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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아세안ABC 20] 제국의 흥망과 현대 미-중 경쟁

미-중 경쟁의 최전선 동남아 ‘ASEAN 중심성’ 다극성 질서 변화 대비

 

역사를 길게 바라보면 세계는 언제나 몇 개의 제국이 주도해 왔다. 그 제국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도, 또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도 아니다. 번영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부 균열과 외부 충격 속에서 서서히 힘을 잃는 일정한 패턴을 보였다. 오늘날 미중 경쟁을 바라볼 때도 우리는 이러한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제국이 존재했다. 이집트 제국,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 및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중화 제국, 오스만 제국, 동남아의 앙코르와 스리위자야 제국, 아프리카의 송가이 제국, 인도 무굴 제국 그리고 중남미의 마야-아즈텍-잉카 제국이 대표적이다. 이들 제국은 한때 광대한 영토와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주변 세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후손 국가들을 보면 대부분 과거의 제국적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이란, 튀르키예, 캄보디아, 페루, 멕시코, 사헬 지역 국가들을 보면 과거 제국의 영광과 현재 국력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예외적으로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면 중국이다. 중국은 진-한 이래 2000년 이상 제국적 질서를 유지해 온 ‘문명국가’로서 오늘날 다시 글로벌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연속성은 다른 고대 제국의 후손 국가들과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한 사례다.

 

그렇다면 수많은 제국은 왜 몰락했을까.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공통된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내부 균열이다. 로마 제국은 황위 계승 분쟁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력이 약화되었고, 오스만 제국 역시 행정 부패와 권력 투쟁이 누적되며 쇠퇴했다.

 

둘째는 생태와 기후 변화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제국은 장기 가뭄과 수리 시스템 붕괴로 경제 기반이 흔들렸고, 마야 문명 역시 기후 변화와 농업 생산 감소가 붕괴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셋째는 외부 침입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무너졌고, 아즈텍과 잉카 제국은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멸망했다. 스페인이 이긴 3대 무기는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책 ‘총, 균, 쇠’다. 그중 하나만 고르하면 단연 신세계에 저항력이 없는 천연두 등 구세계의 병원균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경우 외부 침입은 이미 내부적으로 약화된 제국에 결정타를 가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패턴은 오늘날 미-중 경쟁을 바라보는 데도 시사점을 준다. 현재 국제질서는 미국이 구축한 국제질서 위에서 중국이 빠르게 부상하는 구조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군사력과 금융 시스템, 그리고 광범위한 동맹망을 가진 초강대국이다. 반면 중국은 세계 최대 제조업 기반과 거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경제-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제국의 역사에서 보듯이 강대국의 미래는 단순히 경제 규모나 군사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내부 통합과 제도적 안정, 그리고 사회적 신뢰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미국의 경우 정치적 양극화와 재정 부담이 장기적인 도전 요인으로 거론된다. 중국 역시 인구 감소와 경제 구조 전환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결국 두 강대국 모두 내부 문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국제질서의 향방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동남아시아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미중 경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지역이 바로 동남아다. 남중국해 문제, 공급망 재편, 기술 경쟁 등 주요 지정학적 이슈들이 모두 이 지역과 맞물려 있다. ASEAN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자율성을 확보하는 외교 전략을 발전시켜 왔다. 이른바 ‘ASEAN 중심성(centrality)’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개념이다.

 

제국의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어떤 강대국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국제질서는 완전히 붕괴하기보다는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며 재편되어 왔다. 오늘날 미중 경쟁 역시 기존 질서의 단순한 붕괴라기보다 새로운 다극적 질서로의 전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동남아와 같은 중견 지역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전략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제국의 흥망을 돌아보면 국제질서의 변화는 언제나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가장 지혜롭게 대응한 지역과 국가가 결국 새로운 시대의 기회를 잡아 왔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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