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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아세안 ABC 17] 중동전쟁과 동남아 경제 시험대

브렌트유 70달러에서 100달러로…1998년 5월, 자카르타 아시아 금융위기 악몽 연상

 

1998년 5월, 자카르타의 거리는 불타고 있었다.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루피아 폭락과 물가 급등이 이어지던 가운데 연료 가격 인상이 불씨가 되어 전국적인 폭동으로 번졌다. 당시 나는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영사로 근무하며 그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서 시위와 약탈이 이어졌고 교민 사회도 긴장 속에서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연료 가격과 생활 물가가 정치적 불안으로 얼마나 빠르게 연결될 수 있는지 체감한 순간이었다.

 

최근 중동 긴장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그 기억이 떠오른다.

 

이란을 둘러싼 중동 긴장이 고조되면서 국제유가는 빠르게 상승했다. 전쟁 이전 배럴당 약 70달러 수준이던 브렌트유 가격은 3월 초 90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3월 8일 기준 100달러 수준에 도달했다. 불과 몇 주 사이 약 40% 가까이 상승한 셈이다. 시장에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120~140달러 수준까지 상승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러한 에너지 충격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보통 세 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전쟁 직후 나타나는 금융시장 충격 단계, 두 번째는 물가와 성장률 변화가 나타나는 거시경제 조정 단계, 세 번째는 에너지 정책과 산업 구조 변화로 이어지는 구조적 조정 단계다.

 

현재 세계 경제는 첫 번째 단계인 금융시장 충격과 소비자 체감 가격 상승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중동 긴장이 고조되면서 달러 강세가 나타났고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의 통화가 약세를 보였다. 한국 원화도 예외가 아니다. 전쟁 이전 달러당 약 1320원 수준이던 환율은 최근 1380원 안팎까지 상승하며 약 4~5% 원화 가치가 하락했다.

 

동남아 통화도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전쟁 이후 약 일주일 사이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약 2%, 태국 바트는 약 1.6~2%, 베트남 동은 약 1% 정도 달러 대비 가치가 하락했다.

 

금융시장도 빠르게 반응했다. 태국·베트남·인도네시아 증시는 최근 일주일 사이 6~8% 하락했다. 태국 SET지수는 장중 8% 급락하며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고 베트남 VN지수도 약 6% 하락했다. 인도네시아 종합주가지수 역시 약 7% 이상 하락했다.

 

유가 상승은 소비자 생활에서도 체감되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 휘발유 가격은 전쟁 이전 갤런당 약 3달러 수준에서 최근 3.8~4달러 수준으로 상승했다. 1갤런이 약 3.785리터임을 감안하면 리터 기준 가격은 약 0.79달러에서 1달러 수준으로 올라 약 25~30% 상승한 셈이다.

 

한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쟁 이전 리터당 약 1600원 수준이던 휘발유 가격은 최근 1850~1950원 수준으로 상승했다. 약 15~20% 상승이다.

 

동남아에서도 유가 상승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인도네시아: 리터당 약 10,000루피아 → 약 12,000루피아 (약 20% 상승)

 

•태국: 리터당 약 37바트 → 약 41바트 (약 10~12% 상승)

 

•베트남: 리터당 약 23,000동 → 약 26,000동 (약 13% 상승)

 


즉 미국과 한국뿐 아니라 동남아에서도 주유소에서 전쟁의 영향을 체감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각국은 전략 비축유로 단기 충격을 버티고 있다. 그러나 비축 규모는 국가마다 차이가 크다. 한국의 원유 비축 규모는 약 207일분으로 OECD 국가 가운데서도 높은 수준이다. 반면 동남아는 상대적으로 낮다. 태국 약 95일, 필리핀 50~60일, 베트남 약 45일, 인도네시아 약 22~25일 수준이다.

 

즉 에너지 공급 충격이 장기화될 경우 동남아 경제가 한국보다 더 큰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국제유가가 120~140달러 수준까지 상승할 경우 동남아 경제는 세 가지 압력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첫째는 경상수지 악화다. 에너지 수입 비용 증가로 무역수지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인플레이션 상승이다. 운송비와 전력비 상승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

 

셋째는 재정 부담 증가다. 동남아 정부들은 연료 보조금을 통해 가격 상승을 억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고유가는 정부 재정을 압박한다.

 

이 지점에서 다시 1998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카르타에서 목격했던 사회 불안은 연료 가격과 생활 물가가 단순한 경제 변수가 아니라 정치적 안정과 직결되는 변수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중동에서 시작된 지정학적 긴장은 이제 글로벌 경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동남아 경제는 또 하나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단기적으로는 금융시장 안정과 물가 관리가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공급 다변화와 전략 비축 확대가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중동의 불길이 언제 꺼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정학적 충격이 반복되는 시대에 경제의 회복력(resilience)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에너지 안보는 이제 더 이상 중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경제 안정의 핵심 변수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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