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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스캔들’ 필리핀, 전국 20개 도시 10만명 대규모 시위 이후 앞날은?

곡효운 교수 분석, 마르코스 현 대통령 생존실험 돌입 분석
취임 후 최대 규모..'조 단위 페소 행진' 속 대통령은 ‘실종’
대통령궁 앞 불길..경찰은 물대포-취루가스 동원 진압 대치
원인은 경제곤궁-정치무능..."정적 제거 -동맹 재정비" 설도

 

필리핀이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가장 큰 위기에 처했다.

 

2025년 9월 21일 수도 마닐라를 비롯한 전국 20개 이상 도시에서 시위 인파가 몰려들었다. "우리는 일해서 도둑질 대가를 치른다"는 피켓이 등장했다. 시위는 참여 인원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대통령궁 앞에서는 불길이 치솟았고, 시위자들은 타이어를 태웠다. 소이병을 투척했으며, 방범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 가스를 동원했다. 2013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국민저항이었다.

 

곡효운 광운대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 격렬한 장면은 마치 역사가 1970년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던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고 표현했다.

 

왜 필리핀의 국민들은 분노했을까? 표면적으로는 대통령 사촌인 하원의장 마틴 로무알데스가 주도한 약 5000억 필리핀페소(약 12조3000억원)의 예산이 투입, 3년간 진행된 홍수방지 사업에서 최대 2조 8,800억 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전국 시위를 하기로 한 9월 21일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호소한 '전국 항의의 날'이자, 1972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전국 계엄을 선포한 기념일이었다. 곡효운 교수는 이번 시위의 배경에는 부패와 빈곤, 정치 가문의 숙명이 숨어있다고 진단했다.

 

 

■ '조 단위 페소 행진'...부패와 빈곤, 정치 가문의 숙명 ‘역사의 갈림길’

 

이번 시위는 '조 단위 페소 행진'으로 불린다. 곡효운 교수는 “이번 시위는 단순한 거리 분노가 아니라, 필리핀 사회의 장기적인 모순이 집중적으로 폭발한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 배경에는 부패와 빈곤, 정치 가문의 숙명, 그리고 외부 세력의 은밀한 부추김이 자리 잡고 있다. 필리핀은 다시 한번 역사의 갈림길에 선 듯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대규모 시위의 도화선은 홍수 방지 사업과 관련된 초대형 부패 사건이었다. 원래 재해 예방 및 경감에 사용되어야 할 자금이 2023년부터 2025년 사이에 걸쳐 단계적으로 유용되어 손실액이 무려 1800억 달러(약 1조 페소)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필리핀은 태풍이 빈번하고 홍수가 자주 발생한다. 홍수방지 사업비 횡령은 국민들의 '생명선'과도 같은 돈을 빼앗는 행위와 다름없다. 특히 9월 초에만 해도 심각한 홍수가 발생해 수백만 명이 피해를 입고 수십만 명이 집을 잃었다. ‘부패스캔들’은 분노에 가득찬 국민들의 마음에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시위자들이 의도적으로 9월 21일을 대규모 시위(Trillion Peso March) 행동일으로 선택했다. 그날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호소한 '전국 항의의 날'이자, 1972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전국 계엄을 선포한 기념일이었다.

 

이런 택일은 국민들의 분명한 암시를 반영한다. 역사의 비극이 재현되어서는 안 되며, 현 마르코스 대통령은 부모 세대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신호였다.

 

■ 시위는 폭력 충돌로 이어져...사태 속 대통령 모습은 ‘실종’

 

시위는 대학, 시민단체, 종교계가 동참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Z세대 등 청년층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시위는 곧 폭력 충돌로 번졌다. 리잘 공원에는 약 5만 명이 모였다. 케손 시의 인민력량 기념관 앞에서는 1만 5000명이 집회를 가졌다. 특히 대통령궁 인근에서는 상황이 통제를 벗어났다.

 

 

다수의 시위자들이 차벽을 뚫고 트럭과 컨테이너를 불태웠다. 알라야 다리 근방은 불빛에 환하게 밝혀졌다. 경찰 7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물대포와 최류탄을 동원한 총력 대응에 나서 최소 216명을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12세 미성년자도 포함된 89명이 미성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모습은 없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당시 말라카냥궁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실종'된 대통령으로 인해 어떤 이는 이 상황이 마치 과거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허겁지겁 도망치던 때를 연상시킨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곡 교수는 부패는 표면적인 도화선이라고 진단했다. 분노의 뿌리는 더 깊다는 것. 경제와 정치의 실망과 무능에 대한 폭발이라는 것.

