문화가 이 상황을 설명해준다. 테툼어로 ‘큰 형님’을 뜻하는 이 단어는 전쟁 시기에는 생존을 위한 위계와 존경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이 문화는 사회적 결속의 기제로 작동하는 한편, 세대 간 권력 이동을 더
2025년 10월 26일, 동티모르는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공식 승인되었다. 가입 신청서를 제출한 지 14년 만이다. 동티모르 국민들은 이를 “제2의 독립”이라 부르며 환호했다. 인구 142만 명의 이 섬나라는 한국에도 낯익은 국가다. 아세안익스프레스는 2026년 병오년(붉은 말의 해)을 맞아 안토니오 데 사 베네비데스 대사를 만났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이 갖는 의미와 국가 비전을 들어보았다. 안토니오 대사는 “우리는 아세안이다”라는 새로운 자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동티모르 독립을 지원한 한국 상록수 부대 장병들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헌신을 기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 내 동티모르 유학생과 근로자들이 존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대사관이 힘쓰겠다고도 했다. ■ ‘낯설지 않은 형제의 나라’ Q (최창원 교수): 한국에 부임하신 건 언제입니까?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A (안토니오 대사): 2024년 10월 8일에 부임하여 이재명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저의 인상은 ‘낯설지 않은 형제의 나라’였습니다. 부임 전부터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동티모르 호텔 노보 투리스모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최 교수
2008년 8월, 니콜라우 로바토 국제공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공항 앞을 가득 메운 텐트촌이 시야에 들어왔다. UNHCR(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천막들,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뿜어내는 삶의 냄새. 독립한 지 6년이 지났는데 동티모르는 여전히 비상사태로 보였다. 1999년, 전권을 쥐고 이곳을 통치했던 UN의 실험은 대체 무엇을 남긴 걸까. ■ 폐허 위에 세운 나라: 브라질 출신 외교관 세르지우 시계를 1999년 10월로 돌려보자.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가 물러가며 휩쓸고 간 자리는 참혹했다. 세계은행 기록에 따르면 인프라의 70%가 파괴됐다. 이 잿더미 위로 UNTAET(유엔 동티모르 과도행정기구)가 들어왔다. UN 안보리 결의안 1272호는 이들에게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넘겼다. 한 국제기구가 한 영토의 모든 권력을 쥔 것은 유엔 역사에 없던 일이다. 이 과업을 브라질 출신 외교관 세르지우 비에이라 지 멜루가 맡았다. 900일.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잿더미 위에서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민주공화국이 UN의 191번째 회원국으로 들어섰다. 유엔이 처
2025년 10월 26일, 제47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동티모르가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공식 승인됐다. 가입 신청 후 무려 14년만의 승인이었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과 호주 북부 다윈 사이에 위치한, 강원도 크기의의 동티모르(수도 딜리Dili)는 인구 142만명의 동남아 최연소국가다. 동티모르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싸여있는 나라 중 하나다. 과연 어떤 나라이고, 어떻게 아세안에 가입할 수 있었을까? 왜 이렇게 가입에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아세안익스프레스는 2008년부터 14년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를 역임한 최창원 교수를 특별 칼럼니스트로 초빙한다. 그는 앞으로 동티모르의 역사와,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등 비하인드 스토리를 쉽게 술술 풀어낼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주] ---------------------- 2014년, 동티모르 산악도시 아이나로의 절벽 끝에 섰다. 현지인들이 '자카르타 루아(제2의 자카르타)'라 부르는 이곳. 인도네시아군은 덤프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와 모래를 쏟아붓듯 낭떠러지로 떨어뜨렸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들었다. 이야기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르투갈이 1974년 7
2025년 10월 26일, 제47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동티모르가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공식 승인됐다. 가입 신청 후 무려 14년만의 승인이었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과 호주 북부 다윈 사이에 위치한, 강원도 크기의의 동티모르(수도 딜리Dili)는 인구 142만명의 동남아시아 최연소 국가다. 동티모르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싸여있는 나라 중 하나다. 과연 어떤 나라이고, 어떻게 아세안에 가입할 수 있었을까? 왜 이렇게 가입에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아세안익스프레스는 2008년부터 14년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를 역임한 최창원 교수를 특별 칼럼니스트로 초빙한다. 그는 앞으로 동티모르의 역사와,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등 비하인드 스토리를 쉽게 술술 풀어낼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주] 1225년, 송나라 천주항(泉州港) 해상무역 감독관 조여괄(趙汝适, Zhao Rukuo)은 아랍과 동남아 상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제번지(諸蕃志, Zhu Fan Zhi)』에 기록했다. 그가 직접 가보지 못한 먼 섬 ‘디우(底勿)’에서는 백단향이 난다고 했다. 2세기 뒤인 1436년, 정화 함대의 군인 비신(費信, Fei Xin)은 『성사승람(星槎勝覽,
2025년 10월 26일, 제47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동티모르가 아세안의 11번째 정회원국으로 공식 승인됐다. 가입 신청 후 무려 14년만의 승인이었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과 호주 북부 다윈 사이에 위치한, 강원도 크기의의 동티모르(수도 딜리Dili)는 인구 142만명의 동남아시아 최연소 국가다. 동티모르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싸여있는 나라 중 하나다. 과연 어떤 나라이고, 어떻게 아세안에 가입할 수 있었을까? 왜 이렇게 가입에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아세안익스프레스는 2008년부터 14년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를 역임한 최창원 교수를 특별 칼럼니스트로 초빙한다. 그는 앞으로 동티모르의 역사와,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등 비하인드 스토리를 쉽게 술술 풀어낼 것으로 기대한다. [편집자주] ----------------------------------------------- 돌이켜보면 2008년 아세안 헌장(ASEAN Charter)이 발효된 이후, 그동안 한 국가도 정식 가입 절차를 통해 회원이 된 적이 없었다. 기존 10개국은 헌장 체제 이전에 합류한 국가였다. 지난 10월 26일, 인구 142만 명의 작은 나라가 아세안 헌장 체제 최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