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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아세안ABC 6] 미-중 세력권 경쟁의 그늘: 동남아와 중남미

“트럼프판 먼로주의”가 떠올린 '뒷마당'론으로 본 대륙 동남아와 쿠바의 미래는?

 

요즘 나는 아침에 뉴스를 볼 때 동남아 기사뿐 아니라 중남미 뉴스에도 눈길이 간다. 아세안 소식이야 오래된 습관이지만, 중남미까지 챙겨보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12월 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서(NSS)에서 미국은 중남미가 속한 ‘서반구(Western Hemisphere)’를 최우선 전략 공간으로 명시했다. 국내외 언론은 이를 두고 ‘트럼프판 먼로주의’, 혹은 ‘트럼프식 먼로주의 추론’이라고 해석했다.

 

19세기 초, 미국이 아직 유럽 열강에 비해 힘이 약하던 시절, 중남미에 발을 들이려는 유럽 식민 강국들에게 “이곳에 오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 먼로주의였다. 이후 미국이 강대국이 된 뒤,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에는 그 경고에 ‘행동’이 더해졌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겠다는, 이른바 ‘루즈벨트 추론’이다. 그렇게 중남미는 미국의 ‘뒷마당(backyard)’으로 굳어졌다.

 

이 맥락을 이해하면, 미국이 1959년 혁명 이후 공산국가가 된 쿠바를 지금까지도 장기간 경제제재해 온 이유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 세계대전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으로 기록된다. 미국은 자신의 뒷마당에 소련이 본토를 겨냥한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벼랑 끝 전술로 소련의 미사일 철수를 관철해냈다.

 

이 사건은 이후 소련은 물론, 중남미의 반미 정권들에게도 강력한 ‘교훈’으로 남았다. 합법적 선거로 집권했더라도 미국의 영향권을 벗어나려는 정부가 등장하면, 미국은 종종 CIA를 통한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1973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는 그 대표적 사례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압박을 노골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미 해안경비대가 베네수엘라 유조선을 세 차례나 나포했다. 숨통을 죄겠다는 의도다. 이 여파는 베네수엘라에만 그치지 않는다. 차베스, 마두로 정권이 쿠바에 무상 지원해 오던 석유 공급도 끊길 위기에 놓였다. 쿠바가 과연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필자가 멕시코 대사 시절 쿠바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곳에서 본 쿠바의 현실은 숫자로만 접하던 경제 지표보다 훨씬 처절했다. 환율은 왜곡돼 있고, 인플레이션은 일상이었으며, 생필품 배급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특급호텔조차 수시로 정전이 됐다. 외화를 받는 슈퍼마켓에 들어가기 위해 새벽부터 번호표를 받으려는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20년 이후 쿠바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300만 명이 섬을 떠났다. 주로 청년들이었다. 그 결과 오늘의 아바나는,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처럼 ‘노인과 바다’의 도시가 돼 가고 있다. 부산을 ‘노인과 바다의 도시’라 부르는 것은, 솔직히 말해 배부른 사치다.

 

올해 신년 벽두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마두라 대통령을 체포해 미국 압송했다. 다음 타깃으로 쿠바를 겨냥할 것이라는 관측은 이제 공공연하다. 쿠바계 미국인 출신인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그 선봉에 서 있다.

 

이런 흐름을 보며, 쿠바에 남아 있는 우리 한인 후손들—5·6세대 약 1000명 남짓—의 얼굴이 떠오른다. 2024년 2월 한–쿠바 수교 발표 이후, 한인 후손 청년들의 한국 방문을 돕자는 이야기가 오갔던 기억도 난다. 실제로 후원을 약속한 분이 나타나 10명 선발까지 마쳤지만, 가족 내 이견으로 끝내 무산됐던 아쉬운 일도 있다. 미국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이 청년들의 절망은 더 깊어질 것이다. 누군가 그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미국이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굳히는 지금의 현실은, 쿠바 한인 후손들만이 아니라 중남미 민초들의 삶 전반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미국은 사방이 천연 요새로 둘러싸여 있고, 자원과 인구도 풍부한 나라다. 각자도생이 가능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중남미에 이토록 집착하는 데에는 분명 더 큰 지정학적 계산이 있을 것이다. 중국의 중남미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려는 의도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멕시코를 제외한 다수 중남미 국가들의 최대 교역국은 이미 중국이다. 투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동남아는 어떤가.

 

중국과 육지로 맞닿은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베트남·태국(CLMVT)은 물론, 해양 동남아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까지 중국의 영향력은 빠르게 깊어지고 있다.

 

특히 대륙 동남아는 사실상 중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 중남미를 ‘뒷마당’으로 굳히듯, 중국 역시 대륙 동남아를 자신들의 전략 공간으로 다지고 있다. 아직은 미중이 경합하는 열린 앞마당이지만 중국의 뒷마당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역 안보의 1차적 책임을 해당 국가들에 넘기고, 미국은 한발 물러서는 모습은 앞으로 동남아에서 새로운 ‘정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9월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 '스지(Suji)'는 이러한 흐름에 우려를 표하며, 베트남과 태국 같은 핵심 국가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쿠데타와 총리 교체가 반복되는 태국의 불안정한 정치, 그리고 탈세계화와 미·중 디커플링, 관세 압박 속에서 중국을 노골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베트남의 현실을 보면, 그 기대가 얼마나 실현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남아와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한국이, 미국이 다시 적극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 지역의 ‘헷징(hedging, 투자할 때 손실을 피하기 위해 위험을 분산시키는 전략) 파트너’가 될 공간은 없는가. 혼자 버겁다면 일본, 호주, 인도 같은 유사 입장의 국가들과 함께 동남아의 완충 지대를 형성할 수는 없을까.

 

동남아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머지않아 이 지역은 중국의 또 다른 ‘뒷마당’이 될 가능성이 크다. 중남미에서 이미 목도하고 있는 장면이, 형태만 바꾼 채 동남아에서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요즘 나는, 동남아 뉴스 옆에 놓인 중남미 기사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오래 바라보게 된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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