 

첫째는 경제적 곤경이다. 물가 급등과 높은 생활비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많은 이에게 정부의 부패는 추상적인 숫자가 아니라, 매일 식탁 위의 빈 접시와 홍수가 닥쳤을 때 갈 곳 없는 비참한 현실이다.

 

둘째는 정치적 실망이다. 필리핀 사회는 소수 가문에 의해 장기간 지배되어 왔다. 현 마르코스 대통령은 '정치 세습'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현재 터진 스캔들에는 그의 측근뿐만 아니라 그의 사촌인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도 연루되었다. 17일 로무알데스가 책임을 지고 사임한 것은 오히려 국민들에게 '권력자들은 서로만 보호하고 서민들이 희생양일 뿐'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셋째는 무능한 정치에 대한 분노다. 경찰은 5만 명의 인원을 즉각 동원해 시위를 진압할 수 있지만, 홍수 발생 시 국민들에게 깨끗한 대피소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선명한 대비는 국민의 분노를 직접 행동으로 전환시키고 말았다.

 

■ 거세지는 시위, 정부는 ‘외부세력 조종’ 책임 전가 시도

 

거세지는 시위에 맞선 마르코스 현 정부는 정부 대변인을 통해 '외부 세력의 조종이 있다'는 암시를 내비치며 책임 전가를 시도했다.

 

필리핀 국민들은 이를 외면했다. 그들이 더 관심 있는 것은 “돈이 어디로 갔는가” “왜 삶이 이렇게 힘든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상원 청문회에서 출석한 건설업체 관계자가 최소 17명의 하원의원에게 뇌물을 건넸다고 폭로했다.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은 부랴부랴 독립위원회 구성을 공식 발표하면서 친척-측근도 예외 없이 수사하겠다고 약속했다.

 

경찰과 군은 최고 경계 태세에 들어 진압과 통제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억압이 강할수록 국민의 불만은 더 커진다. 현재 전국 200여 개 사회 단체들이 힘을 모으고 있어 앞으로 더 대규모의 시위 물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마르코스 현 대통령에게 ‘피할 수 없는 생존 시험’이다. 강력 진압은 총체적인 혼란을 초래할 수 있고, 타협은 약해 보인다는 비난을 받아 정권의 기반을 흔들릴 수 있다.

 

필리핀 역사에서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부패와 독재로 결국 해외로 추방당했다. 현재 마르코스 현 대통령은 유사한 처지에 직면해 있다. 국민의 분노가 거세지고 정권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있다.

 

 

필리핀의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진압을 통한 안정화다. 군부의 확고한 지지 아래 마르코스 현 대통령이 단기적으로는 국면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깊은 대립에 빠질 것이다.

 

둘째는 타협과 개혁이다. 정부가 진정으로 반부패를 시작하고 권력층의 책임을 묻는다면 부분적인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는 자신의 기반을 뒤흔드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는 정권 교체다. 일단 군과 경찰이 배신하면 필리핀은 40년 전의 상황이 재현되어 마르코스 가문이 다시 추방될 수도 있다.

 

물론 곡 교수와 달리 “부패 스캔들을 먼저 발표하고, ‘내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거리에서 함께 했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마르코스 대통령의 각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번 시위가 7월 마르코스가 국정 연설에서 홍수 방지 공사가 제대로 끝나지 않았다고 공개 지적했고, 문제업체 명단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여기에다 현직 대통령이 사실성 시위를 격려한 드문 장면도 공개되었다. 독립조사위원회 구성에도 여당 실세의 측근과 친인척 인사가 다수 포함되었다는 것. .

 

2028년 대선을 앞두고 불편한 파트너를 정리하고, 완전한 친정부 진영으로 개편하겠다는 숨은 노림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위마저 ‘정적을 누르고 동맹을 재정비한다“는 그가 치밀하게 설계한 정치적 연극이자 시민들이 조연으로 동원되었다는 시각이 나온다.

 

한편 필리핀 외에도 인도네시아, 네팔, 동티모르 등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정부와 정치권의 특권·부패에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는 국회의원들의 특혜에 반발한 시위대가 방화와 약탈로 이어져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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