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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아세안ABC 19] 동남아 잇는 ‘바닷길’ 역사와 외교

갈레온에서 호르무즈까지, 연결의 정치학...특정 해상통로 위기는 세계질서 재편

 

주말 아침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다가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지인이 보내온 필리핀 마닐라 갈레온 박물관 안내판이었다. 필자가 아세안대사로서 2015년 아세안 의장국 50주년 계기 개관식에 참석했던 기억도 겹쳐진다. 코로나로 문을 닫았던 박물관이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은 단순한 재개관 이상의 의미를 던진다. 그것은 동남아를 관통하는 하나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기 때문이다.

 

동남아의 역사를 움직인 것은 정복이 아니라 바닷길이었다는 사실이다.

 

16세기 중반 시작된 마닐라–아카풀코 갈레온 항로는 약 250년간 이어지며 세계 최초의 태평양 글로벌 공급망을 형성했다. 멕시코와 포토시(현재 볼리비아)의 은은 중국의 비단과 향신료를 사들이는 데 쓰였고, 아시아의 상품은 유럽으로 흘러갔다. 은이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이 은본위제 경제화하는데 촉매제가 되었다. 마닐라는 그 교차점이었다. 이 항로는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원형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연결도 영원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갈레온 무역은 멕시코 독립, 경제성 약화, 제국 재정의 한계 속에서 막을 내린다. 중요한 점은 하나다. 특정 항로의 쇠퇴는 단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세계질서 변화의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이후 역사는 다시 방향을 튼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열리면서 유럽–인도양–동남아를 잇는 새로운 해상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스페인 카디즈에서 출발해 수에즈를 지나 싱가포르와 마닐라로 이어지는 항로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제국의 길은 선교의 길이 되었고, 교역의 흐름은 다시 재편되었다.

 

갈레온이 태평양 중심의 세계화를 상징한다면, 수에즈는 인도양 중심의 새로운 세계화를 열었다. 동남아는 그때마다 주변이 아니라 교차로로 재등장했다.

 

이 역사는 오늘에도 반복된다. 다만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 세계는 다시 바닷길의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2.28 발생한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은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전 세계 원유의 약 20%가 통과하는 이 해협이 흔들리면, 에너지와 물류의 흐름 전체가 흔들린다.

 

이는 19세기 갈레온의 붕괴나 수에즈 이전의 항로 단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특정 해상 통로의 위기는 곧 세계질서의 재편으로 이어진다.

 

동남아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부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호르무즈 리스크가 커질수록 인도양–말라카 해협–남중국해를 잇는 동남아 해상 네트워크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동남아는 역사적으로 늘 강대국 사이에 놓여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단순한 수동적 공간에 머물지 않았다. 갈레온 시대에는 태평양의 허브였고, 수에즈 시대에는 인도양의 연결점이었으며, 오늘날에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이다.

 

그들이 선택해온 전략은 일관되다.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연결을 확장하는 것이다. ASEAN이 내정불간섭과 협의(consultation)와 합의(consensus)를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한국 외교에도 분명한 교훈이 있다. 하나의 항로에 의존하는 순간 위험은 구조화된다. 갈레온이 그랬듯, 특정 축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수에즈 이후의 전략이다. 연결의 다변화다. 한미동맹이라는 축을 유지하면서도 ASEAN과의 해양·에너지·디지털 공급망 협력을 확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운대 바다를 다시 바라본다. 이 물길은 카디즈에서 시작해 수에즈를 지나 마닐라로 이어지고, 오늘은 다시 호르무즈의 긴장과 연결된다.

 

동남아의 역사는 늘 바닷길 위에서 움직여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바닷길이 세계를 흔들고 있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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