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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아세안ABC 21] 림랜드서 바라본 동남아, 그리고 한국

바다와 대륙 사이 '동남아' 주목 이유...한국도 ‘균형과 연결 외교’ 배워야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수평선 너머로 이어지는 길은 어디까지 닿아 있을까.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일본을 지나 동중국해를 건너고, 더 내려가면 남중국해와 말라카 해협을 지나 동남아로 이어진다. 그 길은 단순한 항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문명과 권력이 오간 길이었다.

 

나는 20여 년 넘게 동남아와 아세안을 연구하고, 그 현장에서 살아왔다.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 태국에서 한 번 근무했고, 호주와 일본에서도 각각 근무하며 동남아를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동시에 바라볼 기회를 가졌다. 외교부 본부에서는 동남아과장, 아세안국 심의관, 그리고 아세안국장을 맡으며 동남아 전역을 수없이 오갔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 지역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동남아가 단순한 지역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고전으로 돌아간다. 지정학의 세 가지 고전 이론—핼퍼드 매킨더(Halford Mackinder)의 심장지대론(하틀랜드, Heartland), 앨프리드 타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의 해양지배론(Sea Power), 그리고 니콜라스 스파이크먼(Nicholas Spykman)의 림랜드 이론(Rimland)-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산 해석이 틀을 제공한다.

 

매킨더는 유라시아 내륙, 즉 “하틀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대륙의 힘, 연결성, 그리고 내륙 통제력이 핵심이었다. 반면 마한은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해상 교통로, 항구, 해군력—이것이 곧 권력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스파이크먼은 이 둘 사이에 주목했다. 그는 “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대륙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 인구와 경제가 밀집하고 교역이 집중되는 공간—그곳이 바로 림랜드다.

 

이 세 가지 이론을 오늘의 세계에 대입해 보면 흥미로운 그림이 그려진다. 미국은 여전히 전형적인 해양세력이다. 항공모함과 글로벌 해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반면 중국은 대륙세력에서 출발해 점차 해양으로 확장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매킨더적 사고의 현대적 표현이고, 남중국해 진출은 마한적 전략의 실천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만나는 공간은 어디인가. 바로 동남아다.

 

동남아는 전형적인 림랜드다. 말라카 해협을 비롯한 주요 해상 교통로가 지나고, 대륙 동남아와 해양 동남아가 교차하며, 인구와 시장이 밀집해 있다. 이 지역은 단순히 ‘중간지대’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안보의 흐름이 교차하는 핵심 공간이다. 그래서 동남아는 늘 강대국의 관심을 받아왔고, 동시에 스스로의 균형 감각으로 생존해왔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에 위치할까.

 

지도를 펼쳐 보면 한반도는 분명 대륙과 연결된 반도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북쪽은 막혀 있고, 우리의 생존과 번영은 바다에 의존한다. 에너지와 식량, 수출입의 대부분이 해상로를 통해 움직인다.

 

그래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는 림랜드에 속하지만, 전략적으로는 해양국가다. “북한으로 막힌 해양국가”라는 표현은 이 복합적 정체성을 가장 정확히 설명해준다.

 

이 지점에서 한국과 동남아는 만난다.

 

우리는 모두 림랜드에 위치해 있다. 강대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동남아가 ‘선택적 중립’이라는 지혜를 발전시켜온 것처럼, 한국 역시 균형과 연결의 외교를 고민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그래서 한-아세안 협력은 단순한 경제협력을 넘어선다. 그것은 지정학적 필연에 가깝다.

 

첫째, 해양 협력이다.

 

동남아의 해협과 한국의 해운은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되어 있다. 말라카 해협이 막히면 부산항도 영향을 받는다. 해양안보, 항로 보호, 항만과 물류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공동 생존의 문제다.

 

둘째, 공급망 협력이다.

 

오늘날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의 핵심 축은 동남아에 있다.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는 이미 제조와 소비가 결합된 공간이다. 한국의 기술과 동남아의 시장이 결합할 때, 새로운 경제 축이 만들어진다.

 

셋째, 전략적 완충지대 역할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격화될수록, 그 사이의 공간은 더 중요해진다. 동남아와 한국은 충돌의 전장이 아니라, 충돌을 완화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림랜드 국가가 가진 가장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다.

 

나는 동남아를 오랜 시간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때로는 복잡하고, 때로는 느리고, 때로는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느끼는 것은, 그들이야말로 균형과 유연성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의 세계는, 그런 지혜를 필요로 한다.

 

해운대 바다를 다시 바라본다. 그 바다는 단순히 풍경이 아니라, 한국과 동남아를 잇는 거대한 길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질서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아마도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우리는 림랜드에 서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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